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스스로 한국 이름까지 지은 미국 노벨문학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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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 벅 여사가 경기 부천시 펄벅문화재단의 소사희망원에서 혼혈아들과 함께하고 있다. / 사진=부천문화원
1960년대 말 펄 벅이 소사희망원 원생들과 함께 경기 부천시 펄벅재단 사무실로 걸어가고 있다. / 펄벅기념관 제공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또 다른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미국 소설가 펄 벅(1892~1973)이 주목받고 있다. 펄 벅은 193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대표적인 작가로 한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시아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

펄 벅은 한국을 유난히 사랑했다. 유서에 “내가 가장 사랑한 나라는 미국이며 다음으로 사랑한 나라는 한국이다”라고 적을 정도였다.

펄 벅은 한국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인권운동가이자 소설가였다. 그의 한국 사랑은 단순한 애정 이상이었다. 그는 1960년대 초 한국을 방문해 전쟁의 상처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직접 돕고, 이들을 위해 한국펄벅재단을 설립하며 활발하게 복지활동을 펼쳤다. 특히 1965년에는 혼혈 아동들을 위해 펄벅재단 한국지부를 설립했고, 1967년 경기 부천시에 소사희망원을 세워 전쟁고아와 혼혈 아동 2000여 명을 돌봤다.

이 공로를 기리기 위해 부천시는 2006년 소사희망원 자리에 펄벅기념관을 세웠다. 이곳에선 펄 벅의 대표작인 ‘대지’와 ‘살아있는 갈대’를 비롯한 여러 작품과 관련된 서적들, 그리고 펄 벅의 일대기를 다룬 영상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또한 펄 벅이 사용했던 가방, 머리핀 등 다양한 개인 유품들도 전시돼 펄 벅의 삶과 업적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펄 벅이 아이들로부터 받은 산수화 족자도 전시돼 있다. 이 작품은 소사희망원 출신의 아이들이 펄 벅의 80세 생일을 기념해 선물한 것이다. 기념관은 그녀의 인간애와 문학적 성취를 기리는 중요한 장소로 그가 한국과 얼마나 깊은 인연을 맺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펄 벅의 대표작인 ‘대지’는 중국 농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으로 1931년 퓰리처상을, 1938년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의 문학적 업적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한국에 대한 그녀의 깊은 애정이다. 1962년 한국을 배경으로 쓴 소설 ‘살아있는 갈대’는 한국인을 고상한 민족으로 묘사하며,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한국을 세계에 알렸다. 이 작품은 ‘대지’ 이후 펄 벅의 또 다른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펄 벅은 한국의 독립운동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펄 벅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그의 저서 ‘일본 내막기’에 대한 서평과 추천서를 써주며 지지했다. 또한 여운형과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와의 인연으로 한국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맺었다. 유일한 박사가 운영하던 부천 소사공장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자 펄 벅은 그 부지를 매입해 혼혈 고아들을 위한 소사희망원을 설립했고, 자신의 생애 동안 여덟 차례나 방문해 아이들을 돌보며 헌신했다.

펄 벅의 한국에 대한 사랑은 단순한 문학적 영감 이상의 것이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한국은 보석 같은 나라”라고 언급했다. 그만큼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깊이 사랑했다. 한 번은 경북 경주시의 시골 마을에서 한 농부가 소달구지를 끌고 자신은 짐을 지고 걷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소가 고생했으니 자신이 짐을 나줘 지겠다는 농부의 말을 들은 펄 벅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며 찬탄했다.

또 다른 일화도 있다. 펄 벅이 겨울에 나무에 남겨진 감을 보고 왜 따지 않았냐고 묻자 “새들이 먹을 까치밥으로 남겨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펄 벅을 감동하게 만든 말이었다. 펄 벅은 이처럼 한국인의 자연과 함께하는 삶의 철학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정을 높이 평가했다.

펄 벅의 정치 발언에서도 한국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1960년대 초 백악관에서 존 F. 케네디 당시 대통령이 “미군 주둔 비용이 부담되니 일본이 한국을 다시 통제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자 펄 벅은 이를 강력히 반박하며 한국인이 일본의 지배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강조했다. 당시 발언은 펄 벅이 단순히 한국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한국인의 자주성과 존엄을 존중하는 인권운동가였음을 보여준다.

펄 벅은 미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그의 마음에 항상 한국이 특별한 자리를 차지했다. 스스로 ‘박진주’라는 한국어 이름을 짓고 “내가 가장 사랑한 나라는 미국이며 다음으로 사랑한 나라는 한국이다”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펄 벅은 문학인으로서도 존중받아야 하지만 한국과 인류애를 바탕으로 한 삶을 살았던 위대한 인권운동가로서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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