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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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모두 일하러 간 시간. 32세 민수연 씨는 물고기 밥을 준다. ‘물고기들은 말을 걸지 않고 제때 밥만 챙기면 되니’ 이를 ‘물멍’이 하는 일이라 표현하는 그는 ‘쉬었음’ 6개월 차. 실용음악과를 졸업한 후, 보컬 학원에서 3개월 무보수로 인턴생활을 했던 그는 인천에서 강남까지 출퇴근하며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곤 했다. 이후 신발 매장에서 매니저로도 일했지만, 다니는 직장마다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을 받았고, 상사의 폭언 또한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지금, 쉬고 있다. 여전히 구체적인 삶의 계획은 없다. 29세 임수현 씨는 명문대 석사과정 중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전공과 다른 분야의 회사에 입사했다. 그러나 부당한 대우와 고된 업무 환경 때문에 2년 만에 사직서를 냈다. 7주 차 쉬었음 청년인 그는 “나는 분명 정신 못 차리는 백수인데 매일 자꾸 웃음이 나온다”고 한다. 당신은 이들이 어때 보이나. 수연 씨와 수현 씨는 ‘낙오자’인가? 이들이 낙오자라면 수현 씨는 왜 매일 웃음이 나는 걸까?

이는 지난 6월에 공개된 다큐멘터리 〈추적 60분〉의 ‘쉬었음 청년 70만, 저는 낙오자인가요’ 편에 등장한 사연들이다. 공개되자마자 유튜브 250만 조회 수를 달성하는 초유의 기록을 세운 화제작. 그만큼 많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쉬었음 청년’은 일하지도 않고, 일을 구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일을 원하지 않는 상태의 청년을 일컫는다. 졸업 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청년도 포함되지만 약 78%는 직장 경험이 있는 자들이며, 직장에 들어갔다가 나오고 ‘쉬었음’ 상태에 들어간 경우가 그렇지 않은 청년들에 비해 3배 이상 많다. 즉 일할 능력은 되지만 일을 구하지 못하는 게 아닌, 구하지 않는 것에 가깝다.

이들이 정말 아무 이유 없이 쉬는 것 같나? ‘쉬었음’ 상태가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청년들 대부분이 어릴 때부터 다양한 스펙 경쟁에 자신을 ‘몰빵’하지만 경기 침체와 고용 불안, 코로나19 등 복합적인 이유로 고용 사정은 악화되고 투자한 만큼 성취를 얻지 못하는 상황에 ‘현타’가 온 것이다. 취업 문은 좁아졌는데 회사는 공백 없는 지원자만 원하기에 자포자기하기도. 혹자는 ‘대기업만 원해서 그런 것 아니냐’고 탓하지만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중소기업 취업자들을 실패자로 낙인 찍는 건 사회다. 대규모 공개 채용 대신 경력직 채용이 선호되는 흐름에서 청년들이 첫발을 내딛는 자체가 어려운 구조이며, 학력이 필요하지 않은 단순 노무직에 취업하거나 연봉을 감액하는 등 하향식 취업률은 이미 30%를 넘겼으니 ‘욕심’이라 탓할 순 없다. 어렵사리 이직이나 취업을 한다 해도 자존감이 깎인다. 임금 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차별 등 노동시장 구조 문제에 직면한다. ‘배가 불러 그렇다’는 ‘번아웃’에 대한 오해도 그들을 지치게 한다. 엄밀히 말하면, 실질적 일자리 개수의 부족보다 자조와 우울감이 청년층의 노동 의지를 점점 포기하게 만든다. 지속된 실패 경험으로 인한 무력감과 경제적 어려움은 번아웃을 위험수위에 도달하게 만들었다. 끊임없는 경쟁, 고물가에 대한 부담, 불안정한 미래에 대한 걱정까지, 녹록지 않은 현실은 ‘쉬었음’ 청년들을 점차 고립으로 내몰고, 장기화된 실패감과 우울감은 결국 우리 세상에 지속적으로 누적된다. 그야말로 디스토피아다.

