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내 상상속에서도 큰엄마는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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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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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때부터 설날보다 추석을 좋아했다. 피가 얇은 만두 속으로는 장난을 치기 힘들지만, 비교적 반죽이 도톰한 송편에는 속임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나는 추석마다 소를 아무것도 넣지 않은 반죽 뭉텅이 송편을 몇 개씩 만들어 찜통에 숨겨놓았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과연 누가 그걸 먹는지 관찰했다. 할머니가 걸릴 때도 있었고(불효자는 웁니다), 큰아빠나 작은엄마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내 간절한 소원대로 아빠나 엄마일 때가 더 많았다. 친척 어른들의 황당한 반응도 즐거웠지만 부모님을 골탕 먹이는 게 가장 재미있었다. 엄마 아빠가 아무 맛도 없는 송편을 우물거리며 “우리 딸이 제발 이런 짓 좀 관두고 성숙해지길 바란다”고 할 때마다 눈이 째지도록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공갈 송편의 추억도 과거로 사라졌다. 우리 집안에도 드디어 ‘명절 졸업’이 도래한 것이다. “어제 어른끼리 가족회의를 매우 길게 했어. 앞으로는 연휴에 각자 자유롭게 지내기로 협의했어. 그동안 큰엄마가 너무 고생 많으셨어. 완전 대한독립만세야.” 재작년 연말쯤 엄마가 가족 방에 올린 카톡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큰집에 들르지도 않고, 가봤자 누워 빈둥거리기만 했던 내게는 당연히 어떤 발언권도 없었다. 그러나 있다 한들 나 역시 명절을 없애자는 데 적극 찬성했을 것이다. 평범한 명절 풍경이 나이 들수록 기이하게 보여진 지 오래였으니까.
우리 집안은 대체적으로 화목하고 자유로운 편이지만, 그럼에도 명절이 되면 ‘엄마들’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큰엄마, 우리 엄마, 작은엄마가 부엌 속으로 사라져 그 안에서만 종종거리기 때문이다. 모두 큰집에 모이므로 주방 캡틴은 단연 큰엄마였다. 가족 모두가 큰엄마를 비롯한 여자 어른들의 고생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턴 그 고생이 특출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일 년에 고작 두 번이니까, 가족끼리 오랜만에 모여 얼굴을 보고 소식을 나누는 기쁨이 크니까, 다른 집안에 비하면 이 정도 규모는 약소하니까…. 그렇게 얼렁뚱땅 넘겨온 세월이 수십 년이었다. 부끄럽지만 나 역시 학창시절엔 명절을 ‘전을 왕창 먹는 날’ 정도로만 여겼을 뿐 그 많은 전을 부치기 위해 몇 시간 동안 기름 냄새를 뒤집어쓰는 수고에 대해 헤아려본 적 없었다. 온갖 양념으로 범벅된 몇백 개의 그릇이 결국 누구 몫으로 남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명절에 반기를 든 큰엄마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큰엄마의 미친 봉고〉

명절에 반기를 든 큰엄마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큰엄마의 미친 봉고〉

명절 노동에 대해 첫 의문을 가진 것은 자취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혼자 대형 마트에 갔을 때였다. 엄마가 끄는 카트에 매달려 참견이나 할 때는 장보기가 ‘가사 노동’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그러나 혼자 마트를 누비면서 생각보다 고되고 혼란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 햄도, 만두도, 두부도, 김도 수십 가지 브랜드와 용량으로 나뉘어 있어 무엇을 골라도 손해 보는 느낌이었다. 장을 보기 시작한 지 30분도 안 돼 스스로 먹고 살기 싫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살림이란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장바구니를 이고 지고 집에 온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도착 즉시 식재료를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해체된 포장재를 분리수거하고, 식재료를 자르고 익혀 음식을 만든 후 또다시 음식물 쓰레기를 치우거나 설거지를 해야 겨우 한 끼가 종결되는 것이다.

그날 힘들게 사온 재료로 누추한 저녁밥을 만들어 먹는 와중에 불쑥 큰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내 상상 속에서도 앞치마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큰엄마의 전지전능함이 의문스러워졌다. 내 입 하나 챙기기도 이렇게 힘든데…. 큰엄마는 명절마다 어떻게 수십 명의 음식을 만들 수 있었을까? 차례상도 차리니까 죽은 사람 입까지 챙기는 셈이다. 큰엄마도 처음부터 큰엄마로 태어난 건 아닐 텐데. 나는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절대 큰엄마는 되지 못할 것이다. 밥을 다 먹고 나니 큰엄마도 다음 생에는 누군가의 큰엄마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큰엄마는 내게 이런 농담을 자주 했다. “누가 너한테 맏며느릿감이라고 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라. 그건 절대 칭찬이 아니니까.”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기우였다. 내게는 맏며느리는커녕 일반 며느릿감이라고 말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당시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말의 속뜻이 뒤늦게 이해되면서 서글픈 감정이 밀려왔다.
지난 설날 큰엄마의 SNS 프로필 사진은 여행지에서 찍은 기념사진으로 바뀌었다. 연휴를 맞아 공기 좋은 곳으로 나들이를 간 모양이다. 평범한 그 차림이, 그동안 질리도록 봐온 앞치마보다 훨씬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정지음

싫은 것들을 사랑하려고 글을 쓴다. 다수의 에세이와 소설 〈언럭키 스타트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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