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빌딩이 자랑이던 시대는 지났다…’마천루’ 집착 버려야 [박영국의 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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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 반열에 선 한국, ‘마천루’ 전시효과 더 이상 필요 없어

미국‧유럽 등 주요 선진국들, ‘마천루 높이 경쟁’ 손 뗀지 오래

서울시 GBC ‘105층 고집’에 대규모 경제효과 유발 사업 지연 우려

기업은 ‘폼’ 보다 ‘실리’ 중시하는데…지역 행정도 발 맞춰야

서울 여의도 63빌딩(왼쪽)과 현대차그룹의 기존 GBC 설계안에 따른 105층 빌딩을 중심으로 한 조감도. ⓒ한화생명/현대차그룹 서울 여의도 63빌딩(왼쪽)과 현대차그룹의 기존 GBC 설계안에 따른 105층 빌딩을 중심으로 한 조감도. ⓒ한화생명/현대차그룹

1985년, 서울 여의도에 당시만 해도 아시아 최고층 빌딩이었던 63빌딩이 개장했을 때 전 세계가 놀랐고, 우리 국민들은 자랑스러워했다. 63빌딩의 주요 시설물이었던 고층 전망대와 수족관, 아이맥스 영화관은 ‘서울 관광’의 필수 코스였다.

국내에 마천루(摩天樓)라고 할 만한 건물이 처음 생겼으니 명실상부한 서울의 랜드마크이자 대한민국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이후 63빌딩을 넘어서는 높이의 건물들이 하나 둘씩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채우고 부산 등 다른 대도시에도 마천루가 들어서며 63빌딩은 ‘랜드마크’로서의 기능은 상실한 지 오래다.

새로 들어선 마천루들도 웬만큼 높아가지고는 큰 관심을 끌지 못한다. 2017년 개장한 123층짜리 초고층 빌딩인 롯데월드타워가 한동안 화제를 모은 정도다.

하지만 그 롯데월드타워조차 80년대의 63빌딩과 화제성을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63빌딩의 두 배 이상 높이에, 63빌딩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볼거리와 즐길거리, 먹을거리로 가득하지만 30여년 전의 63빌딩처럼 ‘반드시 한 번은 가 봐야 한다’는 강박감을 심어주는 장소는 아니다.

선진국 반열에 올라선 우리나라에게 있어 고대인들이 오벨리스크를 쌓아 올리듯 마천루를 세우며 국력을 과시하는 행위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 후진국을 갓 벗어난 개발도상국 시절일 때는 상징적 시설물이 국민들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대외적 열등감을 희석시키는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굳이 그런 물리적 상징물 없이도 우리의 경제력을 증명해줄 지표들이 많다. 특히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와 같은, 업종별 세계 톱 클래스 기업들의 역할은 마천루 따위와 비교할 게 아니다.

오랜 기간 선진국으로 자리해온 미국과 유럽 주요국들은 ‘높이 경쟁’에서 손을 뗀 지 오래다. 실제 고층빌딩 톱5는 모두 전통적 선진국이 아닌 신흥 경제국들이 차지하고 있다. 1위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828m), 2위는 말레이시아 KL118(678m), 3위는 중국 상하이타워(632m), 4위는 사우디아라비아 알베이트 타워(601m), 5위는 중국 핑안 파이낸스 센터(600m)다.

미국은 911 테러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 자리에 새로 세운 건물이 상당한 상징성을 지님에도 불구, 굳이 높이 경쟁에 집착하지 않았다. 새로운 세계무역센터의 중심 건물인 제1세계무역센터 높이는 541.3m로, 롯데월드타워(554.5m)에 이은 7위다.

현대차그룹이 55층 빌딩 2개 동을 중심으로 변경한 GBC 조감도. ⓒ현대차그룹 현대차그룹이 55층 빌딩 2개 동을 중심으로 변경한 GBC 조감도. ⓒ현대차그룹

이런 상황에서 최근 발생한 현대차그룹과 서울시간 삼성동 옛 한전 부지 개발을 두고 벌어진 갈등은 의아함을 남긴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20일, 당초 105층 건물을 세우는 것으로 예정됐던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GBC)’를 55층 2개 동으로 변경하는 내용의 ‘글로벌 비즈니스 콤플렉스’ 개발 계획을 발표하면서 “GBC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서울시의 조속한 인허가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사업계획 변경의 주요 배경은 공사비 급등에 따른 비용 부담으로 추정된다. 초고층 설계는 같은 연면적이라도 공사비가 1.5~2배 정도 높다. 여기에, 해당 지역에 초고층 건물을 지을 경우 공군의 레이더 작동을 방해할 수 있어, 새 레이더 구매 비용까지 수조원을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


전기차, 수소, 미래항공모빌리티(AAM), 로보틱스 등 신사업 분야에 투자를 집중하고 있는 현대차그룹으로서는 ‘과시성’ 프로젝트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 부을 여력이 없는 상황이다.

설계를 변경했다고 해서 GBC 사업 추진에 따른 경제효과나 공공기여 효과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도시행정학회가 당초 계획안을 기준으로 추산한 GBC 사업의 생산유발 효과는 265조원, 고용유발 효과는 122만명, 세수 증가는 1조5000억원에 달한다.

현대차그룹은 서울시의 인허가 절차가 내년 하반기 중으로 마무리되면 GBC 사업을 통해 2026년까지 약 4조6000억원 투자 및 9200명의 신규 고용이 이뤄지고, 2030년까지는 총 19조5000억원 투자, 누적 기준 5만6000명가량의 고용이 창출될 것이란 청사진도 내놨다.

현대차그룹이 부담해야 하는 공공기여액도 기존 약 1조7000억원 수준에서 물가상승분이 반영돼 2조1000억원을 상회할 것으로 추산했다. 영동대로 복합환승센터, 잠실운동장 리모델링 등 공공기여 사업을 서울시의 요구에 맞춰 성실히 이행하고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서울시 측은 바로 인허가를 내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당초 105층 랜드마크 건물을 지어 올리는 조건으로 공공기여 등을 줄여주는 내용으로 협상을 마쳤는데, 이를 55층 2개동으로 변경하면 사전협상부터 다시 진행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105층 하나를 55층 두 개로 나누면 ‘폼’이 안 나니, 원안대로 진행하거나, 변경하려면 공공기여 등의 부담을 더 지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GBC가 들어설 옛 한국전력 부지는 현대차그룹이 매입한 2014년 이후 10년 넘게 ‘공터’ 상태다. 서울시 측의 주장대로 사전협상부터 다시 진행할 경우 또다시 몇 년이 미뤄질지 모른다.

개도국 시절에나 간절했던 마천루에 대한 집착이 현 시점에서 강남 한복판의 금싸라기 땅을 계속해서 공터로 놔둬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인지 모를 일이다. ‘폼나는’ 랜드마크 조성이 지역 행정기관장의 명성을 높여주는 시대도 아닌데 말이다.

성과를 증명할 상징물에 많은 공을 들였던 창업 시대의 기업들과 달리,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지금의 기업들은 ‘폼’보다는 ‘실리’를 중시한다. 하지만 기업의 성장을 뒷받침해 경제효과를 최대화함으로써 민생에 득이 되도록 유도해야 할 지역 행정은 여전히 ‘폼’에 집착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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