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과 같이 귀한 보배를 모으다’라는 뜻의 집옥재(集玉齋)는 경복궁 가장 안쪽에 자리한 건물이다. 광화문에서 20여 분 걸어 도착하면 관광객으로 가득한 경복궁 입구의 소음이 아득해진다. 집옥재는 정면에서 볼 때 왼쪽으로 팔우정, 오른쪽으로 협길당과 복도로 연결돼 있다. 총 석 채의 건물로 이뤄진 집옥재의 영역은 청와대와 가까워 2005년까지 출입이 금지됐다. 경복궁관리소는 2016년부터 이곳을 시민을 위한 ‘작은 도서관’으로 단장하고 관람을 허용했는데, 코로나19로 중단됐다가 지난해부터 관람이 재개됐다.
일 년 중 여섯 달, 하절기에만 드러나는 내부는 현재 비치 도서와 안내판 등으로 채워져 있지만 구조나 장식은 지어진 당시 그대로다. 100여 년 전 집옥재는 고종의 집무실 겸 서재였다. 어진을 보관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용도로도 사용됐으나 현판에 새긴 ‘귀한 것들’은 수많은 책이었다. 〈고종시대의 재조명〉을 쓴 역사학자 이태진은 집옥재를 단순한 서재 이상, 서구 열강을 향한 대응의 상징으로 본다. 무능하고 유약한 망국의 군주 혹은 자주독립과 근대화에 힘쓴 황제. 그때나 지금이나 엇갈린 평가의 기로에 섰을 고종은 적어도 이곳에 켜켜이 쌓인 책 틈에서 두려움 대신 비장함을 키운 것 같다. 집옥재의 소유임을 밝히는 장서인(도장)이 찍힌 책은 약 4만 권에 달하는데, 그중 다수는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들여온 중국본 서적이다. 고종은 당시 중국에서 발간되는 서양 관련 신서적을 모으는 데 열의를 보였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체결 후 개항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국가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개화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1880년부터 해외에 수신사와 시찰단을 파견하고 개화 중심의 관부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는 등 자주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는데, 집옥재는 바로 이즈음 1881년에 지어졌다. 본래의 자리는 당시 임금의 침전이 있던 창덕궁 함녕전 인근. 이후 고종이 경복궁으로 돌아오면서 집옥재는 1891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대나무가 둘러싸고 소나무가 우거진 곳, 동으로는 관문각을 바라보고 남으로는 보현당에 접한 곳.” 집옥재 상량문에서 발견된 부지에 대한 설명이다. 당시 경복궁에 일어난 두 차례의 화재를 의식한 탓인지 집옥재는 경복궁 북쪽 숲을 개간해 궁 중심부로부터 멀찍이 세워졌다. 안팎의 모습이 다소 생경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국적 요소가 가미된 탓이다. 경복궁 내 건물 중에는 유일하게 중국식 경산지붕(처마가 없는 맞배지붕)이며, 측면 벽과 후면 벽의 벽돌, 내부 만월창, 팔각형으로 움푹 팬 감입 천장 등은 당시 궁의 전각에서 보기 드문 요소였다.
이로 인해 중국식 건물로 설명되기도 했으나 2015년 발표된 논문 〈경복궁 집옥재의 건축적 특성〉에 따르면 중국풍 의장이 반영된 것일 뿐 공간 구성과 건물을 지탱하는 구조, 난방 및 활기 설비는 전통 건축의 흐름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사소하지만 흥미로운 구석은 용 문양이다. 당시 조선은 중국의 조공국으로서 왕의 상징으로 봉황을 사용했는데, 월대 중앙의 답도(계단 장식)와 감입 천장에 용이 새겨져 있다. 결국 안팎으로 중국풍 요소를 적용한 데는 조선이 다른 국가들과 대등한 반열에 있음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아닐는지. 경운궁을 중심으로 근대적 도시계획이 이뤄지고, 환한 전구 빛이 처음으로 조선의 밤을 밝히기 시작한 그때, 집옥재 역시 신문물 관련 서적의 목록을 완성하며 개화를 위한 밑거름을 마련하고 있었다. 옥처럼 빛나고 단단한 꿈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13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건물 틈 어딘가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