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는 안식처이자 위로야, 좋은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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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일과 휴식의 분명한 경계를 선호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항상 침대로 일하러 간다. 특히 겨울날, 이불을 완벽하게 갖춘 침대는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코트나 다름없다. 이곳은 미국에서 가장 추운 도시 중 하나인 미니애폴리스. 겨울이 그야말로 겨울다운 지역이다. 나는 침대에서 일하고, 글 쓰고, 잠을 잔다. 어릴 때부터 몸에 밴 버릇이다. 나의 첫 사무실은 싱글 침대였다. 꽃무늬가 새겨진 네 개의 하얀 기둥 위로 핑크색 캐노피가 설치돼 있었고, 침대 위에는 거기에 어울리는 핑크색 침대보와 퀼트 이불이 있었다. 침대를 둘러싼 벽에는 다섯 살 때 직접 고른 핑크색 벽지가 발라져 있었다. 18세 때까지 나는 그 방을 썼다. 방에는 흰 책상이 있었는데 그 위에서 나는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는 과목을 공부했다. 그런 공부를 할 때는 종종 간식이 필요했다. 침대에서는 아플 때를 제외하고는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이건 부모님이 아닌, 내가 정한 나만의 규칙이었다. 나에게 침대는 책을 위한 곳이다. 고로 신성해야 한다. 과자 부스러기 따위는 허용되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 책 읽는 걸 좋아했던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따뜻한 이불 속에 팔꿈치를 대고 엎드려서 글을 썼다. 모두가 잠든 주말 아침, 몸을 오들오들 떨며 나만의 사무실을 빠져나와 급히 연습장을 챙겨 다시 안락한 침대로 들어간다. 글을 쓰다가 막히면 베개에 머리를 대고 잠시 졸기도 한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들면 대개 문제가 해결되거나 훨씬 흥미로운 방향으로 이야기가 풀린다.

예전에 작업했던 글의 내용이 하나 있다. 행방이 묘연했던 부자 할아버지가 적절한 순간에 나타나는 고아원 이야기였다. 그때 난 이야기 속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이 내가 침대에서 느낀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포근함을 느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글을 썼다. 초등학생 시절 메릴랜드 베세즈다에 살았을 때 비로소 나는 내 방을 직접 꾸밀 수 있었다. 그리고 장미로 꾸민 그 방을 수년간 썼다. 친구들은 저마다 핑크색 캐노피를 보며 부러운 듯 한 마디씩 했다. 그때 내게는 방이 아니라 동굴이 필요했던 것 같다. 중학생 때 컴퓨터가 생기면서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야 했다. 컴퓨터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유혹적이었지만, 침대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게 달갑지 않았다. 키보드 덕분에 나는 생각의 속도로 글을 쓸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데스크톱을 누워서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인쇄한 초고나 소중한 소설책, 역사책을 읽을 때면 여전히 침대로 돌아갔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나는 그 방을 떠났다. 미국의 대학 기숙사에는 주로 엑스트라 롱 침대가 놓여 있어 특별히 엑스트라 롱 침대보를 사야 한다. 평균 키밖에 되지 않는 내게 엑스트라 롱은 여분의 작업공간이 더 생겼음을 의미했고, 마침 고물 노트북이 생겼다. 즉 침대 위에서 작업이 가능해졌다는 이야기다. 매사추세츠의 추위를 피해 내 뇌는 다시 이불 속으로 웅크리고 들어갔다. 하버드대학 2학년 재학 시절, 원고지가 널브러진 이불 속에서 나는 첫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소설은 펜실베이니아, 버지니아, 아이오와의 싱글 침대 위에서 썼다. 그 후 뉴햄프셔 학교 전속 작가로 일하게 되면서 나는 학교 숙소로 이사를 갔다. 어떤 가구가 필요하냐는 질문에 나는 방에 둘 더블 침대 하나와 거실에 둘 싱글 침대 하나, 이렇게 두 개의 침대를 택했다. 기분에 따라, 업무에 따라 나는 두 침대를 왔다 갔다 했다. 어떤 소설은 이 침대에서 잘 읽혔고, 또 다른 소설은 저 침대가 어울렸다. 뉴잉글랜드 지역의 여느 곳처럼 뉴햄프셔에 있는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 역시 특정 날짜 전까지는 히터를 틀지 않았다. 오들오들 몸을 떨던 난 로라 잉걸스 와일더(Laura Ingalls Wilder)와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따뜻한 물병을 이용해 발을 따뜻하게 했던 게 떠올라 나도 병에 물을 받아놓고 글을 썼다. 밖은 폭설로 눈이 쌓이고 있었다.

