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1일은 내가 좋아하는 가게가 10주년을 맞은 날이자 문을 닫는 날이었다. 그곳은 섬세하게 만들어진 칵테일을 파는 고급스러운 바였지만, 공연을 마친 내가 무대 화장을 지우지 않고 트레이닝복 차림으로도 갈 수 있는 친근한 장소였고, 혼자 책을 읽거나 둘이서 뭔가를 속삭이고 싶은 여자들을 위한 가게였다. 이곳이 사라지는 게 슬픈 여자들은 마지막 날에 모여 열심히 춤추고 칵테일을 마시며 울고 웃고 있었다. 어느덧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다가왔고, 우리는 소리를 내 카운트다운을 하며 “해피 뉴이어!”를 힘차게 외쳤다. 한 단골손님은 준비한 레터링 케이크(‘10주년을 축하합니다’ 같은 게 쓰인)를 꺼내 사장님에게 전달했다. 그때에 맞춰 DJ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이하 ‘다만세’)를 틀었다. 폭발적인 주목을 받았던 데뷔 곡이자 발매 후 10년의 시간이 흘러 우연히 젊은 여자들의 투쟁 현장에서 불리다 최근에는 광장까지 불려나가게 된 참으로 기구하고도 상징적인 노래. 가사 ‘언제까지라도 함께하는 거야’를 부르며 가게는 10년간의 길고도 짧은 영업을 종료했다.
새해에 처음 듣는 노래가 한 해의 운을 결정한다는 식의 유행이 있다. 요즘은 ‘새해 첫 곡’으로 들려지길 소망하며 만들어진 노래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고, 그걸 모아둔 플레이리스트까지 있다. 좋은 꿈을 꾸는 날에는 로또를 사고, 산에 있는 돌을 높게 쌓아 올리며 소원을 비는, 그러니까 영적인 것에 은근히 거부감 없는(이런 행동을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현재 시점에서는 약간 복잡한 마음이다) 한국인에게 새해에 처음 듣는 노래로 새해를 향한 마음을 고조시키는 건 꽤 어울리는 행위인 것 같다. 이 ‘미신’ 비슷한 소망이 가진 힘에 따르면 새해 첫 곡을 함께 들은 그 가게의 여자들과 내 2025년에는 다시 만난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대체 어떤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까?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면 내 노래가 사람들에게 별 도움을 못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무력해질 때가 있다. 그런데 글 쓰는 한 친구는 “글이야말로 정말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아니, 글은 도움이 되는데?” “아니, 음악이 도움 되지!” 하고 아웅다웅하다 생각한다. 아니, 둘 다 쓸모없지만 쓸모 있다. 그리고 적어도 나에게는 너의 글이 쓸모 있다. 음악과 영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건 인간에게 몇 안 되는 희망적인 모습이고, 나에겐 그리고 우리에겐 희망이 필요하니까. 수많은 사람의 삶 속에 내가 있다는 감각, 그래서 내 삶이 그렇게 특별하지도 이상하지도 않다는 느낌, 누군가의 경험이 감히 내 것처럼 느껴져서 행복해하고 아파하는 것. 그렇게 타인을 공감하는 경험이 인간의 닫힌 마음을 회복시킨다고 믿고 싶다. 지금 내가 죄책감 없이 부를 수 있는 노래는 광장에서 ‘다만세’와 구호 버전의 ‘Whiplash’ 정도밖에 없지만, 언젠가 나의 누추한 노래를 사람들과 조용하고 따뜻하게 부르는 날을 상상한다. 기쁜지 슬픈지 잘 구분되지 않고 많은 이가 즐길 수도 없지만, 어떤 곳의 누군가에게는 분명 기능을 하는 그런 노래를.
정말이지 새해 기분이 하나도 나지 않지만 사실은 안다. 날짜가 하나 변하는 것뿐이고, 아직 해결해야 할 것이 한가득이라는 것을. 그래도 절취선이 그어진 듯한 한 해의 경계는 작별할 것과 안고 가야 할 것이 무언지 돌아볼 수 있게 해준다. 새롭게 다가올 날들을 상상해 본다. 당분간은 종종 2024라고 쓰는 오타를 내고 실수할 ‘2025’라는 믿기지 않는 숫자, 익숙하게 다시 돌아올 연휴,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일들, 절대 잊지 못할 어느 아픈 날들. 그리고 아직은 알 수 없는 두렵고도 설레는 많은 날을. 기후 위기가 극심해진 지구에서 작은 새싹은 어떻게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 발버둥칠 것이다. 세상은 어쩜 이렇게 후퇴하는 것 같으면서도 애매하게 희망적일까? 또다시 실망하더라도 우리들의 다시 만날 세계를 기다려본다.
김사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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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같으면서도 시적인 노랫말을 쓰는 싱어송라이터. 2020년 에세이 〈사랑하는 미움들〉을 썼고, 석 장의 정규 앨범을 발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