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dict
저 세상 SUV. 애스턴 마틴을 구현한 SUV가 아니라 DBX 그 자체로 평가받아야 한다
GOOD
– 출력이 뿜어져 나올 때 가속 쾌감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
– 육중한 덩치를 잊게 만들 정도로 기민한 동적 제어 시스템
BAD
– 큰 차 but 좁은 실내
– 얼마나 비싼 차인지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Competitor
– 람보르기니 우루스 : 훨씬 더욱 무척 더 비싸 보인다
– 페라리 푸로산궤 : 더 강렬한 희소가치와 세계 최고 브랜드 파워
자동차는 한 국가의 기간산업이자 지역의 고유 특성과 국민적 감성이 담긴 하나의 문화산물이다. 이러한 점에서 영국 자동차는 아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영국 그리고 애스턴 마틴
영국은 산업 혁명 이래 기계 제조와 발전된 공학기술을 필두로 자동차 산업의 최적지로 손꼽혔었다. 무엇보다 숙련된 노동자가 많았고 국민의 소득 수준도 높아 고급차 위주의 잠재적 수요가 큰 곳으로 유명했다. 게다가 세계 도처에 식민지가 많아 해외 시장 확보가 용이할 뿐 아니라 영국에서 이름을 떨친 자동차는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았다. 물론 영국 자동차 산업이 몰락하기 시작한 20세기 초 이전까지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들을 겨냥한 벤틀리, 롤스로이스 등은 전통적인 제조 방식으로 여전히 살아 남았고, 그 가운데 영국 전통의 스포츠카 브랜드 애스턴 마틴은 가장 맥라렌과 더불어 영국식 전통을 유지하며 살아남았다.
그동안 영국을 비롯한 해외국가에서 취재해 본 나의 경험을 비춰 이야기를 하자면, 영국 자동차 메이커들의 특징은 대략 3가지로 손꼽힌다. 우선 수제작 방식으로 영국에선 만든다는 점을 매우 강조한다. 대부분 유럽 고급차 메이커들도 비슷하다. 하지만 심지어 영국인에 의해 제조했다는 점까지 강조하진 않는다. 두번째, 섀시와 캐빈 그리고 엔진을 제작하는 주체가 대부분 다르다. 세번째 구성원들이 영국인이라는 점에 대해 자긍심이 대단히 높다.
이외에도 영국은 F1 월드 챔피언십이 처음 열린 해인 1950년대부터 빠짐없이 캘린더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모터스포츠에 집중한다. 심지어 가장 빠를 뿐 아니라 데이터 집약적 레이스라고 불리는 F1의 모든 데이터는 영국에서 데이터를 보관한다. 또 전세계 거의 모든 브랜드의 각종 자동차 수치 정보를 제공하는 JATO 본부도 영국에 있다.
자동차 산업 몰락의 대표지역인 영국. 하지만 영국 자동차를 아직까지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가운데 고급차 분야 특히 애스턴 마틴은 이태리 페라리에 맞먹는 슈퍼카 영역에서 또 하나의 맹주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애스턴 마틴은 1913년 런던에서 로버트 뱀포드(Robert Bamford)와 라이오넬 마틴(Lionel Martin)이 시작한 회사다. 이 회사가 2015년 발표한 애스턴 마틴 DBX 콘셉트카는 당시로선 다소 의외의 전략이었지만 포르쉐 카이엔을 필두로 스포츠카 브랜드들이 앞다투어 SUV를 내놓은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더 좋은 스포츠카를 만들기 위한 캐시카우 목적을 띈 크로스오버가 등장한 것으로 말이다.
애스턴 마틴 그리고 DBX 707
그리고 이번에 시승한 애스턴 마틴 DBX는 퍼포먼스를 더 느낄 수 있는 DBX 707이다. 이때 707은 출력을 뜻하는 것으로 PS 마력으로 환산하면 697마력이다. 영국에선 제동마력을 자주 활용하는 탓에 PS 수치를 쓰는 경우는 드물지만 707이라는 숫자의 어감을 차명으로 채택하기 위한 방편으로 엿보인다. DBX의 의미는 세계 2차 대전 애스턴 마틴의 자금난을 구제해 준 데이비드 브라운(David Brown)의 이니셜 과 크로스오버 ‘X’를 뜻한다.
애스턴 마틴 DBX 707은 대형 SUV로 전장 5,040mm 전폭 1,995mm 높이 1,680mm로 낮고 넓은 형태로 스포츠카 프로포션을 지향한다. 엔진룸에는 4.0L V8에 터보 2개로 공기를 불어넣어 네바퀴를 모두 굴린다. 카본 세라믹 디스크로 6점식 알루미늄 캘리퍼를 장착했고, 9단 습식 클러치로 동력을 분배한다.
차의 외관은 전형적인 애스턴 마틴. 그릴 형태나 전후 램프 구성은 밴티지의 그것을 그대로 차용했다. 여기에 애스턴 마틴 DBX 707이라는 고성능 맛을 더 가미하기 위해 전후 디퓨저를 더욱 더 과격하게 다듬어 얼핏 보더라도 운전자의 각오를 다지게 만든다. 특히 덕 테일(Duck Tail)이라 불리며 추켜 세운 트렁크 리드는 이 차의 백미다.
