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게임 시상식인 ‘더 게임 어워드(The Game Award, 이하 TGA)’에선 ‘올해의 게임’ 외에도 다양한 부문의 시상이 이뤄집니다. 그 중 ‘올해의 콘텐츠 크리에이터(Content Creator of the Year)’는 당해 돋보이는 활동을 한 스트리머(개인방송 진행자) 또는 콘텐츠 제작자에게 주어지는 상인데요. 올해는 버추얼 스트리머 ‘아이언마우스’가 수상자로 선정됐죠.
아이언마우스의 TGA 올해의 콘텐츠 크리에이터 수상은 일본 밖에서도 버추얼 유튜버/스트리머 문화가 꽤 높은 인지도를 쌓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죠.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2023년 한해 국내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걸그룹/보이그룹 콘셉트의 버추얼 스트리머의 노래가 주요 음원 차트 최상위권에 이름을 올렸고, 만·십만 단위 채널 구독자에 방송 시청자 수는 이른바 ‘대기업’ 스트리머 못지 않은 이들도 등장했죠. 심지어 공공기관 소속 버추얼 유튜버가 데뷔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버추얼 유튜버/스트리머는 2023년의 주요 키워드 중 하나였습니다. 올해야말로 대 버추얼 유튜버/스트리머 시대가 열린 것일까요? 이에 대해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5년간 기 모아 열린,
대 버튜버 시대
국내 버추얼 유튜버/스트리머(이하 편의상 ‘버튜버’라 부르겠습니다)의 시초는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키즈나 아이를 필두로 한 일본 버튜버 문화의 유입과 VR 기술 혁신 등이 국내 버튜버 문화 태동에 주 요인이었죠. 기업에서 홍보 목적으로 버튜버를 데뷔시켰고, 일반 스트리머들도 VR챗을 이용해 버튜버로 다시 태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때 데뷔(또는 재데뷔)해 지금도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이들로는 ‘세아 Mk.2’와 ‘대월향’ 등이 있죠.
이후 일본 애니컬러 산하 버튜버 그룹 니지산지가 니지산지KR을 출범시켰지만, 국내 버튜버 문화는 답보 상태에 가까웠는데요. 일대 전환기는 2021년에 찾아왔습니다. 한국어 자막을 입힌 유튜브 클립영상/키리누키(팬이 생방송 주요 내용을 짧게 편집한 2차 창작 영상)를 통해 홀로라이브를 필두로 한 해외 버튜버들의 활동이 국내에 널리 퍼졌고, 덕분에 버튜버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가 크게 향상됐습니다.
이 해에 여러 신인들의 데뷔와 기존 스트리머의 버튜버 전향 등이 활발히 이뤄졌고, 무엇보다 국내 기반 버튜버 전문 그룹이 등장하기 시작했죠. 현재 국내 버튜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세계아이돌’이 바로 2021년에 처음 활동을 개시했습니다.
아이네, 징버거, 릴파, 주르르, 고세구, 비챤 등 6명의 버튜버로 구성된 이세계아이돌은 유명 스트리머 ‘우왁굳’이 기획한 오디션 프로그램 형태의 프로젝트를 통해 탄생했죠. 오디션 참가자 모집 당시엔 공지에 ‘망할 확률 99.8%’라는 내용이 명시돼 있을 만큼 흥미 위주 일회성 콘텐츠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0.2%로 예측됐던 성공이 현실이 됐죠. 멤버 개개인이 모두 두각을 드러내며 인기 개인 방송인으로서 입지를 다졌고, 2023년 세 번째 디지털 싱글 앨범
▲ 이세계아이돌 ‘KIDDING’ 공식 뮤직비디오 (영상 출처: 왁타버스 공식 유튜브 채널)
K-팝 보이그룹에 가깝지만, 스트리머로서의 정체성도 겸비한 PLAVE(플레이브)도 올해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MBC 사내 벤처로 시작해 분사한 블래스트 소속으로, 지난해부터 SNS와 유튜브, 트위치를 통한 생방송으로 활동을 시작했는데요. 올해 3월에는 첫 싱글 앨범
플레이브가 데뷔 이후 현재까지 선보인 네 장의 앨범은 음원 차트에서 맹위를 떨쳤으며, 지난 11월에는 KM차트 3rd 시즌 최고 신인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앞서 플레이브는 스트리머보다 K-팝 보이그룹의 정체성이 한층 강조된다고 언급했는데요. 이에 맞게 버츄얼 캐릭터의 모습도 일본 애니메이션보다 한국 웹툰에 가까워 일본 서브컬쳐 문화가 낯선 이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었던 점이 대중적 인지도 확보에 주 요인 중 하나로 해석되죠.
▲ MBC 음악중심 무대에 선 플레이브 (영상 출처: MBCkpop 유튜브 채널)
다음으로 스텔라이브는 단기간에 가장 폭발적인 성장을 일궈낸 버튜버 그룹입니다. 2021년 버튜버로 전향한 방송인 ‘강지’는 같은해 일본 시장 공략에 초점을 맞춘 유메퍼센트라는 버튜버 그룹을 만드는데, 약 1년 만에 해산됐죠. 스텔라이브는 이러한 유메퍼센트의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선 강지가 2023년에 설립한 버튜버 기업/그룹으로 유메퍼센트 출신 1기생 ‘미스틱’ 2명과 2기생 ‘유니버스’ 4인으로 구성되어 있죠.
