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속 숨은 고즈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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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디자이너들의 옷은 유행을 타지 않아요. 언제 입어도 촌스럽지 않죠.” 발렌시아가 드레스와 슈즈,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크롬 하츠 액세서리를 한 유수미.

“내가 좋아하는 디자이너들의 옷은 유행을 타지 않아요. 언제 입어도 촌스럽지 않죠.” 발렌시아가 드레스와 슈즈,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크롬 하츠 액세서리를 한 유수미.

직접 자신의 원피스를 만들고 남은 천 조각으로 제작한 리틀 유수미 인형.

직접 자신의 원피스를 만들고 남은 천 조각으로 제작한 리틀 유수미 인형.

도심 속에 위치한 아파트지만, 마치 단독 주택 같은 고즈넉함과 평온함이 감돈다. 정원이 딸린 1층 집에서만 누릴 수 있는 여유다. 집주인 유수미의 안내에 따라 들어선 방들은 그녀가 바느질로 빚은 인형과 그림, 민속품을 조합한 오브제 작품이 수북이 쌓여 있다. 마치 숨은 보물을 찾듯 집을 둘러보는 내내 흥미로운 발견의 연속이다. 500년 된 대청마루가 거실 중앙을 묵직하게 지키고, 그 위에 길게 늘어놓은 무명천을 테이블 매트 삼아 과일과 음료를 내놓는 집주인 덕에 잠시 고요한 한옥 카페에 온 기분이 든다. 통창 너머로 펼쳐지는 초록의 작은 정원마저 이곳이 아파트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주방 한쪽에 마련된 다이닝 공간에는 댕댕이덩굴의 줄기로 직접 만든 소쿠리 조명을 걸고 벽에는 한옥 문틀, 그 옆으로는 마차 바퀴 축과 두더지 잡는 도구를 걸었다.

주방 한쪽에 마련된 다이닝 공간에는 댕댕이덩굴의 줄기로 직접 만든 소쿠리 조명을 걸고 벽에는 한옥 문틀, 그 옆으로는 마차 바퀴 축과 두더지 잡는 도구를 걸었다.

대청마루를 침대 프레임으로, 한옥 문을 헤드보드로 변신시켰다.

대청마루를 침대 프레임으로, 한옥 문을 헤드보드로 변신시켰다.

집은 나의 세계이고 우주예요.

거실에 드리운 100년 된 무명천은 친정어머니가 물려준 것. 가까이서 보면 얼룩이 있는데, 얼룩을 지우는 행위가 친정어머니의 흔적을 없애는 것 같은 생각에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거실에 드리운 100년 된 무명천은 친정어머니가 물려준 것. 가까이서 보면 얼룩이 있는데, 얼룩을 지우는 행위가 친정어머니의 흔적을 없애는 것 같은 생각에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양반들이 사용했던 침상을 베란다에 뒀다. 이곳에 앉아 책을 읽고 자수를 놓으며, 비 오는 날에는 낙수를 보며 티타임을 가진다.

양반들이 사용했던 침상을 베란다에 뒀다. 이곳에 앉아 책을 읽고 자수를 놓으며, 비 오는 날에는 낙수를 보며 티타임을 가진다.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비범한 공간이 있다. 유수미의 집이 그렇다. 169㎡의 넓은 공간은 고가구와 골동품으로 채워져 민속 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여러 개의 칸막이로 된 약장과 빗장이 달린 장을 수납장으로 쓰고, 네 사람이 메는 가마 사인교가 공간을 장식한다. “옛날 물건은 오랜 역사와 누군가의 추억이 새겨져 있어 오래 두고 볼수록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수백 년 전 누군가의 손으로 만들어졌고, 또 이를 사용하며 생긴 수많은 사연이 모두 묻어 있으니까요. 내가 살아온 세월은 70년도 안 되는데 이 골동품의 나이는 이미 100세를 훌쩍 넘겼으니 얼마나 긴 인고의 시간을 보냈을까요? 소중한 친구처럼 사물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다 보면 마음이 따뜻해져요.” 유수미가 고가구 컬렉터가 된 이유는 스스로 회복하기 위해서다. 23세의 나이에 결혼해 가정주부로서 가족을 돌보며 살아온 그녀는 오랫동안 자신을 돌보지 못해 우울증을 앓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유수미 부부는 10여 년 전 대구의 삶을 정리하고 딸이 살고 있는 경기도 용인으로 이사했다.

벽면을 장식한 함지와 쌀 됫박. 그 옆에는 녹슨 판을 톱으로 자르고 아들에게 선물받은 그릇을 붙여 여성의 몸을 형상화한 작품을 걸었다.

벽면을 장식한 함지와 쌀 됫박. 그 옆에는 녹슨 판을 톱으로 자르고 아들에게 선물받은 그릇을 붙여 여성의 몸을 형상화한 작품을 걸었다.

