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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동서양의 이분법을 넘은 예술적 가치의 설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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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플릭스] 이동현 기자 = 예술에 농락당하는 인간의 포옹력은 그리 넓지 않다.

자연을 감탄하며 화폭을 옮기는 순간부터 동서양의 예술은 같은 출발선에 서 있지만, 개념의 결에서 현격한 차이를 드러낸다. 

동양은 기운을 스며들게 하고, 서양은 자연 속에서 낭만과 사유를 호출한다.

겸재 정선 [금강산도]=이미지
겸재 정선 [금강산도]=이미지

동양 예술은 본래 ‘결’에서 시작된다. 결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흐름이다. 표현은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절제된다. 

이에 비해 서양 예술은 자연을 배경으로 삼되, 보이지 않는 정신과 개념까지 끌어올려 사유의 장을 확장한다. 그 뒤에는 필연적으로 개념적 사고가 자리한다.

동양의 표현이 각을 세워 범위를 제한한다면, 서양은 응용과 변형을 통해 자연의 재료를 급진적으로 확장한다. 상상의 도약은 동양의 미학적 개념을 넘어설 만큼 과감하며, 때로는 낭만의 정서를 과잉 소진하기도 한다. 

이처럼 역사적 토양이 다른 만큼 예술을 지배하는 힘 또한 다르게 작동한다.

동양의 미는 ‘결’을 따르기에 외형적 폭은 협소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도’라는 근원적 사유가 정확히 응축되어 있다. 

절제 속에서 존재론을 사유하고, 득음하듯 도달하는 깨달음을 미적 형식으로 전환한다. 비범하면서도 도도한 태도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반면 서양 예술은 존재론적 질문을 진리의 논리로 경계 짓는다. 그러나 그 경계는 동시에 표현의 자유를 긁어내는 도구가 된다. 사조와 논쟁이 축적될수록 형식은 파격으로 치닫고, 의식의 확장은 예술의 외연을 밀어낸다

르네 마그리트 [피레네산맥의 성]=이미지
르네 마그리트 [피레네산맥의 성]=이미지

과거 회화가 재현을 중심에 두었다면, 현대 회화의 핵심은 그 재현 이념을 해체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는 돌발적 전환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토스가 말한 ‘만물은 흐른다’는 사유에서 이미 존재의 불안정성은 예고되었다. 해변의 모래성이 무너질 때, 우리는 파괴 속에 잠재된 또 다른 창조를 목격한다. 무너짐은 소멸이 아니라 변형이다.

그렇다면 재현이란 무엇인가? 2차원 평면 위의 재현은 과연 현실의 모사인가, 아니면 인식의 구성인가. 현대 회화가 외면을 버리고 내면을 탐색한다면, 그 ‘내면’은 실체인가 구조인가. 질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나 그 골치 아픔은 사유의 고통이 아니라 철학적 쾌감이다.

예술은 사골처럼 우러나기도 하고, 스스로를 파괴하며 다시 확장된다. 그것은 시각적 법칙에만 머물지 않는다. 관념 속에 잠긴 진실을 끌어내려는 시도이며, 절대적 아름다움의 우위를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존재론적 사고가 다양한 층위로 중첩될 뿐이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되는 시대, 곧  장 보드리야드가 말한 시뮬라크르의 조건 속에서 현대인의 감각은 장 보드리야르이미 기호에 잠식되어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예술적 가치는 단순한 미적 판단 이전에 예술가에게 무거운 질문으로 다가온다.

예술의 배면에는 늘 사유가 있다. 존재의 빛을 부각하려는 철학적 태도다.

아리스토텔레스 가 말한 로고스(논리), 파토스(감정), 에토스(신뢰)는 서로 다른 설득의 장치이지만, 예술 안에서는 하나의 구조로 얽힌다. 논리만으로도, 감정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세 요소가 교차할 때 예술의 설득력은 증폭된다.

결국 예술의 가치는 철학적 사유에만 머물지 않는다. 사유는 토대이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현실과 감각, 존재와 인식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비로소 예술은 살아 움직인다.

그 움직임을 감당하는 일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짊어져야 할 가장 현실적인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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