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6년 로마 비아 델 플레비시토에 문을 연 펜디의 첫 부티크.

1965년, 칼 라거펠트가 디자인한 FF 로고.

1930년대, 비아 피아베 부티크에서 포착된 아델 펜디.
1925년, 로마의 한 공방. 퍼와 가죽, 재단사의 땀내가 섞여 있던 그곳에서 펜디란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애초에 이 하우스는 전통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 펜디가 집착한 것은 시간. 시간을 견디는 품질과 시간을 앞서가는 스타일, 시간을 되짚는 기억. 그리고 100년이 지난 지금, 그 집착은 다시 한 번 완벽한 형태로 돌아왔다.
2025년, 펜디는 자신들의 100번째 생일을 성대하게 축하했다. 이 파티는 옛 사진을 모아 추억하는 행사로 끝나지 않았다. 서울을 시작으로 쑤저우, 마이애미, 로마를 순회하는 ‘월드 오브 펜디’는 일종의 살롱에 가깝다. 이 투어에선 장인이 실시간으로 가방을 봉제한다. 고객은 자신의 바게트 백을 원하는 색상과 디테일로 주문 제작할 수 있다. 전 세계를 돌며 퍼포먼스를 펼치는 펜디식 ‘이동형 아틀리에’인 셈이다.
이 투어의 중심에는 펜디가 고른 10개의 아이코닉 백이 있다. 1925년 첫 등장한 ‘아델’, 쌍둥이 수납공간을 지닌 ‘제미나이’, 칼 라거펠트의 로마 산책에서 영감받은 파스타 체인 백 ‘라 파스타’ 그리고 전설이 된 ‘바게트’와 ‘피카부’. 각각의 백은 각 시대의 스타일 코드와 여성이 가방에 바라는 감정, 펜디가 세상에 던진 질문이자 해답이었다. 이번 리에디션은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기억과 기술의 현재화를 향한 실험에 가깝다. 과거를 반복하는 대신 미래의 클래식을 다시 쓰는 방식이다.

‘월드 오브 펜디’의 메이드-루-오더 제작 과정.

1967년 아카이브 스케치.

2006년 공개된 셀러리아 아델 백. 창립자의 이름을 기리는 헌정이자 장인 정신의 정수와 다름없다.
펜디의 유산을 얘기할 때마다 빠질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퍼다. 퍼라는 소재는 펜디에 기능이 아닌 표현이었고, 20세기 중반 이후 퍼를 예술로 끌어올린 주체였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1960년대의 ‘컬러 페퀸’ 보머 재킷, 1970년대의 ‘니도 다페’ 벌집 구조 그리고 1990년대의 레이스 퍼에 이르기까지 펜디는 기술과 감각의 한계를 끊임없이 넓혀왔다. 물론 오늘날의 펜디는 시대의 감수성과 보조를 맞추며 퍼에 대한 접근을 훨씬 더 신중하게 조율하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는 2025~2026 F/W 컬렉션으로 귀결된다. 펜디가 밀란에 세운 스파치오 펜디에서 열린 쇼는 단순한 런웨이가 아니라 기억의 공간이다. 나무 패널로 된 문을 열면 1950년대 로마의 살롱이 그대로 펼쳐진다. 과거 펜디 자매가 소재를 고르고 재단하던 아틀리에를 재현한 세트에서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는 다시 한 번 ‘펜디다움’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
쇼의 오프닝은 델피나 델레트레즈 펜디의 일곱 살 쌍둥이 아들, 다르도와 타지오가 맡았다. 그들은 1967년, 칼 라거펠트가 같은 나이였던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를 위해 디자인한 승마복을 복각한 룩을 입고 런웨이에 등장했다. 손잡고 걷는 그들의 뒷모습은 한 세기를 지나 이어지는 펜디 가문의 혈통과 이야기를 소리 없이 증명했다. 초대장도 특별했다. 셀러리아 스티치를 더한 쿠오이오 로마노 가죽으로 만든 아코디언형 여권. 그 안엔 실비아의 어린 시절 사진부터 칼 라거펠트의 첫 펜디 컬렉션 등 펜디의 기념비적 순간이 담겨 있었다.

2025~2026 쇼 피날레에서 포착한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의 모습.

펜디의 2025~2026 F/W 컬렉션 피날레. 펜디의 2025~2026 F/W 컬렉션.

새로워진 스파이 백.
이번 컬렉션은 군더더기 없는 절제된 우아함으로 채웠다. 플레어 코트의 골드 벨트, 새틴 드레스의 드레이핑은 한 시대를 환기하면서도 지금 당장 입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다. 특히 성별을 넘나드는 테일러링 실루엣과 란제리 위로 겹쳐 입은 시어링 스톨, 디어스킨으로 만든 셀러리아 코트는 펜디가 추구하는 젠더와 럭셔리의 유연성을 보여주고 있다.
액세서리는 펜디의 미감을 약간 낯설게 비틀었다. 2005년에 등장한 스파이 백에는 꼬임 장식의 핸들과 소르베 톤의 시어링을 더했고, 신작 지아노 백은 야누스와 다람쥐 엠블럼을 새긴 투 톤 가죽 백으로 완성했다. 업사이클 소재로 만든 펜디 맥시 참 캐릭터도 곳곳에 등장해 유머와 위트를 더했다.

펜디 자매들과 칼 라거펠트가 함께한 1986년의 한 장면. 오랜 협업과 창의적 유대의 기록이다.

1994년, 칼 라거펠트는 다섯 자매를 ‘한 손의 다섯 손가락’이라고 표현했다.

1925년에 디자인된 펜디의 다람쥐 로고. 에두아르도 펜디는 아내인 아델 카사그렌데 펜디를 ‘다람쥐처럼 바쁜 사람’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펜디의 혁신은 결코 단독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1965년, 다섯 자매의 초청으로 펜디에 합류한 칼 라거펠트는 하우스의 정체성을 재구성한 FF 로고를 디자인했다. ‘Fun Fur’라는 유쾌한 의미를 담은 더블 F는 이후 수십 년간 펜디의 모든 시그너처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클래식과 위트를 동시에 상징해 왔다. 그리고 2020년, 킴 존스가 여성복 및 쿠튀르 아티스틱 디렉터로 합류하면서 펜디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가 주도한 아카이브의 재해석과 하이엔드 감성은 델피나의 주얼리 디자인과 함께 오늘날의 펜디를 다시 선두로 끌어올리는 주춧돌이 됐다.

펜디의 2025~2026 F/W 컬렉션. 8 펜디의 포토 월에 선 엘리자베스 올슨

펜디의 2025~2026 F/W 컬렉션에 참석한 사라 제시카 파커.
이 브랜드의 진정한 힘은 무엇일까? 아델과 에두아르도, 다섯 자매, 실비아 그리고 델피나까지. 100년 동안 펜디는 철저히 ‘가족’의 에너지로 움직여왔다. 그들은 로마를 떠나지 않았고, 로마의 색, 소리, 돌, 역사, 밤, 기온을 고스란히 작품에 담았다. 장인의 손길과 여성의 감각 그리고 시간에 대한 깊은 존경. 펜디가 지켜낸 건 단순한 명성도, 하나의 브랜드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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