수납장 문을 열면 소니아 리키엘과 레이 가와쿠보, 프리다 칼로, 아바타 등 자신이 좋아하는 패션 디자이너와 아티스트, 길에서 관찰한 이들을 모티프로 만든 인형들로 가득하다.

수납장 문을 열면 소니아 리키엘과 레이 가와쿠보, 프리다 칼로, 아바타 등 자신이 좋아하는 패션 디자이너와 아티스트, 길에서 관찰한 이들을 모티프로 만든 인형들로 가득하다.

“우울증 치료를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나를 찾기 위해 노력했어요. 과거로 돌아가는 일부터 시작했죠.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게 됐어요. 신혼 시절부터 대구 봉덕동의 골동품 거리를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마음이 힘들 때 골동품 거리를 한 바퀴 돌고 오면 기분이 좋아졌어요. 비싸서 사지는 못하고 구경만 했는데, 생각해 보면 그때 고가구를 조금씩 알기 시작한 것 같아요. 보는 눈을 키운 거죠.” 이제 유수미는 어떤 물건이 조선시대의 것인지,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가구인지 구별할 수 있다. 감탄과 호기심으로 가득 찬 시간이 즐거웠고, 그때 친해진 골동품 가게 사장님과 아직도 연락한다. “이 집에 오고 나서 본격적으로 고가구를 수집했는데, 모두 그분을 통해 구매했어요.” 그렇게 차곡차곡 모은 골동품 컬렉션은 두 개의 방에 전시돼 있다. 방 한쪽 벽면에는 여러 개의 함지와 쌀 됫박을 걸어 유수미의 추억이 담긴 물건과 사진, 바느질 작품을 전시했고, 한쪽에는 베틀에서 천을 짜는 북과 고드래, 목수의 연장인 먹통이 가득 쌓여 있다. 옛 선조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물건에 유수미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더해졌다.

의자 다리를 짧게 자르고, 베개에서 떼어낸 자수를 좌석에 붙여 완성한 작품.

의자 다리를 짧게 자르고, 베개에서 떼어낸 자수를 좌석에 붙여 완성한 작품.

성경의 삼위일체를 표현한 ‘무제’.

성경의 삼위일체를 표현한 ‘무제’.

한옥에서 떼어낸 대청마루를 침대 프레임으로 삼는가 하면, 댕댕이덩굴의 줄기로 만든 소쿠리로 펜던트 조명을, 옹심이 틀로 테이블 조명을 만들었다. 그녀의 창조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나무 그림자를 담은 그림부터 작은 꽃을 수놓은 테이블 매트, 길 가다 주운 나뭇가지로 만든 솟대, 일본 여행 중 구매한 패브릭으로 만든 옷, 양말과 캔버스 천으로 만든 인형까지 모두 그녀의 감각으로 탄생했다. 유수미는 미술이나 디자인 교육을 받은 적 없다. 그녀가 만든 인형 중에는 레이 가와쿠보나 소니아 리키엘 같은 패션 디자이너가 많다. 심지어 실제 꼼 데 가르송의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브로치로 만든 작은 인형이 벽에 걸려 있다. 발렌시아가 드레스를 입고, 크롬 하츠 반지를 착용한 유수미에게 고풍스러운 집 분위기와 상반되는 스타일에 의문을 드러내니 “하나만 좋아하기에는 좋은 것이 너무 많아요!”라는 우문현답을 내놓는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표현하는 수단으로 창작을 이어가는 재야 예술인이다.

유수미가 가꾼 정원은 계절에 따라 다채롭게 변한다. 그녀가 좋아하는 채송화를 포함해 식물을 심고 가꾸며, 한쪽에는 연못도 만들었다.

유수미가 가꾼 정원은 계절에 따라 다채롭게 변한다. 그녀가 좋아하는 채송화를 포함해 식물을 심고 가꾸며, 한쪽에는 연못도 만들었다.

나무 주걱을 모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했다.

나무 주걱을 모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했다.

“삶을 되돌아보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를 인정하고, 귀하게 여기는 일인 것 같아요.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파리에서 패션 공부를 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녀의 시간을 되돌릴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 그의 열정은 어떤 창작이라도 거뜬히 해낼 만큼 뜨겁다. 유수미의 유일한 버킷 리스트는 장 속에 숨겨둔 골동품 오브제와 인형을 선보이는 전시회를 여는 것이다.

상다리가 없어 헐값에 구매한 밥상 상판에 아버지가 남긴 책을 붙여 만든 오브제.

상다리가 없어 헐값에 구매한 밥상 상판에 아버지가 남긴 책을 붙여 만든 오브제.

고드래나 보부상이 사용하던 갈고리, 북, 먹통, 떡살 문양이 가득 모여 있다.

고드래나 보부상이 사용하던 갈고리, 북, 먹통, 떡살 문양이 가득 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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