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거] 톰 크루즈의 변신은 반갑지만… 정작 놓친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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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위크=이영실 기자 그린란드 빙하에 대규모 시추 시설을 설치한 석유 재벌 디거 록웰(톰 크루즈 분). 막대한 부와 권력을 손에 쥔 그는 자신의 판단에 한 치의 의심도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시추 시설이 자리한 빙하에 작은 균열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들어온다.
대수롭지 않게 넘긴 것도 잠시, 균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전 세계를 위협하는 대재앙으로 번진다.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이면서도 자신만이 인류를 구할 수 있다고 믿는 디거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직접 나선다.
영화 ‘디거’는 꼰대 괴짜 재벌 디거 록웰의 그린란드 빙하 시추 시설에서 발생한 작은 균열이 전 세계를 뒤흔들 역대급 대재앙이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버드맨’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등을 연출한 알레한드로 G. 이냐리투 감독의 신작으로, 톰 크루즈를 비롯해 산드라 휠러·존 굿맨·리즈 아메드 등이 출연했다.
하고 싶은 말도, 보여주고 싶은 것도 많은 영화다.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대담한 형식에 인간과 권력을 향해 겨누는 풍자도 선명하다. 익숙한 얼굴을 완전히 지워낸 톰 크루즈의 변신은 그 자체로 반갑다. 그럼에도 정작 ‘재미’를 놓쳤다는 사실이 ‘디거’의 가장 큰 아이러니다.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건 단연 톰 크루즈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와 ‘탑건: 매버릭’ 등을 통해 오랫동안 극한의 액션에 몸을 던져온 그는 이번에는 전혀 다른 방식의 도전으로 신선한 충격을 안긴다. 백발에 불룩 나온 배, 나이 든 얼굴 등 외적 변신은 물론 말투와 표정, 몸짓까지 바꾸며 안하무인 석유 재벌 디거로 살아 숨쉰다.
단순히 파격적인 비주얼에 기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넘치는 자신감과 허세, 자기 확신으로 똘똘 뭉친 디거의 우스꽝스러운 면모부터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이면서도 자신만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모순적인 면모까지 능수능란하게 그려낸다. ‘액션 스타’라는 강렬한 이미지에 잠시 잊고 있었던 ‘배우’ 톰 크루즈의 저력을 새삼 확인하게 한다.

형식적인 시도도 흥미롭다. ‘디거’는 한 남자가 일으킨 대재앙을 그대로 따라가는 데 그치지 않고 스크린 안에 또 다른 무대를 펼쳐놓으며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실제 사건처럼 받아들였던 이야기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만들고, 그 안에서 또다시 현실과 허구를 뒤섞는다. 특히 마지막까지 감춰둔 한 수를 꺼내는 순간에는 지금까지 지켜본 이야기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인간의 탐욕과 권력, 그리고 그에 따르는 책임을 중심에 놓고 재난 영화와 블랙코미디, 풍자를 한데 엮은 것도 대담하다. 다만 문제는 그 풍자가 좀처럼 웃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황당한 상황과 과장된 인물, 노골적인 대사까지 쉴 새 없이 밀어붙이지만 타율은 높지 않다.
묘한 찝찝함도 남는다. 막대한 부와 권력을 지닌 석유 재벌과 그를 둘러싼 권력자들을 우스꽝스럽게 그리며 인간의 탐욕과 오만을 신랄하게 꼬집지만, 정작 영화는 디거에게 가장 강렬한 존재감과 압도적인 에너지를 부여하고, 그가 속한 세계를 거대한 스케일과 화려한 이미지로 펼쳐낸다. 비판의 시선과 그 세계를 매혹적으로 그려내는 태도가 공존하면서 풍자의 날이 다소 무뎌지는 인상을 안긴다.
시작부터 끝까지 쉴 틈 없이 쏟아지는 대사도 피로감을 더한다. 인물들은 끊임없이 말을 주고받고 외치며 빠르게 다음 상황으로 내달리는데, 연극적인 화법과 리듬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그 밀도가 상당하다. 숨을 고르거나 상황을 곱씹을 여백마저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128분이라는 러닝타임이 길게만 느껴지는 이유다. 오는 3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