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로피아나와 디모레밀라노의 운명적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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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밀란 디자인 위크에 전시된 로로피아나의 몰입형 프리젠테이션 〈La Prima Notte Di Quiete〉.

2025 밀란 디자인 위크에 전시된 로로피아나의 몰입형 프리젠테이션 〈La Prima Notte Di Quiete〉.

도시 전역이 갖가지 디자인 언어로 소란했던 ‘2025 밀란 디자인 위크’에서 가장 조용하고 깊게 인상에 남은 공간이 있다. 로로피아나와 디모레밀라노의 협업 전시 〈고요한 첫 번째 밤 La Prima Notte di Quiete〉다. 로로피아나는 ‘침묵의 럭셔리’를 상징하는 브랜드다. 디모레밀라노는 공간을 시처럼 짓는다. 빛과 그림자, 과거와 현재, 감정과 질감을 한 공간에 겹겹이 쌓아 올리는 감각의 건축가들이다. 어쩌면 로로피아나와 디모레밀라노의 만남은 당연했다. 철제 구조물에 드리운 베네치아풍의 벨벳 커튼을 열고 들어서자 짙은 앰버 톤의 조명 빛이 울트라 마린 소파 위로 쏟아진다. 곧이어 “쏴아!” 비가 쏟아지고, 우르릉 천둥이 치고, 전화벨 울리는 소리. 현관, 식당, 거실, 침실, 욕실로 연결되는 일련의 공간들 위로 효과음과 조명으로 전하는 짧은 이야기가 한 편의 느린 영화처럼 흘러간다. 고요함과 움직임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이야말로 이 전시의 주인공일 것이다. 이는 현실과 영화적 암시의 경계를 탐구하는 작품 제목에 영감을 줬다. 디모레밀라노가 로로피아나를 위해 디자인한 가구로 꾸며진 우아한 집은 로로피아나의 원단과 빈티지, 예술품으로 장식됐다. 따뜻한 톤의 캐시미어와 울, 벨벳이 선사하는 부드럽고 세련된 고요와 함께 저택은 비와 천둥, 번개가 오가는 외부의 혼란으로부터 보호받는, 편안한 안식처이자 은밀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누군가의 삶의 파편 같았던 전시의 영화적 연출은 이 집에 발을 들인 관객을 다른 차원으로 이끌었다. 사각과 원, 직선과 곡선, 금속과 캐시미어가 만나 이룬 충돌과 긴장은 보는 이들에게 구조 속의 낭만과 절제된 사치, 촉각으로 치환된 기억으로 기억됐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로로피아나와 디모레밀라노의 이번 전시가 ‘고급스러움’이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전시의 모든 것이 절정의 고요를 아는 이들이 만들어낸 고도의 연출이라는 것을. ‘로로피아나의 미감은 말없이 깊고, 디모레밀라노는 예민하고 섬세한 감각을 직조해 낸다.’ 공간적 경험이란 무엇일까.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 스미는 것 아닐까. 로로피아나와 디모레밀라노는 이 전시를 통해 공간 그리고 디자인이 얼마나 감정적일 수 있는지, 얼마나 조용히 강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DIMOREMILANO

〈고요한 첫 번째 밤 La Prima Notte di Quiete〉 연출자, 스튜디오 ‘디모레밀라노’의 에밀리아노 살치와 브리트 모란과의 인터뷰.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가상의 저택은 어쩐지 어수선하고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목격자(관람자)들은 계속해서 생각했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우리는 우아하면서도 그 안에 미묘한 긴장감과 미스터리를 품은 공간을 떠올렸습니다. 외형적인 아름다움 너머에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듯한 저택이었죠. 시작점이 1970~1980년대 저택이었어요. 방마다 과거의 흔적이 스며 있고, 방문자가 그 안에 담긴 삶의 조각들을 상상하게 만드는 장소 말이죠.

관람자들이 전시공간에서 느끼길 바라는 강렬한 감정이나 메시지가 있었나요

‘사색하는 고요함’. 외부의 소란에서 잠시 벗어나 이 공간에 몰입해 자신의 감정이나 기억을 조용히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랐어요.

2025 밀란 디자인 위크에 전시된 로로피아나의 몰입형 프리젠테이션 〈La Prima Notte Di Quiete〉.

2025 밀란 디자인 위크에 전시된 로로피아나의 몰입형 프리젠테이션 〈La Prima Notte Di Quiete〉.

