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지도와 도로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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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필요없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유용한 것들

Marc Kleen, Unsplash
Marc Kleen, Unsplash

내비게이션 없는 운전을 상상할 수 있을까? 어느날 인터넷이 먹통 된다면 우리는 목적지를 무사히 찾아갈 수 있을까? 가끔 공중에 떠 있는 도로표지판을 보며 생각해본다. 시동 버튼을 누르면 저절로 화면에 표시되는 내비게이션 지도 덕분에 우리는 이제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누군가 길을 잃었다면, 행방을 알 수 없다면 그건 진짜 심각한 일이 벌어진 거다.

비록 하늘의 별자리를 보며 방향을 가늠하던 낭만의 시절을 살진 않았어도 오랫동안 내 차 도어포켓에는 항상 5만분의 1 지도가 있었다. 연애 시기와 신혼, 내 아이들이 부모가 가자는대로 따라 다니던 시절까지는 그랬다. 그때는 길눈이 밝았다. 심지어 태양 고도를 가늠하며 동서남북 방향을 읽을 수도 있었다. 어느 지역을 떠올리자면 머리 속에 지형이 조감도처럼 훤했다. 특별한 재능이 아니다. 운전자라면 그때는 누구라도 그랬다.  지도와 도로표지판만으로 길을 찾던 시절.

인공위성 GPS와 스마트폰 위치기반 서비스가 등장하며 종이책 지도는 운명을 다했다. 지도뿐 아니다. 도로표지판 역시 유용성을 잃었다. 직진하면 인천이고 우회전하면 김포라는 식의 표지판이 운전 중 얼마나 쓸모있을까. 완전히 무용하지는 않겠지. 만일의 경우라는 것이 있고 아는 길도 확실하게 알려주니 왠지 안심도 되니까. 도로에 아무 표지판이 없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상상이긴 하다.

도로표지판에 대해 조금 알아보았다. 우리나라 도로표지판의 색상은 녹색과 청색, 갈색, 그리고 노란색이다. 학교 주변이나 보행자 보호구역은 노란색이다. 갈색은 관광지 표시다. 녹색은 전국 도로망에, 청색은 시,군 도심 지역에 사용한다. 지역도로와 도심도로를 구별하기 위해서다. 청색은 휴게소와 주차장 표시에도 사용한다. 녹색과 청색은 안전과 안심을 상징하며, 녹색은 빛 반사율이 높아 밤에도 전조등 불빛이 잘 반사돼 표지판 내용이 눈에 쉽게 들어온다. 글자의 서체도 중요하다. 가독성보다는 판독성을 고려한다. 가독성은 많은 양의 글자가 쉽게 읽히는 정도를, 판독성이란 글자 하나하나가 눈에 잘 띄는 것을 가리킨다. 운전자가 빠르게 달리면서도 표지판 글자를 순식간에 인식해야 하기 때문에 판독성 높은 서체를 사용한다. 현재 우리나라 도로교통표지판에는 한길체를 쓴다.

띄어쓰기는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다만 오독 여지가 있는 것은 예외다. 일례로 ‘동시흥분기점’이 그러하다. 경기 시흥시 목감동과 논곡동에 걸쳐 있는 수원문산고속도로의 4번 분기점이자 제3경인고속화도로 교차점은 이름이 동시흥분기점(東始興分岐點)이다. 사람들이 자꾸 ‘동시 흥분 기점’으로 얄궂게 띄어 읽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동시흥 분기점’으로 바꿨다. 아내 성씨는 양씨다. 장난스레 양양(梁孃)이라 부르곤 하는데, 언젠가 동해안 여행을 가며 홍천에서 인제 방향 국도를 달리다 재미난 표지판을 발견했다. ‘양양 인제 신남’이라 적혀 있었다. 오랜만에 떠난 여행으로 들뜬 아내를 놀리며 “당신 이제 신났다네.” 깔깔 웃은 기억이 있다. 포켓몬고 게임이 속초에서 잘 된다 하여 속초 관광객이 별안간 느는 바람에 ‘속초 인제 신남’ 표지판이 새삼 유머가 되기도 했다. 가로로 읽어야 하는 ‘발안 정남’ 표지판은 ‘발정 안남’으로 굳이 세로로 읽어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오른 적도 있다.

지도와 도로표지판은 둘 다 상상력과 모험심을 자극한다. 어딘가의 지명을 표지판에서 읽을 때 그 도시를 떠올린다. 천천히 여유롭게 여행하는 상상. 언젠가 서울로 향하는 경부고속도로에서 ‘아시안하이웨이’ 표지판을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다. 일본-한국-중국-베트남-태국-인도-터키로 이어지는 장대한 길이란다. 자동차를 타고 이 길 끝까지 달릴 날은 언제일까. 운전 중, 순식간에 지나가는 표지판 지명을 판독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글·이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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