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 이웃을 뒀을 뿐인데…’민폐시위’에 망친 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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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 자택 앞 ‘민폐시위’에 인근 주민 ‘몸살’…주거지역 ‘평온권’ 보장해야

전삼노, 유럽 출장 떠난 이재용 회장 자택 앞 ‘200만 포인트’ 지급 요구 시위

현대트랜시스 노조, 정의선 회장 다택 앞 ‘영업이익 2배’ 성과급 요구 시위

현대트랜시스 노조 조합원들이 26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한남동 자택 인근 주택가에서 현수막과 피켓 등을 동원해 시위를 벌이고 있다. 독자 제공

기업인을 압박해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하기 위해 기업인 자택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민폐시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일반 주거지역인 기업인 자택 앞에서 소음을 발생시키거나 자극적 문구를 게시해 모욕을 주는 행위는 해당 기업인 뿐 아니라 사안과 무관한 인근 주민들에게까지 피해를 준다는 점에서 법적으로 규제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지난 8월 서울 한남동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자택 앞에서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연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전삼노는 올해 사측과의 교섭 난항으로 지난 5월부터 총파업을 벌였지만 전체 근로자의 30%에 못 미치는 조합원 수로 인해 생산차질 효과가 미미하자 이재용 회장 자택을 타깃으로 삼았다.

전삼노는 8월 1일 이 회장 자택 앞으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지만, 정작 이 회장은 당시 2024년 파리올림픽 참관과 비즈니스 미팅 등을 위한 유럽 출장 중이었다. 이 회장의 출국은 다수의 언론을 통해 공개된 사실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벌인 ‘빈 집 앞 시위’는 사회적 관심을 끌기 위해 애꿎은 인근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친 사례로 남았다.

이달 중순에는 충남 천안 원성동 주택재건축정비사업 일부 조합원들이 상경해 서울 삼성동 이해욱 DL이앤씨 회장 자택 앞에서 ‘상복 시위’를 벌였다.

공사비 인상 등으로 입주에 필요한 추가 분담금이 크게 오르자 사업자인 DL이앤씨와 국토부 등을 상대로 ‘뉴스테이 사업 선정 취소 및 일반분양 전환’을 요구하며 상복 차림으로 DL이앤씨 회장 자택 앞에서 ‘실력행사’에 나선 것이다.

서울 한남동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자택 인근 역시 무분별한 민폐 시위로 몸살을 앓고 있다. 현대차그룹 부품 계열사 현대트랜시스 노조는 과도한 성과급을 요구하며 파업을 강행하다 지난 26일 정 회장 자택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현대트랜시스 사측은 계속해서 노조를 상대로 교섭 재개를 설득하고 있지만 노조는 회사 경영상황을 무시한 채 연 매출액의 2%를 성과급으로 내놓을 것을 요구하며 일방적인 교섭 거부와 파업을 지속하고 있다. 현대트랜시스이 지난해 매출액 2%는 2340억원으로, 지난해 영업이익(1170억원)의 두 배에 달한다.

현대트랜시스 노조는 사측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기 위해 그룹사 회장인 정 회장 자택 앞으로 20여명의 조합원들이 찾아가 26일 오전부터 현수막과 피켓 등을 동원해 주택가에서 시위를 벌이면서 인근 주민들의 평온한 주말 휴식을 방해했다.

현대트랜시스 노조 조합원들이 26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한남동 자택 인근 주택가에서 현수막과 피켓 등을 동원해 시위를 벌이고 있다. 독자 제공

정 회장 자택 인근 주민들은 2년 전에도 은마아파트 재건축 추진위 등 일부 주민들이 벌인 시위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시위대는 국책사업인 GTX-C의 무리한 노선 변경을 요구하며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나 우선협상대상자인 현대건설을 제쳐두고, 협의 주체가 아닌 정 회장 자택 인근에서 민폐 시위를 벌였다.

법원은 같은 해 12월 한남동 주민 대표 등이 은마아파트 재건축 추진위 등에 제기한 시위금지 및 현수막 설치금지 가처분 신청을 대부분 인용하며 약 한 달간 이어진 막무가내 시위에 제동을 걸었다.

그밖에 7월 한화오션 노조의 서울 가회동 김승연 한화그룹 자택 앞 피켓 시위, 2022년 택배노조의 서울 장충동 이재현 CJ회장 자택 앞 시위, 2018년 HD현대중공 노조의 서울 평창동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자택 인근 시위 등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일반 시민들에게 불안과 불편을 끼친 사례는 수없이 많다.

법조계에서는 집회‧시위의 자유를 과도하게 보호하느라 주거지역 내 다수 시민들의 권리를 무시해선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거지역 내 시민들의 평온권과 학습권 보호를 위해서는 집회‧시위 요건을 더욱 강화하는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지난 8월부터 국민 의견 수렴을 거쳐 주거지역 등의 집회‧시위소음 기준치를 5 또는 10데시벨(dB)씩 하향 조정하는 집시법 시행령 개정안이 시행됐다. 이에 따라 해당 지역 최고소음 규제 기준치는 주간 80데시벨, 야간 70데시벨 및 심야 65데시벨 이하로 낮아졌다.

하지만 바뀐 기준 역시 주거지역에서는 과도한 소음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주거지역 주간 소금 규제 기준인 80데시벨은 지하철 소리와 맞먹는 소음으로 청력 손실을 유발할 수 있는 수준으로 알려졌다.

해외 사례와 비교하면 국내 집시법 개정이 ‘생색내기’에 그친다는 비판도 나온다. 독일은 주거지역 내 집회‧시위 소음이 주간 50데시벨, 야간 35데시벨을 초과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미국 뉴욕에서는 집회 신고를 했더라도 확성기를 사용하려면 별도의 소음 허가를 받아야 한다.

시위대의 혐오 표현에 대해 관대한 우리나라와 달리 유럽 주요국과 캐나다, 뉴질랜드 등에서는 집회‧시위 중 극단적 혐오 표현이 있을 경우 형사처벌도 가능하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정부가 지난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국민 71%가 집회‧시위 요건 및 제재 강화에 찬성했다”며 “주거지역 내 다수 시민의 권리를 충분히 보호할 수 있도록 글로벌 주요국 수준의 실효성 있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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