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원을 리메이크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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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공원

조경가 김영민이 말하는 오래된 공원을 다시 짓는 방식.

농구대, 탁구대 등 다양한 운동 시설을 갖춘 스포츠 공간. 전통 문양이 있던 중앙 가로에 64괘를 형상화한 바닥 패턴을 입혀 기존 디자인에 담긴 한국성을 모던하게 재해석했다.

농구대, 탁구대 등 다양한 운동 시설을 갖춘 스포츠 공간. 전통 문양이 있던 중앙 가로에 64괘를 형상화한 바닥 패턴을 입혀 기존 디자인에 담긴 한국성을 모던하게 재해석했다.

레트로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기존의 구조물.

레트로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기존의 구조물.

1980년대 목동에 조성된 파리공원을 2022년 이남진 조경가와 함께 레너베이션했다. 오래된 공원을 고쳐 쓴다는 게 낯설고도 새롭다
생소하게 들릴 수 있으나 해외의 경우 일찍이 진행돼 왔다. 대표적으로 뉴욕 센트럴 파크가 언뜻 보면 조성 당시의 모습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많은 변화를 겪었다. 예를 들어 센트럴 파크엔 야구나 소프트볼 등을 즐길 수 있는 야외 스포츠 공간이 20여 개나 된다. 하지만 최초 설계자인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의 계획엔 없던 것들이다. 일본은 한국보다 좀 더 이른 시기인 1970년대에 공원이 많이 생겼다. 우리보다 한 차례 앞서 레너베이션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고, 이젠 신규 조성보다 레너베이션에 더 예산을 쓰는 추세로 접어든 듯하다. 한국은 신도시가 생기던 1980~1990년대, 특히 88서울올림픽 전후로 다수의 공원이 만들어졌다. 이제 어느 정도 리모델링을 해야 할 시기에 이른 것이다. 그땐 퀄리티보다 속도를 우선시했다. 시설 노후로 인한 물리적 개선뿐 아니라 현대 이용 패턴에 맞춘 구조적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됐다.

파리공원은 공원으로선 한국에서 처음으로, 작품으로서 인정받은 조경 설계라고 들었다. 당대의 다른 공원과 비교하면 어떤 차이가 있나
파리공원 이전에도 한국에 공원은 있었다. 하지만 컨셉트가 없었다. 토목 공정의 일환으로 도로를 내듯 공원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87년 군부 독재 시절 한·불 수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공원이 결정됐고, 목동 신시가지에 예정된 근린공원 대상지 중 하나가 낙점됐다. 좀 더 그럴듯한 디자인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 과업이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부설 환경계획연구소에 돌아갔고, 당시 유학파 출신인 황기원·유병림·양윤재 교수 등이 설계를 맡았다.

 출입할 수 없었던 분수대 공간은 이용 편의를 위해 바닥 분수를 갖춘 광장으로 개선했다.

출입할 수 없었던 분수대 공간은 이용 편의를 위해 바닥 분수를 갖춘 광장으로 개선했다.

공원 한 켠에 있는 장미정원에 놓인 에펠탑 조형물.

공원 한 켠에 있는 장미정원에 놓인 에펠탑 조형물.

공원 안쪽에 있는 서울광장은 손님을 맞이하는 한국인의 태도를 상징하며, 기존 3색 태극 패턴을 흑백 태극으로 수정해 현대성을 가미했다.

공원 안쪽에 있는 서울광장은 손님을 맞이하는 한국인의 태도를 상징하며, 기존 3색 태극 패턴을 흑백 태극으로 수정해 현대성을 가미했다.

큰 틀은 유지하되 현대적 미감을 덧입히고, 주민들의 이용 패턴에 맞춰 공간을 부분적으로 개선했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파리공원은 리메이크한 고전영화 같다. 과거의 흔적으로 다소 촌스러운 구석은 있지만 그 시절의 낭만이나 분위기가 묻어난달까. 큰 변화를 꾀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애당초 자유도가 그리 높은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양천구에서 제공한 기본 구상안을 지키며 설계해야 했는데, 보존이나 개선에 대한 가이드가 명확했다. 여기에 파리공원이 지닌 역사성이나 상징성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 무엇보다 공간 자체가 독특했다. 과거 파리공원의 도면을 보면 가운데 곧게 뻗은 길을 기준으로 반원· 삼각형· 사각형의 공간이 구획돼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도 볼 수 있는 독특한 기하학적 구성이기도 하고, 한국적 정서도 담겼다. 남쪽 입구의 너른 반원형 광장 ‘한불마당’은 프랑스를, 북쪽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전통 분위기의 원형 공간 ‘서울광장’은 한국을 상징한다. 손님을 맞이할 때 서양과 달리 한국은 주인을 낮추는 태도를 은유한 것이다. 현재 트렌드에 부합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당시로선 무척 진보한 디자인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딱 그 시절의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감성과 상징성을 현대적으로 존중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대신 당대 기술과 재료의 한계로 미흡하게 조성된 부분은 디자인과 재료 변경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선했다.

