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포더빌리티의 역설: 잔잔한 통계와 들끓는 민심
FORTUNE Korea 조회수
통계는 문제가 없다. 완만한 물가 상승률을 기록 중이다. 그런데 서민들이 느끼는 ‘경제적 감당 가능성(어포더빌리티)’은 임계점에 도달했다. 미국 정치권을 휩쓰는 이슈다. 한국도 비슷한 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크다.
김다린 기자 quill@fortunerkoea.co.kr
![미국 정치권이 어포더빌리티 리스크에 휘말렸다.[사진=셔터스톡]](https://contents-cdn.viewus.co.kr/image/2026/01/CP-2024-0163/image-83bfd54f-aea3-44ff-9680-dcdb4d8bca68.png)
어포더빌리티(Affordability). 2025년에 이어 2026년에도 미국 정치권을 강타한 키워드다.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경제적 감당 가능성’ 정도로 풀어낼 수 있다. 물가가 지속적으로 오르는 인플레이션(Inflation)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이지만, 의외로 결이 다르다.
어포더빌리티는 “가격이 올랐느냐”가 아니라 “지금 내 소득으로 이걸 감당할 수 있느냐”를 묻는다. 인플레이션이 둔화되거나 통계상 안정됐는데도,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버겁다는 감각을 설명한다.
가령 미국의 물가 상승률은 한때 정점을 찍은 뒤 내려왔지만, 집값과 임대료, 보험료, 의료비, 보육비 같은 고정비는 여전히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월급이 조금 올라도 필수 지출이 먼저 가져가 버리니 남는 돈이 없다. 통계상 인플레이션은 진정됐지만, 생활은 전혀 가벼워지지 않는 이유다.
이 개념이 특히 미국 정치에서 폭발력을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치인들은 “물가는 잡혔다”고 말하지만 유권자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슈퍼마켓 계산대 앞, 집 계약서를 쓰는 순간,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길 때 체감하는 비용은 여전히 과거보다 훨씬 무겁다. 그래서 어포더빌리티는 현직 정치인에게 불리하게 작동한다. 지금보다 나아졌다는 설명이 잘 먹히지 않는다. 사람들의 기준점이 이미 높아진 비용에 고정돼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숫자는 식었는데 체감은 더 나빠졌다는 불만이 뭉친 단어다. 뉴욕 시장 선거에서 파란을 일으킨 조란 맘다니나 뉴저지 주지사로 선출된 미키 셰릴의 승리 비결도 바로 이 어포더빌리티였다. 이들은 경제학 교과서가 ‘금기’로 여기는 임대료 동결과 전기요금 동결을 전면에 내걸었는데, 이게 시민들의 표심을 자극했다.
시장 논리를 앞세운 경제학자들은 경악했지만, 유권자들은 열광했다. 왜일까. 정부가 발표하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아무리 안정세를 보여도, 서민들이 체감하는 ‘살림살이 무게’는 임계점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어포더빌리티 리스크가 커지면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근심도 커지고 있다. 여론조사 결과가 나올 때마다 지지율이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당이 말하는 어포더빌리티는 거짓”이라면서 “완벽한 사기극(CON JOB)”이라고 깎아내리기도 했다.
2026년 11월에 열릴 중간선거를 두고는 “어떻게 될지는 지켜봐야 한다”면서도 “우리는 이겨야 한다. 하지만 통계적으로 보면 이기기 매우 어렵다. 솔직히 말이 안 된다”고 토로했다. 어포더빌리티가 단순한 경제 지표를 넘어 미국인의 삶의 질과 정치적 향방을 결정짓는 분노의 기폭제가 되고 있는 셈이다.
인플레이션 이후의 위기, 어포더빌리티
미국의 상황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경제 역시 ‘통계와 체감’의 괴리라는 깊은 늪에 빠져 있다. 정부는 물가 상승률이 2%대로 내려앉았다며 ‘민생 안정’을 자평하지만, 시장통과 마트에서 만나는 민심은 흉흉하다.
![최근 한국의 물가상승률이 다시 2%대 중반으로 오르며 심상치 않은 흐름을 보이고 있다. [사진=뉴시스]](https://contents-cdn.viewus.co.kr/image/2026/01/CP-2024-0163/image-629dac37-d416-4bc4-b747-0a037c4751c0.png)
이유는 간단하다. 어포더빌리티는 단순히 물가가 몇 퍼센트 올랐느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처분 소득에서 주거비와 식비, 전기·가스 같은 에너지 비용, 대출 이자를 모두 빼고 났을 때 플러스, 마이너스가 나오느냐가 관건이다.