다양한 문화적 기원을 지닌 독특한 물건들이 아름답게 장식돼 있는 주택 곳곳이 매혹적이었습니다. 마치 한 사람이 오랫동안 수집한 물건들 같았어요

예술과 문화, 시대를 초월한 디자인에 깊은 애정을 가진 수집가의 집을 연상하며 완성했습니다. 단지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수집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아 여행하고 경험하며 시간 속에서 모아온 것들이 공간 곳곳에 배어 있는 인물의 이야기였죠. 이 서사가 공간 전체에 감정적 깊이를 불어넣는 기반이 됐습니다. 이 중에서 특히 우리에게 인상 깊게 작용한 두 오브제가 있어요. 하나는 로로피아나 인테리어를 위해 디자인한 ‘바랄로 원형 침대(Varallo Round Bed)’예요. 친밀함과 도피의 상징이자 부드럽고 감싸주는 듯한, 약간 비현실적 존재감을 지닌 오브제죠. 또 하나는 접이식 ‘카를 바 테이블(Carl Bar Table)’이 숨겨진 선큰 라운지입니다. 절제되면서도 유쾌한 제스처를 통해 뜻밖의 놀라움과 은밀한 의식을 표현했습니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저희가 탐구하고 싶었던 이중성(개방감과 은밀함, 우아함과 불완전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2025 밀란 디자인 위크에 전시된 로로피아나의 몰입형 프리젠테이션 〈La Prima Notte Di Quiete〉.

2025 밀란 디자인 위크에 전시된 로로피아나의 몰입형 프리젠테이션 〈La Prima Notte Di Quiete〉.

〈La Prima Notte di Quiete〉라는 타이틀에 담긴 메시지나 영감에 관해 들려준다면

혼란과 소란의 시기를 지나 마침내 찾아오는 평온의 감정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죠. 이번 설치미술 작품에서 이 타이틀은 공간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바깥세상은 소음과 혼돈으로 가득하지만 그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고요하고 보호받는 듯한 내부 성소가 존재하죠. 하지만 이 고요함은 완전히 정적인 상태는 아닙니다. 전화벨 소리, 빗소리, 피아노의 잔잔한 선율이 침묵과 움직임, 평온과 침입 사이의 긴장감을 만들어내며 외부의 혼란과 내부의 평온 사이에 존재하는 섬세한 균형을 시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공간을 하나의 시네마틱한 경험으로 연출하는 것이 디모레밀라노의 오랜 방식입니다. 이런 표현은 지난 몇 해 동안 전시로 구현돼 왔는데, 이번엔 아예 관람자를 공간 속에 참여시켰고, 몇 분간의 러닝타임에 걸쳐 내러티브가 담긴 장면을 연출했어요. 연출자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무엇이었나요

나선형 계단 위로 울려 퍼지는 발걸음 소리였습니다. 관람자는 계단을 직접 보지는 못하지만 소리는 또렷하게 듣죠. 누군가 막 떠나려는 듯한, 보이지 않는 존재가 긴장감을 만들고, 멀리서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가 피아노 선율과 어우러지며 보이는 것과 상상하는 것 사이의 경계를 흩트립니다. 이 청각적 디테일은 설치미술 작품의 시네마틱한 본질을 가장 잘 압축한 순간입니다. 눈이 아니라 마음속에 떠오르는 장면 그리고 각자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장면이기 때문이죠. 작곡가이자 멀티미디어 아티스트인 니콜라 귀두치의 사운드스케이프는 관람자를 감싸듯 공간 전체를 감정적으로 채워주도록 정교하게 설계됐어요. 소리는 공간의 감정과 리듬을 이끄는 핵심 요소로 작용했고, 이번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감각적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2025 밀란 디자인 위크에 전시된 로로피아나의 몰입형 프리젠테이션 〈La Prima Notte Di Quiete〉.

2025 밀란 디자인 위크에 전시된 로로피아나의 몰입형 프리젠테이션 〈La Prima Notte Di Quiete〉.

관람자가 시네마틱한 경험을 통해 의도한 메시지를 느끼도록 키 요소로 고안한 것이 또 있다면

역시 조명이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어요. 빛의 강도와 색 온도를 세심하게 조절함으로써 시선을 유도하고 감정을 자극하며, 내러티브의 흐름을 따라 감정의 곡선을 유도했죠. 이를 통해 관람자가 전시 내내 서사와 감정적으로 연결돼 몰입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우리는 각 공간을 하나의 총체적 경험으로 보고 접근했습니다. 시각적으로는 색감과 구성을 세심하게 큐레이션하고, 촉각적으로는 자연스럽게 만져보고 싶은 소재를 선택했으며, 청각적으로는 공간 분위기에 어울리는 사운드를 정교하게 설계했습니다. 이런 감각의 레이어를 겹겹이 쌓아 올리는 방식은 관람자가 공간과 다층적으로 교감할 수 있도록 해주죠.

이번 공간을 통해 ‘현실과 상상’ ‘정적과 움직임’ 사이의 긴장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이 상반된 키워드 사이의 긴장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긴장감은 인간의 일상적 경험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정적인 상태와 끊임없는 움직임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죠. 이번 공간에서도 그런 이중성을 의도적으로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관람자들이 익숙한 것 속에서 낯선 감정을 느끼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경험을 하기를 바랐습니다.

