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존자다 지존파 연쇄 살인 사형 김기환 김현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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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파 사건은 1990년대 한국 사회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던 대표적인 집단 살인 사건이었다. 부유층에 대한 증오를 바탕으로 돈 많은 사람을 죽이고 돈을 빼앗자는 왜곡된 논리로 시작된 범죄였고, 결국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오늘날까지도 한국 현대 범죄사에 가장 잔혹한 사건으로 남아 있다.

이 사건에는 놀랍게도 생존자가 있었다. 경찰은 그 생존자가 아니었다면 100명은 더 희생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살아남은 대가로 피해자는 극심한 트라우마 속에 살 수밖에 없었다.

강제로 공범처럼 행동해야 했고,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했던 끔찍한 경험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생존자는 살아남은 것이 행운이었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평생을 괴로움 속에서 살아야 했다.

지존파는 1993년 6월, 두목 김기환을 중심으로 결성됐다. 더러운 세상, 돈만 많은 놈들, 돈지랄하는 놈들 돈을 빼앗자는 행동 강령을 세운 일곱 명의 청년 집단이었다. 평균 나이는 21세 남짓이었고 대부분 막노동을 전전하던 생활이었다.

그들의 행동 강령은 살벌했다. 돈 많은 자를 증오한다, 10억을 모을 때까지 범행을 계속한다, 배신자는 끝까지 쫓아가 죽인다, 여자는 엄마도 믿지 마라..

막내 조직원이 첫 살인 후 죄책감에 도망갔다가 살해당한 것도 이런 규율 때문이었다.

범행 방식은 잔혹했다. 고급차를 타는 사람을 부유층으로 간주하고 무작위로 납치했다. 당시만 해도 그랜저는 부의 상징이었지만, 실제로는 중고차를 타던 평범한 악사와 아르바이트생이 표적이 되었다. 그들에게 3천만 원을 요구했지만 돈이 없다는 말에 범인들은 혼란스러워했다. 결국 잘못 잡은 사냥감이었던 셈이다. 악사는 죽고 아르바이트생이 살아남게 된다.

지존파의 아지트는 완전 살인 공장이었다. 콘크리트 아궁이에 시신을 태웠고, 냄새를 숨기기 위해 돼지고기를 구워 먹었다.

그 안에서 인간성은 사라졌고, 오직 증오와 살인만이 남았다.

두목 김기환은 교도소 복역 중에도 부하들에게 암호로 지시를 내리며 조직을 통제했다. 그는 악마적 성향을 가진 인물로, 출소하면 반드시 더 큰 범죄가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김현양이 생존자에게 도망가라고 했고, 그녀는 목숨을 걸고 도망쳐 서울 경찰서에 도움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경찰이 믿지 않았지만 결국 수사가 시작되어 전원 검거로 이어졌다.

검거된 시점은 1994년 추석 직전이었다. 지존파는 마지막 계획으로 백화점 우수고객 명단을 확보해, 하루 700만 원을 쓰는 고객을 범행 1호로 삼으려 했다. 생존자의 신고가 없었다면 더 끔찍한 연쇄살인이 벌어졌을 것이다.

체포 후에도 이들은 반성하지 않았다. 더 많은 사람을 못 죽여서 한이 맺혔다는 발언을 하며 끝까지 악의를 드러냈다.

결국 6명은 사형이 집행되었고, 미성년자였던 한 명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도 사건의 배경과 맞물려 있었다. 입시 비리, 부유층 자녀들의 특혜, 강남의 야타족 문화와 같은 양극화 현상이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던 시기였다. 지존파는 그런 사회적 불만을 왜곡된 방식으로 폭발시켰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죽인 피해자들은 부유층이 아니라 평범한 서민들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김기환은 선생님이 미술 준비물을 안 가져왔다고 때린 일, 가난 때문에 겪은 설움 등을 늘어놓으며 사회 탓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불우한 환경이라 해도 살인이 정당화될 수는 없었다.

지존파 사건은 한국 사회에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극단적 불평등과 분노가 범죄로 변질될 때 얼마나 참혹한 결과가 벌어지는지를 보여준 동시에, 인간성을 잃은 범죄는 어떤 이유로도 용서받을 수 없음을 각인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존자의 용기 있는 탈출과 증언 덕분에 더 큰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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