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향기가 무르익으면 산과 들에는 노란색 분홍색 보라색 붉은색 등 겨우내 보지 못했던 화려한 색상이 더해진다. 바람을 타고 어디선가 꽃내음이 불어오고 늘 거닐던 길가 옆에는 자그만 들꽃도 고개를 내민다. 따뜻한 공기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진다.
사진=SK텔레콤
최근 3040 사이에서 봄나들이 명소로 급부상 중인 곳이 있다. 바로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한국민속촌이다. SK텔레콤이 자사 빅데이터 분석 플랫폼 지오비전퍼즐을 기반으로 지난해 벚꽃 시즌 동안 서울과 수도권 관광명소 방문자 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한국민속촌은 30대에서는 3위, 40대에서는 2위를 차지했다.
과연 어떤 이유에서일까. 일각에서는 30대의 방문 키워드를 ‘가족’, 40대의 방문 키워드를 ‘집주변’으로 정의한다. 30대는 가족과 나들이를 떠나기 좋은 장소, 40대는 거주지와 가까운 장소를 선택한다는 의미다. 일면 일리가 있으나, 한국민속촌의 인기를 완전히 설명하기엔 부족해 보인다.
의문이 깊어지던 차에 때마침 한국민속촌 봄 시즌 축제 진행 소식을 접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답을 찾기 위해서는 직접 발로 뛰고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제일이다. 한국민속촌 인기의 비결을 알아내기 위해 여행플러스팀이 다녀왔다.
한국민속촌의 봄은 이제부터 시작
개장시간인 오전 10시에 맞춰 한국민속촌에 도착하니, 갓 문을 연 시점임에도 주차장은 각지에서 올라온 전세버스로 가득했다. 소풍 나온 유치원생, 중고등학생들 외에도 단체관광을 온 40~50대 손님들이 많았다. 한국민속촌 측에 따르면 평일 방문객의 많은 수가 이런 단체 관광객이라고 한다.
입구 주변에 핀 꽃에 먼저 눈길이 갔다. 방문 며칠 전 봄비라고는 믿기 힘든 세찬 빗줄기에 꽃들이 져버릴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활짝 피어있는 모습이었다. 정문으로 들어가 우선 ‘상가마을’을 둘러봤다. 사무동 관광안내소 유아휴게실 등의 건물 사이사이로 벚꽃이 만개해있었다. 점심시간 즈음 이곳에서 펼쳐지는 민속퍼레이드 ‘얼씨구절씨구야’를 보러 다시 찾았을 때는 많은 사람이 벚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꽃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이날 민속촌 곳곳에서는 벚꽃 말고도 목련 매화 개나리 진달래 등 여러 꽃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앞으로 더욱 많이 피어날 토종 야생화가 기대를 모은다. 올해는 봄이 워낙 일찍 찾아왔지만, 개화 시기가 다른 꽃들보다 늦는 야생화의 특성 덕에 4월 내내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어 오히려 좋은 상황이 된 것이다.
양반가에 넝쿨터널까지, 기분이 좋아지는 마법같은 공간
상가마을 안쪽 ‘내삼문’을 지나면 조선시대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한 민속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을 내 공연과 체험은 대부분 오전 11시부터 시작하기에 아직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잠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시설을 살폈다.
가장 먼저 발길을 향한 곳은 민속마을 전체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양반가’였다. 이곳은 수원 화성 안에 실존했던 99칸 규모의 대저택을 원형 그대로 옮겨 놓았다. 솟을대문 형태의 입구부터 범상치 않았는데, 본래 솟을대문은 조선시대 고위직 관료를 지낸 이들만이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이후부터는 사회적 직위보다도 경제력이 더 크게 작용했다. 과연 이 정도 규모의 집을 짓는 주인이라면 솟을대문을 택했을 법했다.
계단을 올라 문 앞에 서자 그림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넓은 마당과 행랑채 너머로 뒷산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병풍처럼 늘어선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매일 집에 들어갈 때마다 이런 광경이 펼쳐진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조선시대 왕을 제외한 민간인이 지을 수 있던 최대 크기인 99칸을 자랑하는 가옥답게, 행랑채. 사랑채, 바깥사랑, 정원과 내당, 사당, 외별당 등을 얼추 둘러보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렸다. 이곳은 각종 방송사의 사극 촬영지로도 사랑받는 공간이다. 구성과 규모, 재현까지 어느 하나 빠지지 않아 확실히 인기가 많을 만했다.
