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조립하고, 미국산 철강을 쓰니 이제 보조금 대상이 됐습니다. 테슬라와의 경쟁이 치열해질 겁니다.”
5일(현지 시간) 미 텍사스주 플레이노에 위치한 SK시그넷 준공식에서 신정호 SK시그넷 대표는 기자들에게 “미국 인프라법, 인플레이션감축법(IRA)으로 보조금 시장이 뜨겁다”며 이같이 말했다. SK시그넷은 전기차의 ‘주유기’인 전기차 충전기를 만들어 미국 초급속 충전시장 점유율 40%를 차지하고 있는 충전기 제조사다.
미국 전기차 시장은 조 바이든 행정부가 미국 중심의 공급망 확보를 위해 수십억 달러의 보조금을 쏟아부어 자동차, 배터리, 충전소 등 공급망 전반에 변화가 일어나는 중이다. 전기차 충전기도 마찬가지다. 바이든 행정부 초기인 2021년 시행된 인프라법에 따른 총 80억 달러(약 10조4600억 원)의 보조금을 받기 위해서다. SK시그넷도 미국에 공장을 짓고 7월부터 생산에 들어간다. 신 대표는 “미국 전기차 시장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어 한국과 미국 공장 가동으로 2025년에는 세계 초급속 시장 30%까지 점유율을 늘릴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 밖에선 처음으로 SK의 미국산 전기 충전기 공장이 생겼다.”
이날 열린 SK시그넷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존 먼스 텍사스 플레이노시 시장에 이어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를 대신해 참석한 크루즈 국장도 “텍사스를 선택해준 SK에 감사하다”며 적극적 지원을 약속했다. 공장 투자 규모는 1500만 달러(약 200억 원)로 대규모 투자는 아니지만 미국 전기차 인프라에서 미국산이 확산되는 것에 의미를 둔 것이다. SK시그넷은 전남 영광 공장에만 생산시설이 있었다.
유정준 SK 북미 대외협력 총괄 부회장은 “플레이노에서 높은 수준의 일자리를 창출하게 됐다”며 SK가 기존 투자 220억 달러(약 28조7000억 원)에 이어 향후 300억 달러(약 39조2000억 원)를 추가 투자해 총 520억 달러(약 68조 원)를 집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2021년 의회를 통과한 인프라법에 따라 올해 10월부터 미국에서 조립하고, 미국산 철강을 쓴 충전기를 설치한 충전사업자에 대해 보조금 지급에 나선다. SK시그넷과 같은 충전기 제조사들이 미국산 생산에 나서기 시작한 이유다. 특히 미국 노조가 만든 미국산 철강을 써 미국의 일자리 확산에 기여해야 한다. 실제로 SK시그넷 텍사스 공장 현장에는 충전기 본체 ‘캐비닛’에 ‘US 스틸’이란 공급처가 표기돼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 대표는 “미국산 철강으로 대체하는 과정이 까다로워 글로벌 제조사 중에서도 먼저 보조금 지원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충전기 시장의 압도적 경쟁사인 테슬라는 뉴욕주에, 호주 기업 트리티움은 지난해 테네시주에 미국 공장을 설립하는 등 글로벌 전기차 충전기 제조사들도 미국 내 생산을 강화하는 추세다. SK시그넷 관계자는 “중국이나 대만에 몰려 있던 충전기 제조사들이 보조금 때문에 미국을 주요 생산지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SK는 미국 공장 준공을 시작으로 세계 최대 전기차 충전기 시장으로 꼽히는 미국에서 테슬라와 경쟁을 본격화할 예정이다. 보조금에 있어 미국산 철강 사용 조건까지 충족시키는 제조사는 SK와 테슬라 정도다.
SK는 미국에서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전시회인 ‘CES 2023’에서 선보인 초급속 충전기 ‘V2’를 생산할 예정이다. V2는 단일포트에서 최대 400kW까지 출력이 가능하다. 실제로 현장에서 기아 EV6를 V2로 충전해보니 80% 충전까지 약 14분 49초 걸렸다. 200kW 이상 초급속 시장에서는 SK시그넷이 미 시장 점유율 40%로 1위지만 테슬라도 최근 초급속으로 바짝 업그레이드 중이다.
SK는 현대차·기아를 비롯해 포드, 포르셰 등 고성능 배터리를 탑재한 다양한 차량과 협업해 호환성을 높여 승부를 본다는 전략이다. SK시그넷의 신 대표는 “지난해 매출 1600억 원에서 올해 3200억 원, 이어 내후년에는 1조 원까지 확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