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앗아간 ‘1인 1차’의 꿈… 히틀러가 탄생시킨 독일 국민차 폭스바겐 비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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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렴하면서도 실용적인 면과 귀여운 외형으로 오랜 시간 큰 사랑을 받았던 폭스바겐 대표 모델 비틀. 미국에서는 자유와 평화를 외친 히피족들을 상징하는 차로 유명했던 이 차는 사실 평화와 거리가 먼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의 손에서 탄생했습니다.

독재자 히틀러, 국가 통제를 위한 국민차를 꿈꾸다.

20세기 초반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선 국민의 차량 소유율이 높지 않았습니다. 당시 경제 상황을 고려했을 때 차는 고가의 상품이었고 소수의 부자만이 소유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컸기 때문입니다. 독재자로 집권하게 된 히틀러는 각 가정에 자가용을 보급하는 “국민차 계획”을 세웁니다. 히틀러는 도로 및 철도 인프라 개선 등 교통 정책에 관심이 컸는데 경제를 살리고 국가 통제력을 강화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는 노동자 계층에 차를 보급하면 경제적으로 동기부여가 되며 유럽에 오가기도 편해지고 대중에게 일체감이 형성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히틀러는 자동차 보급을 위해 저렴하면서도 실용적인 차가 개발될 필요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는 유능한 기계공학자이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포르쉐와 폭스바겐의 창업자인 ‘페르디난트 포르셰’에게 ‘국민차’ 개발을 의뢰합니다.

포르셰, 히틀러를 만나 폭스바겐(국민차)을 만들다.

히틀러가 요구한 국민차의 조건은 이러했습니다.

1. 일반적인 독일 가정에 맞춰 성인 2명과 어린이 3명을 태울 수 있을 것
2. 100km/h로 독일 고속도로(아우토반)를 달릴 수 있을 것
3. 가격이 1000 라이히스마르크 이하인 저렴하고 튼튼한 차를 만들 것

당시 자동차 가격으로는 턱없이 낮은 수준이었으나 특출난 공학자 페르티난트 포르셰는 가격이 990 라이히스마르크인 차를 개발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이 차가 훗날의 폭스바겐 비틀입니다. 딱정벌레같은 비틀의 디자인을 미대 지망생이었던 히틀러가 휴지에 즉석으로 그려서 했다는 일화도 있으나 실은 체코 자동차 회사 ‘타트라’에서 생산되던 자동차를 거의 베낀 수준입니다. 히틀러가 유세를 다닐 때 체코에서 타트라 차량을 유심히 보았고 포르셰에게 “이런 차가 아우토반에서 달려야 한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1937년 국민차 생산을 위해 폭스바겐 주식회사라는 자동차 제조 기업이 창립됩니다. 폭스바겐(Volkswagen)은 독일어로 국민을 뜻하는 ‘Volk’와 자동차를 뜻하는 ‘Wagen’의 합성어로 말 그대로 ‘국민차’라는 뜻입니다.

‘우표를 모으면 차를 드려요’ 전쟁에 스러진 기만

5 라이히스마르크 짜리 우표를 198개 모으면 차를 살 수 있었다.5 라이히스마르크 짜리 우표를 198개 모으면 차를 살 수 있었다.

폭스바겐이라는 이름처럼 비틀이 국민차로서 가정에 보급될 수 있었을까요? 당시 독일 국민이 이 차를 받기 위해서 저축했던 돈은 딱정벌레 모양의 귀여운 차가 아닌 전쟁의 폐허로 돌아왔습니다.

나치 정부는 차를 구매하고자 하는 국민들에게 50장의 우표를 넣을 수 있는 4장의 카드가 들은 ‘저축 책자’를 제공했습니다. 우표 한 장당 5 라이히스마르크였기 때문에 990 라이히스마르크 짜리 자동차를 사기 위해 198개의 우표를 모으면 됐습니다. 정부는 일주일에 1장씩 우표를 모으라고 장려했고 198개의 우표를 모으려면 약 4년을 저축하면 됐습니다.

일주일에 우표 한 장은 큰 부담이 되지 않았기에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이 계획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1939년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차를 받겠다는 소망으로 저축했던 돈은 폭스바겐 공장에서 군용차량을 제작하는 데에 모두 쓰이게 됩니다. 이때 폭스바겐에서 제작된 군용차량 역시 히틀러의 의뢰를 받고 페르디난트 포르셰가 제작한 다목적 차량 ‘퀴벨바겐’입니다.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우표 안에 담긴 소망과 약속은 실현될 수 없는 꿈이 됩니다. ‘내 차 마련’의 꿈이 간접적으로 전쟁 자금 지원에 쓰이는 기만으로 끝난 것입니다.

전범기업이 된 폭스바겐과 미국에서 자유의 상징이 된 비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페르디난트 포르셰는 전범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힙니다. 히틀러의 측근으로 전쟁의 비극을 만드는 데에 일조했기 때문입니다. 폭스바겐 역시 군수품을 생산해 납품한 전범기업이 됩니다. 이대로 역사로 사라질 뻔했던 폭스바겐 비틀의 전신은 의외로 영국군에 의해 되살아나게 됩니다. 영국 군정부가 영국군에 납품할 차량을 생산할 것을 요구하면서 버려졌던 공장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히틀러와 포르셰가 국민차를 표방하며 제작했던 차는 ‘폭스바겐 타입 1’이라는 이름으로 영국 군정부 하에 생산 재개됐고 전쟁의 피해가 서서히 복구되며 민간 시장에도 활발히 판매됩니다.

이후 폭스바겐 비틀이라는 이름을 얻고 미국 시장에 진출한 이 차는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습니다. 특히 자유로움을 추구하던 히피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데 크고 과시적인 차를 몰던 미국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으로 아담하고 트렌디한 비틀이 인기를 끌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히피의 상징 중 하나로 비틀을 꼽는 사람도 많습니다.

독재자의 손에서 탄생하여 국민차로 보급하겠다는 꿈은 기만으로 끝났으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살아남아 자유와 반항이 상징이 된 ‘폭스바겐 비틀’의 이야기는 모순적이면서도 흥미롭습니다. 오랜 기간 대중의 차로서 큰 사랑을 받았던 비틀은 2019년 시리즈가 단종되며 오랜 역사를 끝맺었습니다.

EV라운지 에디터 evloung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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