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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smax, Copreneur①]  서성석 회장 “코스맥스는 부부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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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석 코스맥스비티아이 회장은 가정 같은 회사를 바랐다. 그래서 사람을 뽑고 관리하는 일을 각별히 여겼다. 또 이경수 회장의 ‘레드팀’을 자처했다. 서 회장은, 그림자만을 자처하는 보통의 배우자들과는 달랐다. 그에게 회사는 “부부의 작품”이었다.

[Cosmax, Copreneur①]  서성석 회장 “코스맥스는 부부의 작품”

[Cosmax, Copreneur②]  ‘레드팀’ 자처하지만…“세상이 내 이름 몰라도 괜찮아”

유부혁 편집국장 chris@fortunekorea.co.kr 문상덕 기자

이경수 코스맥스 회장은 1994년 첫 공장을 열었다. 창업 2년 만이었다. 그간 곡절이 있었다. 처음엔 “충청 남북을 다 헤매”면서 부지를 찾았다. 예산에 터를 잡았는데, 허가가 안 났다. 그새 고객사와 약속한 납기일은 다가오고 있었다. 이 회장은 경기 화성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도청에서 제약공단을 조성하고 있었다. 공단의 한 제약사 공장을 빌려 쓰기로 했는데, 이번엔 당국에서 “제약사가 아니어서 입주가 안 된다”며 가로막았다. 이 회장은 정부 부처와 도청, 지역 면사무소까지 들러 솟아날 구멍을 물었다. 결국 공단 입주사 전원(30여 곳)의 동의를 받아내 당국을 설득했다. 그제야 라인을 가동할 수 있었다. 3년 뒤인 1997년엔 이곳에 첫 자체 공장을 지었다.

“3년마다 공장 하나를 열겠다.”(이경수·코스맥스, 《같이 꿈을 꾸고 싶다》, 한국경제신문, 2025) 공장을 세우며 이 회장은 원칙 하나를 함께 세웠다. 그리고 30여 년간 그렇게 했다. 이제 코스맥스는 전 세계에서 25개 공장을 가동한다. 화성에만 4개 공장이 있다. 미국과 중국, 인도네시아, 태국에도 코스맥스 간판을 달았다. 회사는 매해 8000개의 신제품을 개발하고, 33억 유닛의 화장품을 만든다.


이경수 코스맥스 회장(왼쪽)과 서성석 코스맥스비티아이 회장. [사진=코스맥스]
이경수 코스맥스 회장(왼쪽)과 서성석 코스맥스비티아이 회장. [사진=코스맥스]

여기까진 제법 알려진 세계 1위 화장품 ODM(제조자개발생산) 회사 코스맥스의 이야기. 그런데 이야기에서 잘 안 드러났던 인물이 있다. 이경수 회장은 사실은 그 자신과 함께 이야기의 공동 주연이 있었노라고 말했다. 그의 배우자인 서성석 코스맥스비티아이(BTI) 회장이다. 첫 공장 부지를 찾아다닐 때, 서 회장이 운전대를 잡곤 했다. 2002년부턴 총무 일을 맡는 등기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이후 회사의 경영관리 부사장, 인사총괄 부회장, 경영총괄 대표이사 회장, CHRO 회장을 맡았다. 인사에 있어선 “인사 문제는 목숨 걸고 막는다”라고 할 만큼 이 회장과 격론을 펼치기도 했다. 

오랜 인사 경험은 공정 관리에도 역할을 했다. 특히 3년마다 새 공장을 세워 올렸던 코스맥스 입장에선 그랬다. 서 회장은 라인에 병목이 생기면 곧장 현장으로 달려갔다고 말했다.

“예전엔 자동화가 덜 되어 사람의 손이 곧 생산성이었어요. 속도를 내는 선두 공정, 이어지는 보조 공정의 리듬이 하나라도 어긋나면 전체가 흔들립니다.”

현장에 서면 작업자들의 자세부터 달라진다고 했다. “서 있으면 직원들이 긴장하죠. 그런데 그 긴장이 라인을 바로 세워요. 막히지 않고 ‘빨리, 고르게’ 흐르게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다 보니 붙은 별명은 ‘라인의 천사’. 막힌 곳을 즉시 풀어주는 해결사라는 뜻이다.

