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FCL의 다카하시 유스케가 서울에 펼쳐 보인 100가지 총천연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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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CL의 굴곡진 드레스를 처음 마주했을 때 떠오른 이미지는 도시적인 여성이었다. ‘Clothing For Contemporary Life’의 앞글자를 딴 브랜드 이름처럼 특별히 현대인을 위한 옷을 짓게 된 계기가 궁금한데.
어릴 때부터 나만의 브랜드를 만드는 상상을 줄곧 해왔다. 하지만 학생 신분으로 무턱대고 브랜드를 차려봤자 잘 될 리 만무했기에, 우선 유수의 글로벌 브랜드에서 일을 배워보기로 다짐했다. 처음에는 이세이 미야케에서 3~4년 정도만 일하다가 브랜드를 론칭할 계획이었다. 헌데 옷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이 생각보다 심도 깊고 복잡했던지라, 결과적으로 CFCL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세이 미야케에서 근무하며 맞이한 변곡점 같은 게 있을까?
학생 때만 해도 나만의 미학을 잔뜩 투영한 옷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이세이 미야케와 다년간 일하고 나니, 사회를 위한 옷을 만들어야겠다는 열망이 피어올랐다. 직접적인 계기가 찾아온 건 2013년부터 2019년까지 이세이 미야케 맨에서 디렉터로 근무할 무렵이었다. 당시 패션계에서는 스파 브랜드로 대변되는 패스트 패션의 병폐가 도마 위에 올랐다. 전 세계 인구수보다도 더 많은 옷이 매일 만들어졌다가 그대로 버려지는 셈이었다. 의미 없는 옷들이 난무하는 지금, 단순히 내 미학으로 빚어낸 옷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왕이면 사회를 위한 옷을 만들자는 결심을 하고, 2020년 CFCL을 론칭했다.
「100가지 컬러의 스커트들」 전시가 도쿄에 이어 서울에 상륙했다. CFCL이 서울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대규모 팝업인데, 건축가 엠마누엘 무로와 협업해 가며 이토록 특별한 공간을 준비하게 된 계기가 있나?
공간을 한가득 수놓은 스커트의 정체는 CFCL이 Vol.1 컬렉션부터 꾸준히 선보여온 아이코닉 아이템인 ‘포터리 스커트’다. CFCL 마니아라면 반드시 하나쯤 갖고 있는 아이템이랄까. 패션 디자이너로서 매번 새로운 디자인을 창조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이세탄에서 한차례 팝업을 진행하고 나니 브랜드의 아이코닉한 제품을 신선하게 조명하는 일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임무라는 생각이 들었고, 곧장 건축가 엠마뉴엘 무로에게 의뢰를 했다. 사실 지난 4월에도 서울 10꼬르소꼬모에서 팝업을 한차례 열긴 했지만, 이번에는 단순히 컬렉션을 늘어놓기보다 무언가 새로운 걸 보여주고 싶었다. 현재 한국은 일본 다음으로 가장 큰 CFCL의 고객층이고 나날이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고 있는 만큼, CFCL에서 가장 사랑받는 포터리 스커트를 서울에도 널리 알리게 되어 기쁘다.
앞서 도쿄 이세탄에서 열린 팝업에서는 나선형, 서울에서는 원통형 구조물에 포터리 스커트를 배치했다. 건축에 조예가 깊은 만큼 이번 공간을 준비하면서 특히 어떤 부분에 중점을 뒀나?
이미 일본 고객들 사이에선 CFCL이 인지도가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도쿄 이세탄에서는 제품 자체를 조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서울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단순히 스커트를 쭉 진열하기보다는 CFCL의 아이덴티티를 충분히 소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몇 번씩이나 도면을 수정하고 배치 방식을 고민하며 무로와 끝없는 논의를 거듭했다.

