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는 한 발 더 나아갔다. 2021년부터 일부 가전제품에 대해 ‘수리 가능성 지수’를 표시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제품의 수리 용이성을 1~10점으로 계량화해 소비자가 쉽게 비교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등급이 높을수록 붉은색에서 녹색으로 색상이 전환된다. 이와 함께 고의적인 제품 수명 단축을 금지하는 ‘계획적 진부화 금지법’도 시행되고 있다. 위반 시 해당 기업은 연 매출의 최대 5%에 달하는 벌금을 부과받는다.
미국에서는 2018년 17개 주에서 처음으로 수리권 관련 입법 논의가 시작됐다. 이후 2021년, 제조사의 A/S 독점 문제와 관련해 바이든 정부는 소비자의 자가 수리 권리를 명시한 행정명령을 발표했고 연방거래위원회(FTC)는 이를 독과점 행위로 규정하며 본격적인 규제에 착수했다. 2025년 현재, 미국 50개 전 주에서 한 번 이상 수리권 법안이 발의된 상태이며 이 중 24개 주에서는 법안이 실제로 심의 중이다. 미국의 경우 환경보다는 소비자 권익 보호 측면에서 이 제도를 발전시켜 왔다.
이러한 흐름과 비교할 때 국내의 제도는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2025년부터 시행된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이 수리와 관련된 내용을 포함하는 유일한 제도지만 대부분 권고적 성격에 그친다. 해당 법 제17조(제품 등의 순환이용 촉진)는 제품 수명 연장을 위해 수리 용이성을 고려할 것을 제안하고 제20조(지속가능한 제품의 사용)에서는 수리에 필요한 부품 확보를 촉진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두 조항 모두 ‘노력해야 한다’는 수준의 규범에 머물러 있어 이를 어겼을 경우 별도의 제재나 과태료가 부과되지는 않는다.
이외에도 민법상의 하자담보책임 조항이나 ‘소비자기본법’을 기반으로 한 ‘소비자분쟁해결기준’ 등이 간접적으로 수리와 관련된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이들 역시 법적 구속력보다는 권장 사항에 가까워 실질적으로 소비자의 수리권을 보장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낡아지는 게 아니라 낡게 만들어진다…계획된 진부화의 정체
새로 산 휴대폰이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속도가 느려지거나 버벅이는 경험,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무심코 “기계가 오래돼서 그렇겠지”라고 넘기기 쉽지만 어쩌면 이건 단순한 노후화가 아니라 의도된 전략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애플은 구형 아이폰의 성능을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통해 의도적으로 저하시켰다는 이유로 국내 소비자들에게 1인당 7만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을 2023년에 받았다. 법원은 애플이 주기적인 업데이트를 통해 구형 기기의 성능을 떨어뜨린 사실을 인정했다.
이처럼 소비자로 하여금 새로운 제품을 사도록 유도하는 기업 전략을 ‘계획적 진부화’라고 부른다. 제품의 수명을 고의적으로 단축하거나 기술적 결함을 설계에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대표적인 사례는 백열등이다. 1950년대, 전등 제조사들은 소비자 몰래 전등의 수명을 2500시간에서 1000시간으로 줄이기로 담합했다. 이 담합은 결국 발각됐고 의도적인 수명 단축은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하지만 제너럴 일렉트릭, 오스람 등의 기업은 수명이 짧은 전구를 만드는 관행을 쉽게 바꾸지 않았다.
요즘처럼 유행이 빠르게 바뀌는 사회에서는 꼭 기술적인 노후화만이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심리적 진부화’가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광고와 마케팅을 통해 소비자가 ‘지금 내가 가진 제품은 낡았다’고 느끼게 만드는 방식이다. 심리적 진부화의 대표적 시초는 1920~30년대 미국 경제 불황 시기다. 당시 제너럴 모터스는 자동차 모델을 자주 바꾸고 세련된 광고를 대대적으로 내세우는 전략을 펼쳤다. 소비자들은 더 새롭고 멋진 차를 갖고 싶어 했고 자발적으로 기존 제품을 ‘구식’이라 여겼다. 오늘날의 패션 트렌드, 스마트폰 마케팅 전략, 각종 한정판 제품들은 모두 이 같은 심리적 진부화의 연장선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