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는 자연의 대비에서 영감을 받아 브랜드의 새로운 디자인 철학을 ‘오퍼짓 유나이티드’(Opposites United)’라고 이름 지었다. 여기에는 숨은 뉘앙스가 있다. 펠릭스 페이지(Felix Page)가 기아차 디자인 센터장 카림 하비브를 만나 이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하나의 원칙에 너무 얽매이지 않는 디자인 철학을 개발하려 노력했습니다”
자동차 브랜드가 그들의 미래 디자인 전략에 이름을 붙일 때, 의미를 명확히 전달하기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울 수도 있다. 브랜드 내 모든 제품을 하나의 이름 아래 명확히 연결하기 위한 끝없는 고민 끝에 마케팅 부서는 모던 솔리드, 감각적인 스포티함 같은 모호한 용어를 만들어내곤 한다. 그리고 이제, ‘자연과 인류의 대비’에서 영감을 얻은 기아차의 비전인 ‘오퍼짓 유나이티드’(Opposites United)가 등장했다(데이팅 앱 이름으로 오해하진 말기를).
그 의미를 한번 찬찬히 살펴보자. 이 말은 지금 소비자와 평론가 모두로부터 호평을 받는 최신 기아차 모델들의 강렬함과 부드러움, 굽이친 곡선과 간결과 단면 같은 대조적인 개념을 간결하게 요약해 담아낸다. 스포티지와 쏘렌토, EV6와 EV9, EV5는 그 같은 철학을 아주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전 세계 자동차 시장 곳곳에서 기아차가 거둔 엄청난 성공의 상당 부분은 틀림없이 스타일리스트들의 자신감 있고 대담한 모험 덕분일 것이다.
스케치 패드의 콘셉트를 쇼룸의 양산차로 전환하는 중요한 과정을 이끌고 있는 인물은 자동차 디자이너 카림 하비브(Karim Habib)다. 그는 2019년 (인피니티를 거쳐) 기아차에 합류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BMW에서 일하며 여러 핵심 모델을 디자인해 명성을 쌓았다. 캐나다 출신인 그는 최근 3열 시트를 갖춘 신형 EV9 전기 SUV 발표 무대에 서기도 했다. 앞으로 수년간 기아차가 야심 찬 글로벌 제품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일 때마다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언제나 선두에 서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그가 하고 싶어 하는 한 가지가 있다. 최상위 트림 EV9의 영국 내 예상 판매가가 8만 파운드(약 1억3000만 원)에 이르는데도 불구하고 기아차의 디자인 전략을 단정 짓지 않는 이유는 자동차 업계 최고의 교란 요인이 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하비브는 “우리는 결코 프리미엄이나 럭셔리에 대해 얘기하려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그 단어를 너무 많이 쓰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진실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내가 그런 것보다 더 주목하는 건 ‘비전이 있는 특성’이에요. 바로 우리 제품에 담아내고 싶은 자질이기도 하죠. 적절한 단어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이 말에 담겨있는 의미에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퍼짓 유나이티드’ 개념은 각 모델뿐 아니라 기아차 라인업 전체에도 적용된다. 예를 들어 EV9는 기술적으로 연관성 있는 형제 모델 EV6과는 완전히 다른 디자인 접근을 따른다. 피칸토(한국명 모닝)와 프로시드, 스포티지와 스토닉, 쏘울과 쏘렌토 사이의 스타일링 관계는 브랜드 내의 각 모델이 마치 러시아 인형 마트로시카처럼 보이게 하지 않으려는 기아차의 열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으면서도 은근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하비브는 “제품 간에 어느 정도 일관성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각각 고유 요소를 가진 제품 포트폴리오를 달성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EV6과 EV9의 극명한 스타일링 차이를 두고 틀림없이 미래 모델에 대한 급격한 차별화 움직임이라고 성급히 단정지을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각각의 미래 모델이 이 둘만큼 다르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비브가 말했다. “그건 브랜드 측면에서 우리가 구축하려는 방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관성과 인지도를 갖춘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요.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매년 거의 300만 대의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시장을 위한 다양한 차종을 다양한 의미를 담아 만들기 때문에 그 차들 모두가 단 하나의 같은 틀에서 나올 수는 없죠.”
