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증 병상 빼서 중환자 준다?”…의료계 “전형적 탁상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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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뺑뺑이’ 사고가 최근 연이어 반복하면서 당정이 팔을 걷어붙였다. △응급의료상황실 설치 △경증 환자 이송 제한 △중증 응급환자 수용 의무화 △중증 환자에게 경증 환자의 병상 제공 △응급 수술 시행 시 추가 수당 지원 등이 새 대책의 골자다. 특히 경증 환자의 병상을 빼 중증 환자에게 배정하겠다는 건 기존보다 강도 높은 대책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를 제외한 상당수는 이미 앞서 발표된 ‘응급의료 기본계획’에서 나왔다. 정부가 네 차례에 걸친 응급의료 기본계획을 20년여년에 걸쳐 추진하고 있지만 똑같은 문제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대책의 실효성도 의심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번에 당정이 내놓은 대책에 대해 의료계는 “전체적인 방향에는 동의한다”면서도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 없이는 표면적인 대책에 불과할 것”이라고 보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대한응급의학회 이사장을 역임한 가천대 길병원 양혁준(응급의학과) 권역응급의료센터장은 “경증 환자도 비록 경증이긴 하지만 응급 환자임은 분명하다”며 “경증의 응급 환자까지도 응급실에서 1차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여건이 조성돼야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응급의학과 배톤 이어받을 의사 공백 여전

그러기 위해선 의료체계 전반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가장 급한 문제로 지목되는 게 ‘의사 공백’이다. 양 센터장은 “응급실에서 처치와 응급 시술 등 1차 진료를 마치면 관련 진료과 즉, 배후 진료과에 배턴을 터치해 환자의 수술 등 치료를 담당하게 하고, 새로운 응급환자를 받을 수 있다”며 “문제는 배턴을 터치 받을 전공의·전문의가 부족하거나 없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배후 진료과는 모두 ‘필수 의료’ 영역에 해당한다. 하지만 필수 의료의 인력 자체가 부족한 탓에 응급실에서의 1차 진료에서 그다음 단계로 이행되지 못한 채 병목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심장 수술을 받아야 하는 환자에게 응급실에서 응급처치를 시행한다 해도, 흉부외과 전문의나 전공의가 없으면 이 환자는 흉부 수술을 받을 수 없다. 흉부외과 수술을 어차피 해줄 수 없어 응급실에서 환자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구급차 재이송(응급실 뺑뺑이) 10건 가운데 3건(31.4%)은 해당 질환을 보는 의사 부족(전문의 부재)이 원인이었다.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은 “이미 운영되는 응급실도 의료진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설만 늘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다. 응급실의 배후 진료과에는 △흉부외과 △신경외과 △소아청소년과 △외과 등이 꼽힌다. 모두 필수 의료 영역이다. 양 센터장은 “전공의 특별법 시행 이후 24시간 근무하는 전공의가 사라진 데다, 수가는 낮고 의료사고 소송에 휘말리기 십상”이라며 “전공의들이 필수 의료를 기피하는 원인부터 정부가 해결하지 못하면 응급진료 문제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정부와 여당은 응급실·권역외상센터뿐 아니라 ‘배후 진료과’에도 특별수가 지급과 직접적인 예산 지원 등을 논의하고 있지만 의료계의 반응은 냉담하다. 지역 의료원은 4억원이 넘는 연봉에도 일할 의사를 구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제한적으로 할당될 의료 수당은 ‘당근책’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이에 필수 의료 분야 수가 정상화 등 육성책과 함께 당장 병원마다 갖춰진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광역 배후 진료’ 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최석근 경희대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응급 환자를 살리기 위해 지역별로 치료할 수 있는 의료진과 수술 여건이 확보된 곳을 알려주는 ‘스마트 맵’을 서둘러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코로나19 때 병상 간격 넓히느라 수용 인원 더 줄어

‘병상 수 부족’도 응급실 과밀화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코로나19의 영향 탓이 크다. 양 센터장은 “길병원의 경우 코로나19 범유행 시기에 병상 간격을 더 벌리기 위해 기존 병상의 10%가량을 빼놓은 상태”라며 “현재 코로나19가 종식돼가고 있다고 하지만 향후 어떤 감염병이 도래할 지 모르므로 기존처럼 병상을 다시 빼곡하게 세팅할 수는 없다. 추가 감염병 유행을 대비해 이 방역 체제로 갈 수밖에 없다”고 못 박았다. 양 센터장은 “응급실 환자에 대해 병원에서 수용을 거부하는 게 아니란, 수용 불가 상태가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전에 중증도를 파악해 적절한 병원을 연결하는 ‘컨트롤 타워’가 없다는 점도 과제로 남아있다. 과거 응급 상황의 신고를 받고 환자 분류, 병원 간 전원을 조정하던 ‘응급의료정보센터 1339’에 준하는 전문 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은 코로나19 등 감염병 신고와 질병 정보를 제공하는 번호지만, 2010년대 초반까지 1339는 일반인·119 구급대를 대상으로 한 병원 안내와 병원 간 전원 업무를 총괄하는 관제센터였다. 의사·간호사, 교육받은 전문 인력이 응급상황에 실시간으로 대응했다. 현재 정부가 설치를 논의하고 있는 병원 간 전원 중심의 ‘응급의료상황실’보다 확장된 개념이다.

조석주 부산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어느 병원에 가야 할지 모르는 일반 환자, 수용할 수 있는 병원을 찾아 헤매는 119구급대, 개인적인 친분 등의 한정된 정보로 전원을 의뢰하는 의사의 불편을 모두 해소할 수 있는 1339와 같은 ‘제3의 기관’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의사조차 환자가 경증인지 중증인지 한 눈에 판단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문진·시진·촉진과 혈액검사나 X선, CT, MRI와 같은 영상 검사를 진행해야 한다. 병원에 오기 전, 혹은 이미 수용한 환자의 중증도를 결정하는 것은 의료법 위반과도 직결된다. 책임이 따르는 ‘과소평가’보다 안전한 ‘과잉 진료’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하물며 의학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과 119구급대는 “일단 큰 병원으로 가자”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대형병원의 ‘응급실 과밀화’가 해소되지 않는 배경이다. 중증 환자에게 경증 환자의 병상을 제공하라는 정부·여당의 안이 ‘탁상행정’으로 비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응급의료체계 대책의 컨트롤 타워 부재에 대한 아쉬움의 목소리도 나온다. 양 센터장은 “응급의료 대책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저수가와 전공의 특별법 시행 등으로 인한 필수 의료 인력 부족에서 출발한다”며 “응급의료 대책을 복지부 응급의료과에서 맡고 있지만 필수 의료 영역은 응급의료과의 업무 영역에서 벗어나므로 의료계 전반을 통합적으로 다룰 수 있는 부서에서 응급의료 대책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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