팝업에 들어서자마자 반겨주는 실타래 구조물이 인상적인데.
재활용 폴리에스테르로 만든 입구의 실타래 작품부터 안쪽의 원통형 구조물까지, 친환경 소재를 활용하는 CFCL의 세계관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신경 썼다. 가장 중요하고 어려웠던 부분은 컬러 배치였다. 가령 하나의 컬러 옆에 어떤 컬러를 두는지에 따라 전체적인 구조물의 느낌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CFCL의 옷은 재활용 폴리에스테르로 만들어지는 만큼 발색력이 굉장히 훌륭하기 때문에, 다른 무엇보다도 색감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100가지 컬러 가운데 가장 마음이 가는 단 하나의 컬러를 꼽는다면?
CFCL의 아이코닉 컬러는 단연 하늘색이다. 옛날 중국의 한 황제는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빛을 귀히 여긴 나머지, 이토록 청명한 하늘색을 도자기로 빚어낼 것을 명령했다고 전해진다. 이를 위해 장인들은 높은 온도에서 도자기를 몇 번이고 굽는 과정은 물론, 유약과의 균형까지 면밀히 신경 써야만 했다. 어떻게 보면 하늘색이야말로 당시로써는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였던 셈이다.
플루티드 슬리브리스 톱

플루티드 슬리브리스 톱

플루티드 슬리브리스 톱

플루티드 슬리브리스 톱

CFCL의 옷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단연 건축적이고 구조적인 실루엣이다. CFCL의 옷을 입다 보면 옷보다는 하나의 작품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특별히 영감을 얻은 곳이 있나?
지금 당신이 입고 있는 ‘플루티드 슬리브리스 톱’의 ‘플루티드’는 서양 건축 양식 중에서도 세로로 홈이 새겨진 기둥을 일컫는 단어다. 실제로 구글에 검색해 보면 그리스의 웅장한 신전을 연상케 하는 기둥 이미지를 찾아볼 수 있을 텐데, 바로 여기서 힌트를 얻었다. 또 포터리 스커트 같은 경우 제작 단계에서 핏 앤 플레어 실루엣 같은 유럽식 디테일을 참고했지만, 막상 완성하고 보니 항아리 같은 실루엣이 탄생해 ‘포터리’라는 이름을 붙이게 됐다.

할아버지도 건축가인 만큼 역시 다양한 구조물을 해석하는 시선이 남다른 듯하다. 당신의 뮤즈는 누구인가?
독일의 바우하우스 디자인에서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 화려한 실루엣으로 디자이너의 존재를 강조하기보다는 철저히 생활의 도구로서 기능하려 했기에 자연히 마음이 갔다. 일본 특유의 ‘어나니머스 디자인’ 철학도 무시할 수 없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옷이 바로 CFCL이 지향하는 바다. 지나치게 튀지 않으면서 현대 여성들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그런 옷 말이다.
당신과의 대화에서 유독 존재감을 드러내는 단어는 ‘실용성’이다. 옷에 있어서 실용성만큼이나 중요한 다른 한 가지는?
설렘. CFCL의 니트웨어는 ‘wear’가 아닌 ‘ware’를 쓴다. ‘Ware’는 실버웨어, 소프트웨어처럼 무언가를 담는 용기라는 뜻인 만큼, CFCL의 니트는 착용자의 몸을 감싸는 동시에 그의 생활을 서포트하는 도구로서 기능하고자 한다. 보통 ‘실용성’ 하면 스포츠나 아웃도어 브랜드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옷은 그 이상으로 아름다워야 할 뿐만 아니라, 입는 사람을 고무시킬 줄도 알아야 한다.

설렘이야말로 옷이 지닌 특별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래 어떤 물건의 ‘기능’이란 그 목적이 굉장히 명쾌하고 뚜렷하다. 하지만 옷의 경우 조금 더 넓은 의미가 적용될 여지가 있다. 가령 옷의 효용 중 하나로는 사회적인 기능을 꼽을 수 있겠다. 옷을 입은 나 자신이 마음에 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옷을 통해 타인에게 어떤 식으로 보여지고 싶은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CFCL의 옷을 골라 입은 날은 독특한 쉐입 덕분에 온종일 기분이 경쾌하다. 이런 옷을 짓는 사람이 매일같이 머무는 공간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한데.
번듯한 사무실 사진을 꼭 보여주고 싶은데 아쉽다. 우선 사무실은 총 6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굉장히 널찍하다. 천장도 약 6m에 이를 정도로 높은 편이다. 가구에 있어서는 취향이 뚜렷한지라 비트라와 USM 제품이 빼곡하다. 경리가 도대체 사무실에 이렇게 비싼 가구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묻지만, 내게는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다. 아름다운 디자인은 아름다운 공간에서 탄생하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선보인 Vol.9 컬렉션의 주제는 수작업이었다. 3D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옷을 만드는 당신에게 수작업이란 어떤 의미인가?
아무리 CFCL이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활용해 니트를 만든다지만, 정작 가장 필요한 것은 프로그램을 다루는 사람의 손이다. 원사 염색도 마찬가지다. 보이지 않는 곳곳의 과정에서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수많은 브랜드에서 수작업의 종말을 이야기하지만, 아직까지 기계는 인간의 손을 극복할 수 없다. 그만큼 이번 컬렉션을 통해 수작업에 헌사를 보내고자 했다. 이야기를 나누며 짐작했겠지만 디자인에 있어서 나는 굉장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편이다. 다만 요즘엔 자로 잰 듯 딱딱하게 생각하기보다, 일부러 손부터 움직이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르는 영감을 그대로 작업물로 이어가는 식으로 말이다.