세상은 앞다투어 이 ‘문제’를 연일 규탄하고 원인에 대한 분석 또한 끊임없이 지속하지만 그 과정에서 정작 중요한 논의는 누락됐다. 언젠가 ‘나’의 일이 될지도 모르는 무업 기간을 보내는 방식과 무업의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관한 문제. 우리는 ‘백수’를 너무 쉽게 히키코모리, 낙오자, 골칫거리, 늘어진 추리닝, 무능력자 등의 키워드로 정의해 버리는 건 아닐까? 굉장히 복잡다단한 층위로 켜켜이 파생된 요즘 청년 노동 문제에서 이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분류하는 건 시대착오적이고 납작한 태도인데 말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끊임없이 고민하고, 삶의 가치를 좇으려는 사람들이 어쩌면 맹목적으로 몸과 마음을 ‘업’에 바치며 달려가는 노동자보다 더 주체적 인간이자, 자신의 삶에 책임감이 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요즘 ‘과로’하는 백수도 많다. 자신의 가치를 모색하고, 건강을 챙기고, 조직 아닌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이 삶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준다고 믿으며. 실제로 백수이면서 누구보다 채워지는 사람들이다. 2019년 설립 이후 지금 가장 빛을 발하는 비영리 스타트업 ‘니트생활자’는 백수들이 운영하는 가상회사로 건물과 월급, 사업자는 없지만 무업 기간을 전환의 기간으로 보낼 수 있도록 ‘가짜 회사놀이’를 한다. 출퇴근하며 작은 성취감을 느끼고, 고립감을 떨쳐내기 위해 정기 후원을 받으며 ‘일 실험’을 하는 곳이다. 소속이 곧 정체성인 시대에서 게으른 사람, 무능한 사람으로 규정된 시선으로 더욱 사람 만나는 일이 두렵고 위축되는 이들은 ‘동료 백수’와 어울리며 무업 기간이 주는 우울감에서 벗어나 하나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으며 활력을 모색하는 것이다.

최근 극단 일이구프로덕션이 내놓은 연극 또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해롤드 핀터의 〈생일파티〉를 각색해, 주인공 스탠리가 작고 낡은 하숙집을 방문하며 일어나는 일을 그린 이 연극의 연출자 변은서는 ‘쉬었음’ 인구 70만 시대에 주목하며 “외부 압력에 의해 집으로 숨어 들어간 주인공 스탠리를 보고 현재 대한민국 20~30대 ‘쉬었음’ 인구가 연상됐다. 젊은이에게 취업하고 경제활동을 해야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이 사회에 쉰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구체적으로 목격하는 경험을 제공하고 싶었다. 개인의 자유를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니트생활자 대표 박은미도 “대부분 니트생활자가 결국 언젠가 다니게 될 회사에 잘 적응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회사에 소속되지 않아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재사회화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대체로 시키는 대로 사는 데 익숙하다. 초·중·고등학교를 나와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하고 결혼하고…. 일과도 똑같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나 직장에 가고, 정해진 공부와 업무를 정해진 시간만큼 한다. 백수가 되면 ‘오늘 하루 뭘 해야 하나?’가 가장 어렵고 힘든 고민이다. 나만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자괴감도 쌓인다. 니트생활자는 매일매일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연습을 할 수 있는 곳”이라고 전한 설립 의도도 무업 기간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쉬었음 청년’을 쉬게 내버려두자. 우울감에 빠진 백수든, 자신의 적성을 찾는 백수든, 여행 가고 싶은 백수든. 구직하지 않는다고 삶을 살아내지 않는 게 아니다. 청년 노동 문제는 분명 사회가 발 벗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지만 백수들은 일단 쉬고 싶다. 자신을 재단할 세상으로부터 숨느라고, 실체 없는 그림자에 쫓기느라고, 이리저리 자신을 탐색하느라 엄청 바쁘니까! 함께 나아가려면, 분명 백수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스스로 살아가는 힘을 기르는 과정으로 말이다.

‘과로’하는 백수도 많다. 자신의 가치를 모색하고, 건강을 챙기고, 조직 아닌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느라! 그 경험이 삶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준다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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