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모 필수” 가장 위험한(?) 오스트리아 전시장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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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문화 지도가 새롭게 그려졌다. 주인공은 잘츠카머구트. 잘츠카머구트는 ‘소금 창고의 영지’라는 의미다. 잘츠카머구트는 올해 특별하다. 바트 이슐을 중심으로 23개 지방자치단체가 함께 ‘유럽 문화수도’ 타이틀을 받았다. ‘유럽 문화수도’는 유럽연합(EU)이 주관하는 ‘문화 올림픽’이라고 할 수 있다. 선정된 도시는 1년간 행사로 들썩인다. 300여 개 전시가 곳곳에서 열린다.

한때 ‘백금’이라 불렸던 소금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소금 광산 투어부터 소금을 활용한 전시까지, 소금의 변신은 무궁무진하다. 잘츠카머구트를 거닐다 보면 문화의 힘이 느껴진다. 도시는 활기차고, 주민들 얼굴엔 자부심이 가득하다. 세계 각국에서 온 방문객들과 예술로 소통하고 있었다.

연말 여행 계획에 잘츠카머구트를 추가하는 건 어떨까. 소금의 역사, 현대 예술 열기를 한 번에 만끽할 수 있다. 놓치기엔 아까운 문화의 향연이 기다린다.

Point 01.

바트 이슐, 소금과 물의 예술

평화로운 알프스 산자락 마을이 갑자기 문화 핫스폿으로 떠올랐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바트 이슐 전시 명소는 ‘주드하우스-소금과 물의 예술(Sudhaus-art with salt&water)’이다. 평범한 소금과 물이 비범한 예술로 승화했다. 조각, 설치, 영화, 사진, 사운드 작품들이 관람객의 오감을 자극한다.

왜 소금이냐고? 바트 이슐 이야기는 1563년 오스트리아 소금 채굴과 함께 시작한다. 이웃의 할슈타트가 세계 최고(最古) 소금 광산으로 유명세를 탈 때, 바트 이슐은 다른 길을 택했다. 광산 대신 트라운 강이라는 천혜의 운송로를 활용해 번영을 누렸다. 강은 귀한 소금을 수도 빈으로 실어 나르는 생명줄이었다.

주말마다 열리는 가이드 투어는 깊이를 더한다. 5유로(약 7390원)로 전문가 해설을 들을 수 있다니, 이보다 알찬 문화 체험이 있을까.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로 진행한다.

전시장인 ‘주드하우스’는 19세기 초 소금 산업 심장부였다. 1826년부터 1835년 사이 지어진 이곳은 소금 생산·가공 중심지였다. 내부에는 거대한 소금 정제 작업장이 자리했고, 이곳에서 생산된 소금은 오스트리아 전역으로 퍼졌다. 1965년, 산업 현대화로 주드하우스 역할은 끝났지만,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존됐다. 이제는 현대 예술의 옷을 입고 관람객을 맞이한다.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문을 열며, 목요일 저녁엔 20시까지 연장 운영한다.

전시회 백미는 일본 작가 모토이 야마모토의 작품이다. 소금 5t으로 9일간 완성한 대작이다. 인생의 무상함과 기억 상실, 회복 과정을 표현했다.

전시는 환경 문제에 대한 성찰도 제공한다. 빙하 소멸과 물 부족 같은 이슈를 예술로 풀어냈다. 과거 산업 시설이 현대 예술의 요람으로 변모한 모습은 그 자체로 뜻깊은 볼거리다.

Point 02.

트라운키르헨, 보트 타고 채석장 탐험하는 미술관

트라운키르헨에 도착하자마자 알프스의 상쾌한 공기가 느껴졌다. ‘작은 베니스’란 애칭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곤돌라 대신 알프스 바람이, 운하 대신 맑은 호수가 방문객을 반긴다.

빌라 카르바흐(Villa Karbach) 전시로 향하는 길, 짧은 보트 여행이 기다린다. 근처 채석장과 센 바람 때문에 헬멧과 안전 조끼는 필수. 장비를 착용하고 예술 감상이라니, 이색 경험이 아닐 수 없다.

1850년경 지어진 빌라 카르바흐는 과거 조지아-러시아 공주 은신처였다. 지금은 전시장으로 변신해 호기심을 자극한다. 빌라 안에서 월터 필라의 ‘카르바흐-호흐알’ 같은 작품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진짜 걸작은 빌라 밖. 트라운호 너머로 펼쳐지는 알프스 장관에 말문이 막힌다.