2006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언론학을 공부하기 위해 뉴욕으로 이사 갔을 때 나는 3인용 듀플렉스 아파트의 방을 하나 얻었다. 문이 없는 지하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커튼이 쳐진 나선형 계단을 따라 내려가야 했다. “술 취해서 자칫 잘못하면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겠다.” 친구는 못 미더운 표정으로 말했다. 굳이 술을 마시지 않아도 충분히 칠칠맞지 못한 나는 그 말이 신경 쓰였지만, 거기 사는 3년 동안 계단을 구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킹 사이즈 침대에 정통으로 얼굴을 박았을 것이다. 그 침대는 이전에 살던 사람에게서 산 것으로 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덕분에 책상을 놓을 자리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럴싸한 킹 사이즈 침대는 엑스트라 롱 침대보다 나았다. 첫 소설을 다시 작업하기 시작한 어느 날, 글의 순서가 뒤죽박죽 엉망이 돼버렸다. 나는 원고를 모조리 인쇄해서 침대 위에 올려놓고 정리에 들어갔다. 우두커니 서서 걱정스러워하며 원고를 이렇게도 놓아보고 저렇게도 놓아봤다. 엎치락뒤치락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나니 원고가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정리가 끝난 원고는 마침내 침대에서 벗어나 내 사랑하는 친구이자 편집자에게 전달됐다. 친구는 원고가 제대로 됐다고 확인해 줬다. 2009년 미시간 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미국 중서부로 갔을 때 내게 침대란 추위와 어둠의 피난처이자 최고의 작업물을 낼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확고했다. 미시간의 아파트는 맨해튼에서 온 여학생들이 쓰던 기숙학교였다. 여학생들은 미시간의 우중충한 하늘에 대항하기라도 하듯 밝디밝은 색들로 건물을 칠해 놨는데, 그곳에서 나는 또 핑크색 벽을 만났다. 그 침대 위에서도 나는 항상 일을 했다. 물론 잠을 자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 하나라도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사람들과의 대화에 빠짐없이 참여하다 보니 결국 심각한 불면증을 얻었다.

2015년 미니애폴리스로 이사를 간 후에도 침대는 분열돼 가는 세상 속에서 내게 피난처가 돼주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컴퓨터와 책 그리고 히터가 윙윙대며 내 곁을 지켰다. 2020년 코로나19 초창기에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에 의해 살해된 후 도시에는 시위가 활개쳤고, 이런 시위대를 진압하려는 사람들과 어딘가에서 나타난 선동가들이 북새통을 이뤘다. 면역력이 약한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동지들이 시위에 참여하는 동안 방 안에서 가만히 지켜보며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오래전의 손 부상이 재발했다. 타자를 치는 것도 버거워진 나는 음성 인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가족 모두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가고 있을 때 나는 침대에 홀로 앉아 컴퓨터에 대고 나의 두 번째 소설 〈형제들이 떠난 밤 Brotherless Night〉을 음성으로 써 내려가고 있었다. 대안 미디어 뉴스 사이트인 유니콘 라이엇(Unicorn Riot)에 들어가거나 미니애폴리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소통할 때만 글 쓰는 걸 멈췄다. 밖에서 폭동이 일어나는 동안 나는 안에서 1983년 스리랑카에서 벌어진 타밀 학살의 잔혹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책을 집필하고 바깥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알아가는 동안에도 나는 안락하고 익숙한 작업공간으로 파고들었다. 침대는 여전히 안식처이자 위로다. 내 침대의 역사는 곧 내 작업의 역사다. 몇 해 전 킹 사이즈 침대를 새로 구입했다. 이 침대는 내 몸을 지지해 주기 위해 구부러지기도 하고, 머리를 들어 올려주거나 다리에 중력이 가해지지 않게 위치를 조절해 주기까지 한다. 오랫동안 내 몸을 책상으로 써왔던 내게 나를 지탱해 주고 나의 편안함을 위해 움직이는 침대가 있다는 게 마법처럼 느껴진다. 글을 쓸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유일한 마법. 세상은 넓고 내 침대 역시 그렇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하는 한 나는 세상과 맞서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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