 ‘Varallo Bed’

‘Varallo Bed’

로로피아나의 텍스타일과 디모레밀라노의 스타일과 미학이 매우 매력적인 조화를 이뤘던 설치미술 작품이었습니다. 로로피아나의 텍스타일이 가진 섬세함을 가구 디자인으로 풀어낼 때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은

우리는 패브릭과 형태의 상호작용에 특별히 신경 썼습니다. 텍스타일이 가구의 구조를 자연스럽게 감싸고 조화를 이루도록 하고, 봉제선과 드레이핑, 촉각적 대비를 통해 소재 본연의 아름다움을 강조했습니다. 동시에 기능성을 해치지 않도록 디테일을 정교하게 조율했습니다.

 ‘Valsesia Table’

‘Valsesia Table’

가장 고민스러운 지점도 있었겠죠

어려웠던 점은 감정의 톤을 정확히 설정하는 것이었어요. 친밀함과 약간의 불안감이 공존하는 미묘한 분위기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죠. 저희는 이 공간이 누군가 살고 있는 듯한, 아주 개인적이면서도 어딘가 낯설고 불안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장소처럼 느껴지길 바랐습니다. 마치 무언가 막 일어났거나 곧 일어날 것 같은 긴장감이 흐르는 그런 장소 말이죠. 아름다움과 긴장감, 향수(Nostalgia)와 모호함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일은 조명, 사운드 사이의 정적, 반쯤 비워진 유리잔의 위치까지 모든 디테일을 신중하게 설계해야 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이 감정의 층을 미세하게 쌓아 올리는 과정이 가장 섬세하고 어려운 부분이었어요.

협업을 시작하면서 로로피아나의 세계관을 공간적으로 풀어내고 브랜드의 절제된 고급스러움을 디모레밀라노만의 미학으로 재해석한 과정도 궁금합니다.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점은

로로피아나가 지닌 최고의 품질과 장인 정신 그리고 절제된 럭셔리의 가치를 공간 전체에 온전히 녹여낸 몰입형 환경을 만드는 것. 이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긴 요소는 ‘진정성’이었죠. 사용한 모든 소재와 텍스처, 디자인적 선택 하나하나가 두 브랜드의 철학을 솔직하고도 섬세하게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로피아나의 천연 소재에 대한 헌신, 시대를 초월한 우아함은 저희와 깊이 맞닿아 있는 미학적 가치이기도 합니다. 저희는 이것을 풍부한 텍스처와 절제된 색감으로 재해석해 두 브랜드의 정체성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감각을 만들어내려고 했어요.

 ‘Trivero Chair’

‘Trivero Chair’

로로피아나의 장인 정신이 디모레밀라노의 디자인 프로세스에도 영향을 미쳤을까요

이번 협업은 저희에게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로로피아나가 구현하는 장인 정신의 깊이는 디모레밀라노가 가구를 디자인할 때 추구하는 태도와 본질적으로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협업을 통해 소파 덮개의 정교한 마감에서부터 소재 본연의 완성도를 지켜내는 방식까지 두 브랜드가 공유하는 디테일에 대한 집중을 더욱 부각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기준에 맞춰가는 것이 아닌,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탁월함’이라는 언어를 인식하고 그것을 몰입형 환경이라는 새로운 맥락에서 한 단계 더 확장하는 경험이었습니다.

‘Quarona Coffee Table’

‘Quarona Coffee Table’

디모레밀라노의 디자인을 상징하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 그리고 ‘시간성’이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어떻게 구현됐나요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시간에 멈춰 선 집’으로 상상했어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의 미학이 현대적 제스처와 공존하는 공간. 물려받은 램프나 누군가 막 떠난 듯한 소파처럼 시간의 흔적이 남은 듯한 감각이 공간 전체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였습니다. 하지만 사용한 소재와 구성은 분명 지금의 것이고, 저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에요. 과거를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새롭게 재해석하는 것. 저희에게 시간은 직선적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겹치고, 회귀하며, 반복됩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과거를 현재로 다시 데려오는 방식이에요. ‘향수(Nostalgia)’가 아닌, 분위기를 통해 그 감각을 되살려내는 것이죠.

‘Quarona Pouf’.

‘Quarona Pouf’.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살치와 모란 두 사람이 얻은 것은

디자이너로서 시야를 확실히 넓힐 수 있었어요. 로로피아나의 신뢰와 지지는 저희에게 지금까지 디자인 위크에서 시도된 적 없는 대담한 비전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줬어요. 디자인이나 소재, 분위기를 몰입형 방식으로 결합하는 새로운 접근을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저희는 스케일과 텍스처, 내러티브를 다루는 새로운 방식을 탐색하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이 작업을 통해 협업의 힘, 창의적 한계를 넘어섰을 때 펼쳐지는 가능성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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