투어의 정점은 카르바흐 채석장이다. 자연 속에 숨어있는 예술 작품들을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보물찾기 하는 느낌이었다. 이곳을 가려면 튼튼한 신발은 필수다. 울퉁불퉁한 돌밭을 지나는 미니 하이킹을 포함한다. 안전을 위해 가이드가 동행하니 안심하고 따라가면 된다. 전체 관람 시간은 3시간 30분 정도다.

Point 03.

에벤제, 25개 붉은 드레스가 말하는 비극

축축한 돌벽과 물웅덩이가 과거의 아픔을 속삭이는 에벤제 강제수용소 터널. 음산한 공간에 세계적 아티스트 시오타 치하루의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Where are we now?)’ 전시가 깃들었다. 전쟁 포로들의 고통, 죽음, 해방의 역사를 간직한 곳에 예술의 숨결을 불어넣은 것.

설명을 들으며 이곳의 역사를 되새긴다. 무거운 마음으로 터널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어둠 속에서 붉은 빛이 춤춘다. 거대한 25개 드레스가 붉은 밧줄에 휘감겨 있다. 시오타 작품이다. 드레스는 빈 몸체를, 붉은 밧줄은 혈관을 상징한단다. 과거 희생자들을 떠올리게 하는 강렬한 이미지다. 시오타는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이 있어선 안 될 것 같은 곳’이라는 생각으로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의 예술은 슬픈 공간을 채우는 동시에 더욱 공허하게 만든다.

전시 공간을 거닐면 시오타의 말이 떠오른다. “옷은 우리의 두 번째 피부, 건물은 세 번째 피부”라고 했던 그의 철학이 스며든다. 붉은 케이블에 감긴 드레스들은 인간을 둘러싼 관계와 사회, 문화를 형상화한 듯하다. 역사의 무게와 예술의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역사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킨 전시는 27일까지 계속된다.

Point 04.

운터라흐 레더러마이어하우스, 고양이 12마리가 살던 집이 문화 중심지로

레더러마이어하우스(Lederermayerhaus)는 마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레더러마이어하우스는 변신의 귀재이기도 하다. ‘슈칭거귀틀'(작은 농장)에서 ‘홀러베거하우스 삼트 피쉬베할터'(물고기 저장고가 있는 홀러베거의 집)로, 마지막엔 ‘고양이 집’이라는 애교 넘치는 별명까지 얻었다. 마지막 주인이 고양이 12마리와 동거했다니, 고양이 천국이라 붙여진 애칭이다. 건물은 그 이후로 비어 있었고 현재는 아터제 시에서 소유하고 있다.

요제프 제도는 18세기 말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가 시행한 토지 조사와 세금 제도를 말한다. 이 시기 문서에 레더러마이어하우스가 기록됐다는 건 건물의 오랜 역사를 증명한다. 레더러마이어하우스는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다.

한때는 고양이들 안식처였지만, 이제는 문화 중심지로 변신 중이다. 280㎡ 규모에 130만 유로(약 19억 2,79만 원) 를 들여 복원 중인 이 건물, 곧 화려한 변신을 앞두고 있다.

1층은 마치 운터라흐를 축소해 놓은 듯하다. 지역 예술가들 솜씨를 뽐내는 수공예품부터 하이킹 마니아들을 위한 정보까지, 운터라흐의 모든 것이 여기 있다. 2층은 더욱 놀랍다. 문화 행사장, 결혼식장, 세미나실로 변신이 가능한 이 공간은 마치 마법의 방 같다.

‘기억의 박물관’이란 공간은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살아있는 설치미술’을 선보인다. 수백 년 세월 동안 쌓인 이야기들이 방문객 감성을 자극한다. 2018년 5월에 출범한 레더러마이어하우스 협회는 보물 같은 유산을 지키고 있다. 자금 조달부터 자원봉사 조직까지, 미래 세대를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오스트리아 일상사를 간직한 살아있는 기록 ‘레더러마이어하우스’. 현지인과 나눈 대화, 오래된 벽돌 사이로 스며든 시간의 향기. 이곳에서의 경험은 그 어떤 여행 사진보다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권효정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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