서 회장의 힘은 다정함이었다. 그는 지금도 청소·세척실에서 일하는 전직 라인 여사원들을 종종 만난다고 했다. “문 열고 들어가면 ‘회장님—’ 하고 울며 안기기도 해요. 얼굴만 보면 남편과 싸웠는지까지 알 정도였죠.” 이경수 회장도 서 회장의 그런 면을 높게 평가했다. 그는 “지금도 (서 회장이) 공장을 찾으면 회사를 오래 다닌 사원을 서 회장을 꼭 껴안더라”며 “큰언니, 혹은 엄마 같은 자상함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국내 여성 리더 가운데 서 회장의 위상은 독특하다. 그처럼 ‘회장’ 혹은 ‘부회장’ 직을 단 여성 기업인이 없지 않다. (※매출액 기준 국내 1000대 기업 중 32명. 포춘코리아 집계) 하지만 그중 이사회에 참여하는 등기이사는 절반에 그친다. 또 경영에 실제 참여하는 사람은 더욱 적다. 시중에는 그래서 ‘승계 징검다리’라는 노골적 표현을 쓰기도 한다. 남성 창업자가 배우자에게 1차로 지분을 넘겨 절세하거나, 자녀가 경험을 쌓기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경수 회장은 서 회장이 “전문 경영인 이상의 역할을 해 줬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싫은 소리를 해야 할 때가 있어요. 보통 전문 경영인 역할이죠. 그런데 (서 회장은) 앞에 나서는 일은 내게 맡기고, 본인은 궂은 일을 도맡아 했어요. 제겐 배우자이면서 파트너였습니다.”

서성석 회장은 코스맥스의 빠른 성장에 힘입어 비즈니스 규모와 건강성, 경력 궤적, 혁신성에서 고르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이경수 회장의 “그림자”를 자처한 결정처럼, 회사 밖에서의 영향력을 평가한 ‘조직 외 영향력’ 항목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점수(20점 만점에 13점)를 받았다. 하지만 회사의 인사 원칙을 세우고, 이경수 회장과 함께 주요 의사결정의 속도와 품질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 데서 심사위원들은 의견을 함께 했다.
서성석 회장은 코스맥스의 빠른 성장에 힘입어 비즈니스 규모와 건강성, 경력 궤적, 혁신성에서 고르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이경수 회장의 “그림자”를 자처한 결정처럼, 회사 밖에서의 영향력을 평가한 ‘조직 외 영향력’ 항목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점수(20점 만점에 13점)를 받았다. 하지만 회사의 인사 원칙을 세우고, 이경수 회장과 함께 주요 의사결정의 속도와 품질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 데서 심사위원들은 의견을 함께 했다.

이렇게 부부가 함께 경영하는 형태를 학계에선 ‘코프리너십(Copreneurship)’이라고 부른다. 연구들을 보면, 코프리너십 기업은 일반 기업보다 성과가 좋다(El Shoubaki et al., 2021). ‘대리인 문제’를 겪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서로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다. 또 의사결정의 속도가 빠르고, 품질이 높다. 의견이 달라도 빠르게 조율하고, 사무실 밖에서도 대화할 수 있다.

물론 장점만 있진 않다. 이사회, 임원회의 같은 공식 절차는 무의미해질 수 있다. 또 직원들은 두 사람의 말 중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혼란스러워할 수 있다. 배우자의 불만도 리스크다. 창업자가 배우자와 지분을 나누고 공식 지위와 권한을 주는 데 인색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코프리너십 기업은 경영은 물론, 부부 관계의 파경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Hirigoyen, 2017).

이런 우려는 서성석 회장에게도 화두인 듯했다. 서 회장은 코스맥스를 두고 “부부의 작품이자 공동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그림자”에 빗댔다. 

“남편은 바깥에서 회사를 이끌었고, 나는 안에서 다듬고 채웠어요. 둘 다 없었으면 안 됐죠. 둘 중 하나라도 무너졌다면 코스맥스는 못 버텼을 거예요.”

서성석 회장이 지난 33년을 처음으로 말했다. 그의 ‘코프리너’, 이경수 회장과 함께.

회사, 살림

[서성석 코스맥스비티아이 회장] 숙명여대 교육학과 졸업. 총무이사를 시작으로 경영관리 부사장, 인사총괄 부회장, 경영총괄 대표이사 회장직을 맡았다. 현재 그룹 HR 부문을 총괄하고 있다. 그룹 지주사 코스맥스비티아이의 최대주주(21.62%)다.
[서성석 코스맥스비티아이 회장] 숙명여대 교육학과 졸업. 총무이사를 시작으로 경영관리 부사장, 인사총괄 부회장, 경영총괄 대표이사 회장직을 맡았다. 현재 그룹 HR 부문을 총괄하고 있다. 그룹 지주사 코스맥스비티아이의 최대주주(21.62%)다.

