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고현정은 1991년, 전국적인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안명지 역으로 열연을 펼쳤다. 안명지 캐릭터는 주인공 장하림(박상원)이 북한에 공작원으로 갔을 때 만난 내부 스파이. 원래는 꽤나 명망있는 친일파의 딸이었는데, 인민재판 때 아버지를 비판해서 죽게 만들면서 살아남은 인물이다. 당시 21세였던 고현정은 깊이 있는 연기를 잘 해내 크게 호평을 받았다.
고현정과 박상원뿐만 아니라 채시라, 박상원 등 여러 배우들이 출연했던 ‘여명의 눈동자’는 일제 강점기 해방 이후의 혼란기를 거쳐 한국전쟁시기에까지 이르는 시대를 다룬 시대극으로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명작이다. 이런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가 최근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데. 바로 최근 공개된 ‘경성크리처’로 인해서다.
‘경성크리처’의 씨앗…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어떤 작품인가
“20대였던 저는 작가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드라마를 보고)놀라서 개인적으로 그 시대를 열어보기 시작했어요.”
‘경성크리처’를 기획하고 극본을 쓴 강은경 작가의 말이다.
드라마 작가로 데뷔하기 전 ‘시청자’였던 그를 깜짝 놀라게 한 작품은 다름 아닌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직후까지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세 명의 인물이 빚는 비극적인 운명과 엇갈린 사랑을 그린 작품으로 소재나 메시지는 물론 제작 규모에서도 한국 드라마 역사를 바꾼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글로벌 OTT 플랫폼 넷플릭스가 제작한 오리지널 시리즈 ‘경성크리처’와 1991년부터 이듬해까지 총 36부작으로 방송한 ‘여명의 눈동자’가 연결돼 주목받는 데는 두 작품 모두 일제강점기 반인륜적인 인체실험을 자행한 일본군 731부대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어서다. 게다가 강은경 작가가 직접 ‘여명의 눈동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면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 731부대 및 위안부, 4·3 사건 전면에 다룬 ‘여명의 눈동자’
‘여명의 눈동자’는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태평양 전쟁부터 광복, 이후 미군정을 넘어 한국전쟁 발발, 이어진 지리산 빨치산까지 격동의 역사를 온몸으로 관통한 세 명의 주인공 대치(최재성) 여옥(채시라) 하림(박상원)이 마주하는 처절한 운명을 그렸다. 이들을 통해 당시 우리가 겪는 비극의 역사를 쉼 없이 펼친다. 고 김종학 감독이 연출을 맡고 송지나 작가가 극본을 썼다.
드라마는 김성종 작가가 1975년 연재를 시작해 1981년 마무리한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이를 통대로 일제강점기 일본의 만행을 다루면서 당시만 해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일본군 위안부와 731부대, 제주 4·3 사건 등 우리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작품 곳곳에 녹여냈다. 민감하고 조심스러운 사실들을 극화한 시도는 물론 미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를 가장 대중 친화적인 장르인 드라마로 풀어내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제작 규모도 눈에 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규모인 제작비 72억원을 쏟아부어 중국과 필리핀 로케를 진행한 블록버스터 작품이다. 지금처럼 SNS와 유튜브, OTT 등 다양한 플랫폼이 존재하지 않았던 1991년~1992년은 지상파 채널의 영향력과 파급력이 절대적이었고, 이에 힘입어 신드롬에 버금가는 인기도 끌었다.
최재성과 채시라의 철조망 키스신, 부대에서 낙오된 최재성이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뱀을 산 채로 먹는 장면, 설원에서 총을 맞아 눈을 감는 채시라의 모습 등은 지금도 대중의 뇌리에 뚜렷하게 각인된 명장면이다.
‘여명의 눈동자’는 문제의 731부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시도로도 단연 돋보였다.
일제강점기 부유한 집안의 엘리트 대학생인 주인공 하림은 태평양 전쟁 막바지 일본군에 징집돼 731부대에 배치된다. 한국인과 중국인 전쟁 포로를 ‘마루타'(통나무)로 칭하면서 잔혹한 인체실험을 자행하는 반인륜적인 일본군의 범죄가 하림의 눈을 통해 시청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또한 드라마는 실제로 세균전을 통해 한번에 수십만명을 죽이는 대량살상을 계획한 일본군의 잔혹성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시청자를 큰 충격에 빠트렸다. 탄저균으로 세균전을 계획하는 일본군의 모습은 ‘경성크리처’에도 등장한다.
강은경 작가는 당시 ‘여명의 눈동자’를 통해 731부대의 잔혹성을 목격했고, 그때의 충격을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경성크리처’ 또한 광복 직전, 패색이 짙은 일본군이 더욱 악랄해진 시기를 배경으로 한 만큼 ‘여명의 눈동자’ 및 731부대의 설정은 작가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여명의 눈동자’를 만든 김종학 감독과의 강은경 작가는 특별한 인연을 맺은 사이이기도 하다. 강 작가의 데뷔작이 다름 아닌 김종학 감독이 연출한 SBS 드라마 ‘백야 3.98′(1998년). 이와 관련해 강 작가는 최근 인터뷰에서 “(‘경성크리처’는)그때 김종학 감독님에게 들었던 이야기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밝혔다
다만 ‘여명의 눈동자’가 731부대와 이들이 벌인 마루타 실험을 직접적으로 그렸다면 ‘경성크리처’는 옹성병원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일본군 가토 중좌(최영준)가 벌이는 불법 실험을 통해 괴물이 탄생하는 상황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만행이 곧 괴물’이라는 작가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 ‘여명의 눈동자’로 시작해 ‘모래시계’로 이어진 드라마 세계
‘여명의 눈동자’의 주인공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혼란스러운 시대에 결국 희생된다. 이루지 못한 사랑,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눈을 감은 주인공들의 안타까운 운명이 많은 시청자를 눈물 짓게 했다.
드라마가 남긴 깊은 여운은 또 다른 작품으로 이어졌다. 1995년 방송한 SBS 드라마 ‘모래시계’이다.
물론 ‘여명의 눈동자’와 ‘모래시계’는 시대 배경이나 설정, 장르가 다르지만 실제 일어난 주요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그 안에 놓인 주인공들이 겪는 이뤄질 수 없는 운명과 사랑을 다루는 방식은 비슷하다. ‘모래시계’ 역시 김종학 감독이 연출하고 송지나 작가가 극본을 썼다. 이들의 이름은 1990년대를 넘어 2000년대 중반까지 드라마 시장에서 강력한 ‘흥행 카드’로도 인정받았다.
‘여명의 눈동자’ 후반부에 등장했던 배우 고현정은 ‘모래시계’에서는 주연을 맡았다. 박상원은 이들 두 작품에서 모두 주연을 맡아 한국 드라마를 상징하는 투톱 대표작을 나란히 일궜다.
‘여명의 눈동자’는 현재 OTT 플랫폼 웨이브, 왓챠를 비롯해 시리즈온 등을 통해 다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