그런데 상황은 녹록지 않다. 최근 원·달러 환율이 1480원 선을 위협하면서 한국 경제의 어포더빌리티 전선에 비상이 걸렸다. 미국의 위기가 주로 ‘자산 가격과 서비스 물가 폭등’에서 기인한다면, 한국의 상황은 더 복합적이다. 미국과 같은 위기에 더해 ‘환율 상승→수입 물가 폭등→가처분 소득 감소’라는 독특한 구조적 압박을 받고 있다.
우선 식비와 에너지 비용에서 충격이 시작된다. 한국은 곡물, 사료, 원유, 천연가스 등 핵심 원자재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한다. 원·달러 환율이 오르면 수입 단가가 즉각 상승하고, 이는 일정 시차를 두고 식료품 가격과 외식비, 전기·가스 요금에 반영된다. 환율이 10% 오르면 소비자물가 상승률도 0.3%포인트가량 뛴다는 게 한은 자체 추산이다.
이미 상황은 심상치 않다. 2025년 11월 소비자 물가지수는 117.20(2020년=100)으로 1년 전보다 2.4% 올랐다. 10월(2.4%)과 상승폭이 같다. 물가상승률은 지난 6∼7월 2%대를 기록했다가 8월 1.7%로 내렸지만 9월 2.1%로 올라섰다. 11월까지 3개월째 2%대를 나타낸 것이다. 자주 구매하는 품목 위주로 구성돼 체감물가에 가까운 생활물가지수는 2.9% 상승했다. 2024년 7월(3.0%) 이후 1년 4개월 만에 가장 높은 상승폭이다.
문제는 이 비용들이 한 번 오르면 잘 내려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환율이 다시 안정돼도 가격은 고점에서 굳어지는 경우가 많다. 어포더빌리티 방정식에서 빠져나가는 고정 비용이 구조적으로 커진다.
이자 부담도 고환율과 무관하지 않다. 환율 상승은 통화 약세 신호로 해석돼 금리 인하 여력을 제한한다. 금리를 빨리 내리면 자본 유출과 환율 불안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가계는 높은 대출 금리를 더 오래 감내해야 한다. 주택담보대출과 전세자금대출 이자가 내려가지 않으면, 소득이 늘어도 방정식의 결과는 플러스로 돌아서기 어렵다.
주거비 부담 역시 환율과 연결돼 있다. 건설 자재, 설비, 에너지 비용이 오르면 신규 공급 비용이 상승하고, 이는 분양가와 임대료를 자극한다. 직접적인 환율 연동 항목은 아니지만, 고환율이 장기화될수록 주거비 하방 압력은 약해진다. 한국에서 어포더빌리티 위기가 특히 주거 영역에서 강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환율이 상승한다는 것은 1달러를 사기 위해 더 많은 원화를 지불해야 한다는 뜻이다. 의료기기, 의약품 원료, IT 장비, 서버, 콘텐츠 사용료 등 산업 전반에 깔린 달러 비용이 서비스 가격으로 전가되면서 일상 비용을 끌어올린다. 소비자는 이유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 “전반적으로 다 비싸졌다”는 감각을 갖게 된다.
이런 상황에선 통계상 인플레이션이 둔화돼도 지갑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팬데믹 이후 수년간 이어진 고삐 풀린 인플레이션 위에 누적된 수치이기 때문이다. 한은에 따르면 인플레이션이 본격화된 2021년 이후 2025년 5월까지 생활물가의 누적 상승률은 19.1%다. 소비자물가 누적 상승률(15.9%)보다 3.2%포인트 높다.

주요 기관들은 2026년 한국의 물가상승률을 1.9%~2.4% 사이로 내다보고 있다. 물가 안정 목표치인 2% 안팎에 도달한다는 긍정적인 전망이지만, 그간 누적된 가격 인상폭을 고려하면 서민들이 체감하는 ‘경제적 부담’은 여전히 묵직할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올해는 각 지자체장과 지역의회 의원, 교육감 등을 뽑는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 어포더빌리티 이슈를 해결하지 못하면 유권자들이 투표장으로 향할 의욕을 갖기 어려워진다.
정부가 “물가가 잡히고 있다”는 통계적 수사만 반복한다면 미국에서 그랬듯 민심은 어포더빌리티 해소를 약속하는 정치인에게로 쏠릴 게 뻔하다. 숫자 뒤에 숨은 민생을 직시하는 게 올해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권이 마주한 가장 시급한 과제다. 지금이라도 ‘한국형 어포더빌리티 로드맵’을 내놓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