“방송까지 정지당했다”
그녀에겐 대체 무슨 일이?
가수 김상희. 그녀는 1960년대 대한민국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자, 미니스커트와 뱅헤어의 원조였다. 한때는 ‘법대를 나와 법관이 되라’던 어머니의 기대를 뒤로하고 무대에 섰고, 또 한때는 모두가 반대했던 결혼을 밀어붙인 끝에 600년 종갓집 맏며느리가 됐다.
사람들은 그저 노래하는 김상희만을 기억하지만, 그 이면엔 언제나 험난한 길이 자리해 있었다. 1980년대 남편의 정치적 망명과 함께 방송에서 사라졌던 김상희의 삶에는 어떤 사연들이 숨겨져 있을까?
김상희는 원래 고려대 법대를 다니던 ‘전교 1등’ 수재였다. 1961년, 가수가 될 운명을 자각하지 못한 채 단순히 합창단에 지원했다가 실수로 보게 된 전속가수 오디션에 합격하면서 그녀의 인생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하지만 가족의 반대와 학교의 교칙 때문에 본명 최순강으로 데뷔할 수 없어, 가장 흔한 성과 친구의 이름을 딴 예명 ‘김상희’로 활동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됐다.
그녀의 대표곡 ‘삼오야 밝은 달’을 시작으로, ‘코스모스 피는 길’, ‘울산 큰 애기’ 등 수많은 히트곡이 잇따라 나오며 인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꿈꿨던 무대는 상상보다 녹록지 않았다.
사라진 남편의 행방
김상희의 인생은 사랑 앞에서 큰 전환을 맞았다. 1970년대 초, KBS PD였던 유훈근을 만나 결혼을 결심했으나, 양가 가족들은 결사 반대에 나섰다.
김상희의 부모는 종갓집 장남에게 애지중지 키운 딸을 보내기 싫어했고, 유훈근의 가족은 “가문을 이끌어야 할 며느리가 왜 가수냐”며 반대했다. 그러나 유훈근은 두 사람의 결혼을 단호히 밀어붙였다. 결혼식 날, 심신이 지친 남편은 퇴장 직후 쓰러져 앰뷸런스에 실려 가기도 했다.
결혼 이후 김상희는 가수 생활보다 종부로서의 의무를 지며 종갓집 생활에 적응했다. 이후 남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보 비서관으로 활동하며 정치적 상황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김상희 역시 활동이 금지되고 감시를 받게 되었다.
결국 남편은 미국으로의 망명을 선택해야 했고, 그런 남편을 대신해 김상희는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다. 그녀는 이화여대 앞에서 햄버거 장사를 하며 세 아이를 돌보며 암울한 시간을 버텼다.
그러나, “언젠가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녀는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세월이 흐르고, 정치적 상황이 변하며 김상희는 다시 브라운관에 얼굴을 비출 수 있었다. 81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KBS1 ‘가요무대’ 등 다양한 무대에서 세월을 이긴 청춘을 자랑한 그녀는 여전히 무대에 서고 있다.
따뜻한 목소리로 힘든 시간을 위로하는 김상희의 노래가 국민들에게 전해지는 한, 그녀의 노래 인생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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