매 시즌 CFCL의 컬렉션에는 시퀸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즘 흥미를 갖고 지켜보는 소재가 있나?
지난 2월, 드디어 나만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기계를 구매했다. 지금까지는 공장을 통해 제품을 제작하다 보니 매번 프로그래밍하는 데 시간이 꽤 소요될 뿐만 아니라, 최소 발주량을 맞추기 위해 판매량을 정확히 예측해야 하는 애로사항이 있었다. 계산을 잘못하면 공장에 피해를 줄 수 있는 만큼 지금까지는 팔릴 만한 것들 위주로 제작을 해왔다. 하지만 드디어 기계를 장만하게 된 덕분에 과감한 도전을 할 수 있게 됐다. 이번 Vol.9 컬렉션에 등장한 프린지 드레스도 새 기계를 들인 후 떠오른 발상에서 출발했다. 프로그래밍으로 프린지를 짠 뒤 손으로 직접 프린지 구멍 사이사이를 통과시키는 방식으로 신기술과 수작업을 접목하게 된 것이다. 같은 원사더라도 직조 방식에 따라 표현 방식이 달라지기도 한다. 지금까지는 재활용 폴리에스테르 소재로 플루티드나 포터리 실루엣을 만들어왔는데, 지금은 또 어떤 새로운 조합을 시도해 볼지 고민하고 있다. 가령 면과 폴리에스테르, 종이와 폴리에스테르, 캐시미어와 실크처럼 말이다. 어떤 조합으로 엮어내는지에 따라 실루엣이 크게 좌우되는 니트의 속성을 십분 활용해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10년간 이세이 미야케에 몸담은 만큼 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계승하고 있는 그의 철학이 있나? 제작 공법이라든지, 옷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들 말이다.
사회를 위해 옷을 만든다는 신념. 사실 ‘Clothing For Contemporary Life’라는 브랜드명에 이미 힌트가 숨어있다. 이세이 미야케는 패션뿐만 아니라 문화, 기술 등 전 분야를 넘나드는 디자인을 선보여온 인물인 만큼 그의 전방위적인 활동 영역 또한 배울 점 중 하나다. 이에 더해 내게 개인적으로 큰 영감을 준 바우하우스나 일본 전통 공예 같은 요소를 현시대에 걸맞도록 새롭게 보여주는 일도 하나의 숙제다.

젊은 디자이너로서 오늘날 패션계에서 벌어지는 일들 가운데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딱히 없다. 패션을 즐기는 방식은 결국 사람마다 즐기는 방식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삶을 위한 옷’이라는 브랜드 이름처럼 다카하시 유스케가 그리는 이상적인 현대인의 스타일은 어떤 모습인가?
결국 옷은 사람이 입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만큼 옷과 사람은 떼려야 떼놓을 수 없는 존재다. 한 사람이 입은 옷은 그 사람의 생각과 삶의 태도를 투영하고, 나아가 사회를 향해 특정한 메시지를 던진다. 어릴 땐 나 또한 자신감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옷을 일종의 갑옷처럼 내세워 내가 강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 했다. 이를테면 대기업의 명함처럼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은 무한대에 가까울 정도로 다채롭고 자유로워졌다. AI를 비롯한 각종 과학 기술도 비상한 발전을 이룬 만큼, 개인이 삶을 풍요롭게 가꿀 기회 또한 많아졌다. 이런 측면에서 고민해 보면 현대사회에 들어서며 옷은 개인에게 더욱 중요해졌지만, 동시에 외려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결국엔 똑같은 옷을 입더라도 이런 일련의 고민을 한 번이라도 거치는 사람이 내겐 조금 더 근사하게 느껴진다.

100 colors of skirts emmanuelle moureaux x CFCL Supported by ECOPET®

장소 서울 강남구 언주로 164길 33 1층
일시 2024.10.31. — 2024.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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