일상의 필요에 맞춘 변화도 눈에 띈다. 사람이 들어가 이용할 수 없었던 수경 시설은 바닥 분수를 갖춘 광장이 됐고, 농구 코트뿐 아니라 다채로운 운동 시설이 곳곳에 들어섰다
본래 파리공원은 근린공원으로 계획됐으나 기념공원으로 지정되며 상징성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 과정에서 놓친 ‘일상성’의 회복이 중요했다. 레너베이션 전에 공원을 여러 번 다니며 주민들을 만났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파리공원의 상징성엔 관심이 없더라. 한·불 수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공원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분이 많았다. 파리공원은 지난 35년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꾸준히 이용됐고, 이 과정에서 조금씩 변했다. 공원 외곽의 보행로는 원래 설계엔 없었다. 그저 공원과 도시를 분리하는 언덕일 뿐이었는데 사람들이 다니며 자연스럽게 길이 난 거다. 야외 전시장이었던 곳은 농구장으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를 레너베이션에 적극 반영했다. 생각보다 앉을 데도 마땅치 않았다. 어떤 가족은 자리가 없어 수목 경계석에 앉아 김밥을 먹고 있더라. 벽에 기대 이야기하는 학생들도 곧잘 눈에 띄었다. 바닥 분수가 있는 광장 한쪽을 앉음 벽으로 만들고, 공원 곳곳에 많은 벤치와 의자를 두었다. 용도가 특정된 공간인 만큼 다양한 쓰임새를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커뮤니티가 발생한다.

사람들의 발길로 자연스럽게 생긴 외곽 산책로는 이용 패턴을 존중해 깔끔히 정비했다.

사람들의 발길로 자연스럽게 생긴 외곽 산책로는 이용 패턴을 존중해 깔끔히 정비했다.

부족한 그늘을 위해 새롭게 설치한 구조물과 유아를 위한 그물 놀이터.

부족한 그늘을 위해 새롭게 설치한 구조물과 유아를 위한 그물 놀이터.

많은 사람이 쉴 수 있도록 보충한 앉음벽 데크.

많은 사람이 쉴 수 있도록 보충한 앉음벽 데크.

레너베이션 이후 공원을 방문했을 땐 어땠나?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레너베이션을 마치고 개장하는 날 공원을 찾았는데, 흡사 놀이공원이 연상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파리공원은 위치상 같은 지역의 다른 공원보다 이용도가 높지만, 예상치 못한 풍경에 담당 공무원도 놀라더라. 이 정도 변화에 이 정도로 공원이 활성화된다면 앞으로 더 많은 공원이 업그레이드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국내에 비슷한 연식의 공원들이 꽤 있다. 레너베이션 매뉴얼이나 가이드라인이 필요할까
디자인 매뉴얼은 필요하지 않다. 이런저런 제약을 두기보다 공간을 잘 기획할 수 있는 적임자에게 권한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인근에 있는 오목공원도 비슷한 시기에 레너베이션돼 파리공원과 마찬가지로 큰 호응을 얻었다. 두 공원의 레너베이션이 성공적인 이유는 각 공원의 특징과 맥락을 고려해 접근했기 때문이다. 시기에 대한 기준이라면 리서치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이를테면 노년층이 많이 사는 지역인데 어린이공원밖에 없다거나, 시설 자체가 노후한 경우처럼. 예산은 한정돼 있으니 시기나 강도, 방식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기부채납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공원 중엔 유명무실한 경우가 꽤 있는데, 차라리 그 예산을 근처 공원을 레너베이션하는 데 쓰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오늘날 공원만이 줄 수 있는 가치는
공원을 이용하는 건 개인 소유의 넓은 정원을 공유하는 것과 다르다. 돈 많은 누군가가 집 앞에 물놀이 공간이나 농구 코트를 만들어도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이고 어울리긴 어렵다. 공원은 누구나 돈 내지 않고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어메니티다. 그곳엔 어떤 재화도 대체 불가능한 공익적 혜택과 경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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