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가 끝나고 시작하는 하마구치의 마법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가 끝났을 땐 5점, 집에 가는 길엔 7점, 침대에 누워서 꼭꼭 씹어 먹자 10점이 되는 영화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 관람평을 남긴 한 관객의 감상이다. 포털사이트 네이버 영화에 남긴 이 실관람객의 평가는 현재 가장 많은 ‘공감’을 얻었다.
지난해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받고 지난 3월27일 개봉한 이 작품은 일본 ‘젊은 거장’으로 불리는 하마구치 감독이 이제껏 선보인 작품 중 ‘최고의 걸작’이라고 입소문을 타고 있다. 하마구치의 모국인 일본보다 한 달 먼저 국내에서 개봉했다.
첫날 4200여명의 관객을 모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개봉 2일 만에 1만 관객을 돌파했다. 3월31일까지 누적 관객은 1만9308명에 달한다. 오프닝 스코어는 하마구치의 전작인 ‘아사코'(2019년, 1493명) ‘드라이브 마이 카'(2021년, 2156명) ‘우연과 상상'(2022년, 1194명)를 넘어선 수치다.
일상과 비일상을 넘나드는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자신만의 영화세계를 구축한 하마구치는 1978년생이라는 나이로 동시대 최고의 각본가라는 평을 얻고 있다. 새로운 작품이 나올 때마다 전 세계 관객들에게 특별한 반응을 얻으면서 ‘젊은 거장’으로 일컬어진다.
이런 수식어는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로 매번 세계 유수의 영화제의 초청을 받고 있는 덕분이다.
실제 최근 3년간 칸 국제영화제와 아카데미 시상식(‘드라이브 마이 카’), 베를린 국제영화제(‘우연과 상상’) 베니스 국제영화제(‘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등 세계 최고의 영화제로 꼽히는 4곳에서 모두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 예측 불가, 충격적인 결말로 나아가
도쿄에서 약 3시간 떨어진, 자연과 가까이 살고 있는 타쿠미(오미카 히토시)와 그의 딸 하나(니시카와 료) 부녀는 땅에서 나는 풀을 뜯어 끼니를 만들고 산에서 흐르는 물을 길어 마시며 생계를 꾸리는 등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다.
코로나19의 위기가 끝나갈 무렵 글랭핑장을 건설하겠다며 도쿄의 한 연예 기획사에서 두 명의 직원 카하시(코사카 류지)와 마유즈미(시부타니 아야카)가 찾아온다. 주민 설명회에서 이들은 허점 가득한 설계도로 주민들과 충돌한다. 하지만 기획사 사장의 지시에 따라 두 직원은 주민들을 설득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마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심부름꾼인 타쿠미를 찾아간다.
이후 결말까지는 예측할 수 없는 전개가 펼쳐진다. 사슴에게 공격당한 것으로 보이는 하나와 그런 하나를 본 뒤 타카하시를 공격하는 타쿠미 등 다소 당혹스럽고 느닷없는 장면이 이어져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은 실관람객의 관람평처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다양한 은유와 상징들의 의미를 스스로 찾으면서 ‘꼭꼭’ 씹어 먹어야지 와닿는 작품이다. 자연의 선택과 결정은 인간이 세운 선과 악이나 어떤 정의의 산물이 아님을 뜻하는 작품의 메시지를 따라가면 충격적인 엔딩의 의미 또한 이해 가능하다.
하마구치는 이 작품에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에 대해 “이 제목을 보고 나면 관객들이 영화 속에서 자신만의 답을 찾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면서 “자연에는 선과 악, 그리고 정의가 없다. 악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이러한 통념에 카운터펀치를 날리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 퍼포먼스용 영상이 영화로 발전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음악감독이었던 이시바시 에이코가 하마구치에게 공연용 영상을 제작해달라고 의뢰한 것을 계기로 탄생했다.
“그동안 대사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을 강점으로 해왔기 때문에 (이번 작업이)새로운 도전이 되겠구나 싶은 마음”으로 제안을 수락한 하마구치이지만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달라는 지침이 없었기 때문에 이사바시의 음악 스튜디오 근처에서 자료를 조사했다.
그곳은 도쿄에서 차를 타고 2시간 정도 가야 나오는 곳으로 하마구치가 갔을 때 “영화에 등장하는 주민 설명회가 열리는 상황이었고, 지역민과 인터뷰를 통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하마구치는 “주민들 입장에서는 개인적인 생활 공간에 도시의 개발 논리가 들어오는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었는데, 그때 ‘이것이 영화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고 설명했다.
하마구치는 이번 영화를 통해 ‘눈앞의 이익 때문에 이후의 결과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전형적인 패턴’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음을 털어놨다.
“최근 10년 동안 일본에서 혹은 제 주변에서 장기적으로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생각하지 않고 엉성한 계획을 세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로 인해 환경도, 인간도 파괴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고 지혜를 얻지 않으면 이 일은 반복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