인테리어는 외관의 공격성을 잠재운 채 사뭇 얌전하다. 브라운 톤 컬러의 소가죽을 인테리어 주 소재로 삼아 최상의 고급감을 자아낸 것은 물론 헤드라이너와 선바이저 도어 캐치 등 손과 눈이 머무는 곳 모두 허투루 지나가지 않는다. 섬세한 바느질과 매끈하게 다듬은 가죽과 알루미늄 그리고 탄소섬유제로 꾸민 센터콘솔부까지. 소재를 아끼는 차원이 아닌 고급차로서 목적에만 충실한 만듦새가 돋보였다. 물론 볼륨 조절 버튼이 두 곳에나 있고, 애매한 인포테인먼트 UI는 약간 엇나간 듯했다. 육중한 덩치에 비해 어깨 공간은 비좁아 좋게 말하면 안락하지만 솔직히 갑갑했다.
애스턴 마틴 DBX 707 트렁크 공간은 638L다. 현대차 팰리세이드가 509L인 것을 감안하면 적지 않다. 트렁크를 열면 차고를 스스로 낮추는 등 사용성에 있어서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애스턴 마틴은 럭셔리 그랜드 투어링카 브랜드를 지향하는 탓에 대체로 배기량이 작은 엔진들이 없다. 우리가 시승한 애스턴 마틴 DBX 707 역시 2개의 터보로 과급한 V8 4.0L 엔진이다. GT카 분야에서 애스턴 마틴은 특별하다. 1962년 오토스포트 매거진 애스턴 마틴 DB4GT에 대해 이렇게 시승소감을 남겼다. “애스턴 마틴은 가장 흠모하는 그랜드 투어링 자동차 명단에서 반드시 최상위에 있을 것이다(It must be placed high on the list of the world’s most desirable grand touring cars)”라고 말했다.
시승은 그야말로 상쾌한 경험이었다. 기존에 자동차키를 삽입해 눌렀던 시동방식에서 버튼식 시동 방식으로 바뀐 것은 애스턴 마틴만의 방식을 버린 듯해 다소 아쉬운 마음이다. 하지만 시동을 걸자 우렁찬 배기음이 다시 긴장감에 고삐를 채운다. 스티어링 휠은 부드러운 가죽의 촉감이 또한 산뜻하다. 스티어링 휠 너머에는 알루미늄 단조로 다듬은 패들 시프터가 시선을 멈추가 만든다. 계기판은 화려하기 보다는 정보전달에만 집중했다.
부드럽게 가속페달에 힘을 주자 육중한 덩치를 가뿐하게 밀어 제친다. 보닛 위 에어 덕트가 도로와 어울려 사뭇 진지한 느낌을 부추킨다. 이내 쭉 뻗은 도로에서 차속을 올리는 과정은 대단히 조밀하면서도 풍부한 힘을 느끼게 해준다. 상당한 고속까지 어느 한 구간에 힘이 처지는 일이 없다. 무려 91kg.m이라는 막대한 토크는 피크 순간을 확인할 겨를이 없이 전 구간에 걸쳐 차체를 다스린다.
이 차의 최고속도 310km/h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가속페달에 발을 더 깊고 오래 밟는 용기만 있다면 가능하리라. 무엇보다 차내에 울려퍼지는 배기 사운드는 황홀하기 그지없다. 애스턴 마틴 수석 엔지니어 맷 베커(Matt Becker)는 DBX 배기음색에 대해 ‘듣기 좋고 훈훈한 소리(Nice & Warm)’라고 표현했다. 그런 탓에 드라이브 모드를 ‘스포츠+’까지 돌려도 음색은 대체로 일관되게 유지했다.
코너구간에서는 유럽식 스포츠카의 전형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 정확히 자로 잰듯한 움직임 그 자체다. 상당한 속도에서 코너를 찌를 듯이 밀어 넣어도 차체 거동에 아무런 어색함이 없다. 코너 꼭지점(Apex) 이후 가속 시점에서 가속 페달을 짓누르자 본색을 드러낸다. 몸이 시트에 푹 파묻힐 정도로 압도적인 가속감에 정신이 아득할 정도. 애스턴 마틴 DRX 707 서스펜션은 전륜이 독립식 더블 위시본, 후륜이 멀티링크 타입인데다 에어 서스펜션 시스템을 두어 노면을 놓치는 일이 적다.
특히 에어 서스펜션 덕분에 애스턴 마틴과 어색할 법한 ‘터레인 모드’도 차고를 높여 적절하게 대응한다. 고속으로 주행 시에는 또한 차고를 낮춰 스포츠 주행에 걸맞도록 변한다. 몇 일간의 시승으로 살펴본 연비는 복합 연비 리터당 7km를 상회하는 8km/L에 육박했다.
저속은 물론 고속에서 정숙함도 의외였다. 갈비뼈를 옥죄는 듯 꽉끼는 시트 착좌감은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했지만 진동과 소음은 차단은 상당한 수준을 발휘한다. 무엇보다 짙은 브라운 톤의 가죽으로 실내 전체를 덮고 헤드라이너와 슬라이드 커버까지 알칸타라로 둘러 사용성은 물론 고급감까지 여타의 모델들과는 크게 다른 면모를 풍긴다. 굳이 혼 커버 위 애스턴 마틴 엠블럼이 아닐지라도 곳곳에 정체성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애스턴 마틴 DBX 707은 람보르기니 우라칸, 페라리 푸로산궤 등 럭셔리 스포츠카 메이커들이 속속 합류하는 크로스오버 모델들 가운데에서도 분명히 차별화하는 애스턴 마틴만의 포인트가 살아있었다.
111년간 한번도 놓치지 않았던 애스턴 마틴이라는 브랜드십은 DBX 707에 와서 더 현대화되어 극대화한 모습을 발휘한다. 이 차급의 소비자들은 ‘좋은 차’가 아니라 ‘사고 싶은 차’를 원하기 마련이다. 애스턴 마틴 DBX 707이라면 그런 대접을 받기에 충분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