목교에서 바라본 풍경
양반가를 나와 앞쪽에 있는 목교로 향했다. 양옆으로 늘어선 색색의 등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좋아 보였다. 실제로 야간개장 시간에 평석교와 함께 가장 인기 있는 포토존 중 하나다.
목교를 건너면 울릉도 민가 공터가 있다. 강가 주변으로는 벚나무가 자라고 그 반대편 ‘막넝쿨길’에는 민속촌을 찾은 사람들의 소원이 적힌 장식품이 주렁주렁 걸려있었다. 가족의 행복과 건강을 비는 문구부터,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이 가득 묻어나는 소원까지 여러 사람이 남기고 간 마음 조각들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공간이었다.
행인들 발길 사로잡는 ‘○○거리’
발길 닿는 곳마다 아름다운 한국민속촌이지만 사람들이 특히 자주 멈춰서는 거리가 있다. 민속마을 초입에 있는 ‘공방거리’와 북부지방민가 옆 ‘염색천거리’다.
공방거리는 이름처럼 민속규방, 유기공방, 국악기공방, 짚신공방 등 각종 전통 생활용품을 제작·판매하는 공방이 모여 있는 거리다. 각 공방은 실제 수십 년간 해당 물건을 만들어온 장인들이 상주하고 있다. 손으로 지푸라기 하나하나를 엮으며 짚신이 만들어지는 모습이나 민속촌 유일의 가마에서 각종 철제 도구를 꺼내는 모습에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신기한 눈빛이었다.
각가지 색으로 물들인 천이 바람에 나부끼는 염색천거리는 인증샷을 남기고픈 사람들의 필수 방문 코스다. 실제로 형형색색의 천 아래에서 방문객들이 한복을 입고 포즈를 취하는 모습은 드라마나 광고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했다.
본격적인 봄 축제 시작! ‘웰컴투조선’
발길 가는 대로 훑어보기만 했을 뿐인데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본격적으로 이번 봄 시즌 체험을 위해 상설체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진=한국민속촌 제공
이번 한국민속촌 봄 시즌 축제의 이름은 ‘웰컴투조선’이다. 조선시대 부자들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체험, 이벤트와 한옥 카페 ‘약과방’ 등을 준비하고 있다. 축제를 100% 즐기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엽전이다. 상설체험장 앞 엽전환전소에서 1000원과 엽전 1냥을 교환할 수 있다. 이렇게 얻은 엽전은 민속마을 내 다양한 활동에 사용한다. 축제의 부제가 ‘유전유잼, 무전노잼’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곧장 환전한 엽전 10냥을 받아들고 상설체험장에 들어갔다. 체험장에선 엽전 노리개 만들기, 꼬마 갓 만들기, 자개 거울 만들기 등을 할 수 있다. 이중 가장 인기가 많다는 자개 거울 만들기를 해봤다.
직원들이 만든 견본(좌)과 기자의 손거울(우)
직원에게 5냥을 건네니 반짝거리는 스티커와 손거울, 코팅 용액을 내어줬다. 검은 손거울에 스티커를 붙여가며 마음대로 꾸미고 용액을 바른 뒤 5분 정도 기다리면 자개 공예품과 똑 닮은 나만의 손거울이 완성된다. 기자도 나름 열심히 꾸며보았지만, 직원들이 만들었다는 견본과 비교하니 한없이 초라했다.
환전소에서는 민속촌 곳곳에 설치한 도장을 찍을 수 있는 스탬프 투어지도 나눠준다. 총 6개의 도장을 모아 환전소로 돌아오면 소정의 상품을 준다. 이날 취재 중간중간 도장을 모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2개밖에 찍지 못했다.
‘사또생파’로 바뀐 무대 간판, 단상에는 관객들이 가져온 선물이 쌓여있다
공연 시작 전 무대를 차지한 ‘거지’
오후 1시에는 관아 앞 공연장에서 ‘사또의 생일잔치’ 공연이 열린다. 공연 시간이 다가오자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더니 어느새 공연장 좌석을 빼곡히 채웠다.
