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에서 미키(로버트 패틴슨)가 그러잖아요. 여러 번 죽어도 죽을 때마다 무섭고 싫다고요. 제가 그래요. ‘미키17’이 저한테는 ‘봉팔’이, 여덟 번째 영화인데 개봉할 때마다 매번 무섭고 두렵고 걱정되고 그러면서도 신나고 마음이 복합적입니다.”
봉준호 감독이 신작을 위트 있게 소개하며 밝힌 소감이다. 오는 28일 개봉하는 ‘미키17’은 2020년 비영어권 영화로 처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작품상 등 4관왕을 차지한 ‘기생충'(2019) 이후 봉 감독이 6년 만에 선보이는 작품이다.
‘미키17’는 할리우드 자본(순제작비 1억1800만 달러·1700억원)으로 할리우드 배우들을 캐스팅해 만든 글로벌 프로젝트로 일찍부터 관심을 모았다. 개봉일이 예정보다 늦어지면서 영화에 대한 부정적 이슈가 생기기도 했는데, 편집권을 둘러싼 의혹이 대표적. 봉 감독은 “디렉터스 파이널컷(최종 편집)으로 계약했다”며 편집권에 관한 일각의 추측은 사실무근임을 밝혔다.
“‘설국열차’ 때 이후로 에이전시에서 계약서를 보내면 저는 그 페이지(디렉터스 파이널컷 관련)만 봅니다. 이번에도 디렉터스 파이널컷으로 계약을 했고요.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큰돈을 투자하는 입장에서 스튜디오가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것을 강요하거나 강압하지 않습니다. ‘미키17’의 개봉일이 늦어진 건 편집권에 관한 추측과 달리 배우조합 파업 때문이었어요. 할리우드의 많은 영화들이 6,7개월씩 개봉이 밀렸죠.”

●순수 SF보다는 ‘발냄새’ 나는 SF로
‘미키17’은 2006년 한강에 나타난 괴수와 사투를 벌이는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괴물’과, 2013년 달리는 열차 속 꼬리칸 사람들의 반란을 그린 ‘설국열차’, 2017년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슈퍼 돼지를 구하는 이야기를 그린 ‘옥자’에 이은 봉 감독의 네 번째 SF 영화이다.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미키7’에서 출발했다.
‘미키17’은 친구와 마카롱 가게를 차렸다가 쫄딱 망해 우주 개척단에 지원하는 청년 미키의 이야기를 그린다. 위험한 일에 투입돼 ‘휴먼 프린팅’이라는 복제 기술로 죽고 살기를 반복하던 중 두 명의 미키가 공존하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원작과 달라졌다. 제목의 17이라는 숫자에는 17번째 태어났다는(프린팅) 의미도 있지만 성인이 시작되는 나이라는 의미도 담겼다. 이 영화가 미키의 성장 이야기이기도 해서다. 또 영화는 작품의 배경을 멸망한 지구에서 근미래의 지구로 앞당기고, 미키의 직업도 역사학자에서 창업에 실패한 청년으로 바꿨다. 개척단의 리더이자 독재자로 그려진 케네스 마샬(마크 러팔로)의 아내 일파 마샬(토니 콜렛)은 원작에 없던 인물이다.
“청개구리 기질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SF 영화 네 편을 하면서 항상 SF 같지 않은 SF를 찍었어요. 이번에도 우주로 날아가고 ‘휴먼 프린터’라는 첨단 기술이 나오지만 그런 와중에도 ‘인간은 여전히 찌질하고, 한심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구나’라는 쪽에 저의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원작에서 많은 부분들을 바꾸게 된 것 같습니다.”
“영화 속의 미키는 훨씬 더 ‘찐따’ 같고, 불쌍한,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청년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미키를 연기한 패틴슨을 보면 착하고 손해를 많이 볼 것처럼 생겼잖아요.(웃음) 순수 SF의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보다는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 같은, 미키라는 친구의 입장이 돼 체험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끼리는 ‘발냄새 나는 SF 영화’라고 불렀어요. 홍보팀에서는 ‘발냄새보다는 인간 냄새로 해 달라’고 했지만, 주인공이 구멍 난 양말을 신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원했어요.”