스텔라이브는 앞서 언급한 두 그룹보다 일본 서브컬쳐의 영향이 짙은 편입니다. 일단 멤버 대부분이 독특한 설정을 보유하고 있는데요. 1기생 아이리 칸나는 하늘 용궁의 부흥을 위해 지구에 내려온 용족 황녀, 아야츠노 유니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유니콘이지요. 2기생도 시라유키 히나(아이돌 지망생, 인간)를 제외하곤, 고양이 사관학교 사관 후보생(네네코 마시로), 혼혈 뱀파이어(아카네 리제), 세계 제일의 보물사냥꾼(아라하시 타비) 등 범상치 않죠. 아울러 멤버 전원의 이름이 일본식이기도 하죠.
현재 1기생 두 명은 트위치 기준 구독자 수 20만 명 전후이며, 2기생들은 10만 명 고지를 눈 앞에 두고 있죠. 이 외에 각종 통계에서도 국내 버튜버 중 최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국내 최대 서브컬쳐 축제 ‘애니메이션 X 게임 페스티벌 2023(이하 AGF 2023)’에선 단독 부스를 내기도 했는데, 정말 많은 팬들이 몰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죠.
이 외에도 유튜브, 트위치, 그리고 아프리카TV에 이르는 다양한 플랫폼에서 국내 버튜버 그룹들의 성장과 탄생, 활발한 활동을 확인할 수 있었던 2023년이었는데요. 한편, 전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던 특이 케이스도 있었습니다. 바로 영어권 버튜버인 ‘샤이릴리(유럽 국적 거주지만 방송 언어가 영어)’ 클리퍼로 유명한 ‘허니츄러스’의 버튜버 데뷔입니다. 데뷔 이후 샤이릴리와 합방도 성사됐는데, 그야말로 ‘성공한 덕후’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은 많다
해외 버튜버 그룹/기업들은 2020년 전후로 한국 진출을 실행, 또는 고려했었는데요. 하지만 당시엔 시기상조였던듯 2020년 국내 진출한 니지산지KR이 일본 니지산지에 2022년 흡수되면서 국내 기반 버튜버 그룹/기업만 남게 됐습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한국어 자막 클립/키리누키를 통해 해외 버튜버 팬이 된 한국인들이 빠르게 늘어났죠. 또, 해외 버튜버 개개인의 K-팝을 비롯한 한국 문화 콘텐츠에 대한 호감 표현, 한국어에 대한 관심 등도 팬층 확산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외 버튜버 그룹/기업의 한국 내 콜라보 카페, 서브컬쳐 축제 게스트 출연 등은 꾸준히 이뤄졌습니다. 올해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홀로라이브JP 소속 두 명의 버튜버 ‘토코야미 토와’와 ‘우사다 페코라’의 3D 단독 콘서트 국내 라이브 뷰잉 이벤트가 각각 10월과 12월에 열리기도 했죠. 한국 팬들에게 한층 더 가까워지려는듯, 한국어를 배우려고 하고 심지어 유창하게 구사하는 일본, 영미권 버튜버들도 과거보다 많아 보입니다.
이러한 해외 버튜버 그룹/기업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한국 버튜버 팬덤이 기존에 비해 크게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이제 갓 자리를 잡은 국내 기반 소규모 버튜버 그룹에게는 이세계아이돌이나 스텔라이브, 그리고 이들보다도 더 큰 규모의 니지산지, 홀로라이브와도 경쟁해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진 셈이죠.
한국 버튜버 팬덤의 규모가 커졌다곤 하나 일본, 영미권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기존 일반 스트리머 및 서브컬쳐 시장의 한계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이기도 하죠. 서브컬쳐 팬덤 내에서도 버튜버에 대한 호불호가 크게 갈리기도 합니다. 이는 해외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긴 하나 국내 시장 규모가 협소한 만큼, 한층 더 치명적일 수 밖에 없죠.
한편, 일본의 경우 유튜브나 트위치 외에도 서브컬쳐 중심의 동영상/방송 플랫폼이 있는 만큼 활로 마련이 비교적 용이하다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국내에선 최근 트위치 국내 서비스 종료 발표로 인해 유튜브와 아프리카TV, 베타 테스트 중인 치지직 정도가 전부라 할 수 있죠. 또, 일본과 영미권 버튜버들이 그랬던 것처럼, 국내 버튜버들이 현지 언어 자막을 더한 팬메이드 클립/키리누키 등으로 해외에서의 인지도를 쌓아올리는 것도 가까운 시일 내에는 보기 어려울 광경이지요.
국내에서 버튜버가 태동하던 2018년에도 이미 ‘버튜버의 전성시대가 곧 온다!’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지금 되돌이켜 보면 터무니 없었던 이야기였는데요. 그간 기술 발전과 이용자들의 콘텐츠 소비 양태의 변화에 따라 버튜버 문화 자체가 단일 영상 중심에서 생방송 중심으로 바뀌었고, 버튜버 업계를 선도하는 이들의 면면도 전혀 달라졌죠. 한마디로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분야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국내 버튜버 시장에 대한 전망도 쉽게 예단할 수 없죠. 나아가 ‘대 버튜버 시대의 개막’이라 일컬어지는 2023년 현재도 훗날 어떻게 평가될지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건 5년이란 세월동안 차곡차곡 쌓여온 버튜버에 대한 관심과 인지도가 올해야말로 유의미한 성과를 내고 있음은 분명하죠. 그렇기에 앞으로 이 분야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질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