공연은 이름처럼 민속마을 주민들이 모여 사또의 생일잔치를 열며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 본인의 승진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에게 세금을 거둬들여 수탈을 일삼는 나쁜 사또에 대한 권선징악을 유쾌하게 풀어냈다. 뛰어난 연기력으로 소문난 한국민속촌 연기자들이 펼치는 열연이 인상적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 잠시 숨을 돌릴 겸 민향에 위치한 한옥카페 약과방을 찾았다. 조선시대 귀한 음식이었던 약과를 테마로 하는 곳으로 고즈넉한 한옥과 정원이 하나의 수묵화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약과는 최근 SNS를 중심으로 젊은 층 사이에서 핫한 디저트로 떠오르고 있다. 그 인기를 증명하듯 오후 2시를 갓 넘긴 시간이었지만 약과는 이미 매진된 상황이었다. 약과 맛을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맨드라미와 금잔화로 만든 꽃차의 향과 자리에서 보는 정원 풍경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찻잔을 비우고 다시 관아 쪽으로 걷다 보니 공연장 옆 공터에서 관람객 참여형 이벤트 ‘조선팔도유람’이 진행 중이었다. 우리나라 전통놀이인 승람도 놀이를 재해석한 이벤트로 조선의 지명이 들어간 놀이판을 먼저 돌아 출발점으로 돌아오면 이기는 게임이다. 어른과 아이들, 캐스트가 한데 모여 즐기는 모습에 지나가던 이들도 걸음을 멈추고 구경하는 재미에 빠졌다.
한국민속촌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야간개장 ‘달빛을 더하다’
지곡천의 낮(좌)과 밤(우)/사진=강유진 여행+ 기자, 한국민속촌
여행플러스팀이 한국민속촌을 찾은 4월 7일은 한국민속촌의 야간개장 ‘달빛을 더하다’가 시작하는 날이었다. 낮에 찾아간 목교와 평천교는 밤이면 꽃보다도 화려한 조명으로 민속촌의 어둠을 밝힌다.
좌측부터 야간공연 ‘연분’, 관아 야경, 포토존 ‘단청’/사진=한국민속촌 제공
이밖에도 오프닝에 퀄리티 높은 무용 공연을 더해 한층 새로워진 야간 공연 ‘2023 연분’, 빛이 그린 그림자로 인생샷을 남길 수 있는 △달빛 △단청 △연분 △가마 포토존 등 낮보다도 아름다운 민속촌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야간개장은 11월 12일까지 금~일요일 및 공휴일에 진행한다. 특히 4월은 한 달 동안 오후 4시 부터 할인한 가격에 입장할 수 있는 ‘애프터4(After4)’ 프로모션을 제공하는 만큼 한국민속촌을 방문하기 더없이 좋은 시기다.
한국민속촌은 1974년 99만㎡(30만평) 대지 위에 조성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 테마파크이자 사극 촬영의 메카다. 2010년대에 들어와서는 콘셉트에 충실한 열연을 선보이는 다양한 캐릭터와 관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이벤트 등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민속촌 내 여러 캐스트들
앞에서 언급한 빅데이터 분석 결과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다. 어린아이들에게 전통적인 삶의 방식도 알려주며 공연, 게임 같은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줄 수 있으니 가족과 찾기 좋다는 점은 분명하다. 거기에 서울 시내에서 1시간 정도면 갈 수 있고, 용인시 자체 인구도 100만명을 넘으니 거주지와 가깝다는 말도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다른 공원, 테마파크가 줄 수 없는 한국민속촌만의 매력이 분명 있다.
봄꽃이 아름다운 공원은 많지만, 전통 한옥과 그림처럼 어우러진 꽃놀이는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이다. 아이들을 즐겁게 해줄 공연과 놀이기구는 다른 테마파크에도 있지만, 아이들의 부모를 포함한 어른들까지 웃을 수 있는 이벤트는 많지 않다. 모든 테마파크의 직원들은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지만, 관객들까지 자신들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캐릭터들은 귀하다.
그 모든 것들이 합쳐진 이름이 한국민속촌이다.
한국민속촌의 봄 축제는 오는 6월 18일까지 이어진다.
축제의 부제는 ‘유전유잼, 무전노잼’이지만 이날 직접 경험한 바로는 ‘무전유잼’이었다.
돈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한국민속촌은 남녀노소가 웃을 수 있는 행복한 장소였다.
낮부터 밤까지, 다른 곳에서 할 수 없는 특별한 꽃놀이를 원한다면 이번 봄 용인시로 향해 보는 게 어떨까.
글=강유진 여행+ 기자
사진=정승아 여행+ PD, 강유진 여행+ 기자
영상=정승아 여행+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