사실 EV9는 상대적으로 낮고 공격적인 디자인을 지닌 EV6보다 훨씬 더 눈에 잘 들어오는 SUV이지만, 근본적인 디자인 정신은 EV6이 확립한 특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비브는 “그 어떤 것도 포기한다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게 솔직한 마음이에요”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의 원칙에 너무 얽매이지 않는 디자인 철학을 개발하려 노력했습니다. 다른 모델에서도 반복될 몇 가지 원칙이 있을 수는 있지만, 실행과 사용 방법은 개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쯤에서 그에게 꼭 묻고 싶었던 질문을 해야겠다. 마침 당당한 EV9의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를 보니, 딱 적절한 타이밍인 듯하다.
“앞으로도 결국 SUV일까요?” 하비브는 겸손한 말투로 기분 좋게 답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미래에 뭘 할 건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이에 대한 철학적 논쟁이 있었을 것이다. 기아차 남양 디자인 스튜디오의 벽에도 이 논의의 흔적이 틀림없이 보였다. “SUV는 특히 MPV를 운전하는 사람들과 그 차 운전에 지친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일 수도 있어요.” 그는 더 단정적이고 호기심 있게 덧붙였다. “SUV 이후가 다가오고 있습니다.”최근 몇 달 동안 여러 브랜드가 전통적인 SUV의 시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암시했다. 여기서 말하는 전통적 SUV란 바짝 곧추선 형태나 일반적인 2박스형, 혹은 도로를 차지하고 자동차 마니아들의 조롱을 받곤 하는 차를 가리킨다. 이러한 모델에 대한 수요가 전례 없는 수준으로 급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기역학적 효율성과 지속 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고 따라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비브는 개방적인 접근 방식을 취한다. “우리는 다른 걸 시도할 겁니다”라고 말한다. “실내 공간 측면에서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머지않아 변속기 터널이나 엔진 베이가 사라지면, 실내 디자인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접근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가까운 미래의 자동차는 이론적으로 비슷한 실용성과 편안함을 제공하기 위해 굳이 지금과 같은 차체 크기나 형태를 가질 필요가 없다. “개인적으로 정말 멋진 밴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믿어요.”
그는 영국 시장에는 출시하지 않았지만 멋지고 매력적인 카니발이 전통적인 MPV와 경쟁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볼 때 하비브에게 이는 단순한 분할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명확한 기술적 진보의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만약 SUV가 기술적 진보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살아남지 못하겠죠. 반대로 만약 진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SUV를 만들어낸다면, 그 차는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눈에 보이는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더 깊은 질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그 차가 무엇을 상징하는가?”
랜드로버로부터 배운 것이 있을까?
기아차는 랜드로버에서 디자인 영감을 얻었을까?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EV9의 단순한 라인과 미니멀리즘 디자인 요소를 한번 살펴보자. 하비브는 “이런 종류의 정직한 박스 형태 SUV에는 아주 좋은 점이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지금의 디펜더를 보면, 오래된 것이든 새것이든 간에 여전히 꽤 멋진 면이 있잖아요.” 지프든 디펜더든 정통 SUV의 차체에는 프레스로 찍어낸 게 아니라 구부려 가공한 패널이 있어요. 그 진정성에는 분명 좋은 점도 있으니까 그런 점을 이용하고 싶었습니다. 기아차 고유의 4X4 형태가 고려대상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EV9의 깔끔한 실루엣은 고유의 캐릭터보다 공기역학적 효율성을 우선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다. “그 진정한 비율에 대한 집착도 그런 의지의 일부입니다” 하비브가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 나오는 전기 SUV가 모두 너무 매끈매끈해지는 추세라서 그렇게 하기 싫었기 때문이기도 해요. 어쨌든,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원하는 수준의 공기역학적 효율성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