●미키에게 투영된 청년의 우울한 현실
‘미키17’은 봉 감독의 영화 중에서도 희망적인 이야기를 그리는 작품이다. 그래서 좀 낯설다. 봉 감독은 장편 데뷔작인 ‘프란다스의 개'(2000)부터 ‘기생충'(2019)에 이르기까지 거의 비극적, 혹은 그에 가까운 결말로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미키17’은 앞선 작품들과 다른 길을 간다. 다만 그러한 결말에 이르기까지 과정은 순탄치 않다. 의외의 결말이라는 감상평에 “나는 그러면 안 되나”라는 대답이 웃음과 함께 돌아왔다.
“약간의 후회, 반성이 있었어요. 그동안 영화를 찍으면서 제가 만든 인물들에게 가혹했다는 생각이 들었죠.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미키가 불쌍하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하고. 또 제 아들과 비슷한 나이예요. 이런저런 가혹한 상황에서도 미키가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영화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미키에게 벼랑 끝에 몰린 요즘 청년의 모습을 투영해서 보게 된다. “미키가 아들과 비슷한 나이다” “미키가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봉 감독의 말에서 젊은 세대에 대한 기성 세대의 미안함도 읽혔다.
“이 영화는 젊은 세대와 부모 세대로 세대를 극단적으로 나눴어요. 젊은 세대로 미키, 나샤(나오미 애키), 티모(스티븐 연) 등이 있고, 거의 유일한 부모 세대로 마샬 부부가 나오는데 최악의 인간 유형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장렬하게 퇴장하는데 그게 영화가 말하는 바라고 생각해요. 마샬 부부를 보면서 ‘부모 세대가 훌륭하기가 이렇게 어렵구나’ ‘곱게 늙어야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좋은 부모 세대의 모습은 마마 크리퍼가 보여줍니다.”
마마 크리퍼는 얼음 행성의 원주민인 크리퍼들의 리더 같은 존재이다. 생김새가 꼭 공벌레를 닮았다. 봉 감독과 ‘괴물’ ‘옥자’를 작업한 장희철 크리처 디자이너가 크리퍼를 디자인했다. 크리퍼에 대해 봉 감독은 “크루아상 빵에서 출발했다”며 뜻밖의 재료로 재미를 안겼다.

●악역 건넸더니 마크 러팔로 “봉, 와이 미?”
‘미키17’에서 로버트 패틴슨과 함께 시선을 붙드는 배우는 단연 독재자 마샬을 연기한 마크 러팔로다. 마샬은 행성 개척단의 지도자로, 미키와 청년들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여긴다. 러팔로는 이 인물로 데뷔 이후 첫 악역에 도전했다.
“악당을 써놓고 러팔로가 딱 떠올랐는데 그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러팔로가 NGO(비정부기구)나 시민단체 운동을 열심히 하는 배우인데,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많이 당황했었나 봐요. 저랑 화상으로 미팅을 하는데 대뜸 ‘봉~ 와이 미?’라면서 정말 슬퍼했어요. 러팔로가 ‘스포트라이트’ ‘다크 워터스’에서처럼 정의로운 역할들을 주로 해서 주변에서는 ‘꼭 해야 한다’고 했대요. 본인은 계속 ‘와이’ ‘와이’ 했지만.”
러팔로가 어찌나 실감 나게 연기를 했는지, 영화를 본 이들은 그에게서 전·현직 정치인의 얼굴을 찾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연상된다는 반응이 다수다. 이 영화는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한 시점보다 훨씬 전인 2021년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2022년 촬영을 했는데도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에 이 같은 오해를 샀다. 게다가 각 국가에서 자국의 정치 상황을 대입시켜 영화를 해석하는 흥미로운 광경도 펼쳐지고 있다. 개봉 이후 국내 관객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각 나라마다 본인들이 겪고 있는 정치적 스트레스를 투사시켜서 영화를 보는 것 같아요. 다들 자기네 이야기라고 하더군요. 얼마 전 베를린(영화제)에서 만난 한 나이 든 이탈리아 기자분은 ‘마샬이 무솔리니를 모델로 한 거 아니냐’고 묻더군요. 마샬이라는 인물이 안 좋은 정치 리더의 공통된 모습을 많이 보여줬나 봅니다. 정치적으로 안 좋은 상황에서는 블랙코미디가 따라와요. 무섭고 짜증이 나지만 웃기는 상황도 생기죠. 그런 느낌들을 다 복합적으로 담아내고 싶었는데 러팔로가 역시나 명배우답게 잘해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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