시간을 돌려 1992년. 당시 대웅제약 임원이었던 이경수 회장은 만 45세 나이에 코스맥스(당시 ‘한국미로토’)를 창업하기로 결심했다. 연년생인 두 아들(병만·병주)은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집안 살림을 맡고 있던 서성석 회장은 이 회장의 결심을 듣고는 곧바로 다음 스텝을 물었다고 했다. 이 회장은 서 회장이 “반대하는 말을 한마디도 안 했다”며 지금도 당시를 생각하면 “참 신통했다”고 돌이켰다.

그리고 서 회장은 경영 일선에 참여했다. 두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유연 근무를, 대학교에 가고 나선 풀타임 근무를 했다. 

모든 기업의 처음은 위태롭다. 부부창업 기업은 더욱 그렇다. 두 사람의 온도가 같긴 어렵기 때문이다. 실상 많은 배우자가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의 뜻에 따른다. 부부 창업가 15쌍을 인터뷰한 한 연구에 따르면, 이 중 13쌍에서 “창업을 먼저 제안·주도한 ‘리더’와 그 제안을 수용·동행한 ‘팔로워’의 구도가 반복적으로 나타났다.”(Villeger, 2023) ‘팔로워’인 배우자는 “내키지 않았다, 다른 길을 원했다”는 표현을 공통적으로 썼다. 이들은 대부분 경력이나 소득, 혹은 기존 동료나 지역 공동체와의 단절을 경험해야 했다. 해당 연구는 이런 초기 구도가 “이후 기업 거버넌스(권한 배분, 역할, 만족도 등)에 장기적인 영향을 줬다”며 결별로 끝난 사례도 있었다고 보고했다.

“결혼이 40년, 회사가 30년. 결국 같은 이야기예요.”

서 회장은 회사를 가정의 연장으로 봤다. 그렇게 해서 살림처럼, 회사일도 치열하게 할 수 있었다. 그는 “처음 7~8년은 급여를 못 받았다”며 “보증·담보 찍으며 회사에 모든 걸 걸던 시절이었다”고 돌이켰다.

이 회장은 고객 미팅과 골프 접대, 서 회장은 생산라인과 회계, 총무까지 책임졌다. 서 회장은 “밤 11시, 12시까지 차 안에서 기다릴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당시엔 그게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지금 같으면 ‘이제 그만 갑시다’라고 했겠지만, 그땐 그럴 수 없었어요.” 점심시간도 없이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4시 반에 퇴근했지만, 퇴근길조차 긴장의 연속이었다. “길에서 사고 날 뻔한 게 여러 번이었어요. 그래도 다시 차를 몰고 다음 날 현장에 갔죠.”

임직원 수가 1000명 밑이었던 시절까지도 직접 김장을 담갔다. “처음엔 2천 포기부터 시작했어요. 비용은 사 먹는 것보다 많이 들었죠. 그래도 절인 배추에 양념 얹어 ‘아—’ 하고 먹여주는 그 맛, 그 정성이 중요했어요.” 한땐 밭을 통째로 사 김장에 필요한 채소를 직접 마련했다. 공장장 출신 외부인이 “이런 걸 왜 하냐”고 말해 중단했지만, 서 회장은 그 시절을 ‘가정 같은 회사’의 상징으로 기억한다. 김장철이면 인근 공단의 공장장들에게 보쌈을 곁들여 한 접시씩 나눴다고 했다.

코스맥스의 정수 시스템. 화장품 원재료인 정제수를 만든다. [사진=코스맥스]
코스맥스의 정수 시스템. 화장품 원재료인 정제수를 만든다. [사진=코스맥스]

전문 지식만 있는 사람보다, 상식과 기준이 제대로 잡힌 사람이 결정할 때 실패 확률이 더 낮습니다 _이경수 코스맥스 회장

지금은 화성 공장만 해도 임직원이 800~1000명, 협력업체를 더하면 2000명 수준이다.

회사가 클수록 경영, 기술 등 각 부문에 전문성이 필요해지기 마련. 서 회장은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하지만 이경수 회장이 생각하는 ‘좋은 경영인’의 덕목은 사뭇 다르다. 이 회장은 “전문가의 영역이 분명히 있다”면서도 “전문 지식만 있는 사람보다 상식과 기준을 제대로 잡고 있는 사람이 결정을 내릴 때 실패 확률이 더 낮다”고 봤다. 

이렇게 해서 코스맥스의 시작은 단단할 수 있었다. 서 회장은 지금도 창업할 당시의 자신을 떠올리곤 한다. 아니면 그보다 더 이전을.

“전 아직도 스물여섯이에요. 그때에 멈춰 있어.”(서성석 회장)

서 회장은 “그때 결혼했는데, 이상하게 시간이 안 흐른다”고 말했다. 한바탕 터지는 웃음 속에 늙지 않은 설렘이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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