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도로 수놓던 ‘붉은 질주’… 그 강렬함이 아직 선명하다[류청희의 젠틀맨 드라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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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 슈퍼카 계보의 시발점으로 40년 전에 첫선을 보인 GTO.페라리 슈퍼카 계보의 시발점으로 40년 전에 첫선을 보인 GTO.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슈퍼카. 스포츠카 중에서도 특별한 차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슈퍼카의 정의나 기준에 관한 의견은 늘 분분하다. ‘특별하다’라는 말 자체가 추상적 개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슈퍼카라고 이야기하지만 애호가들에게는 평범한 스포츠카로 받아들여지는 차들도 많다. 아무리 평범해도 스포츠카 역시 일반적인 승용차와 비교하면 특별하기 마련이다. 즉 슈퍼카와 그렇지 않은 차를 나누는 기준은 늘 상대적이고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슈퍼카로 인정받는 차들은 존재한다. 보편적 기준을 넘어서는 절대적 고성능과 더불어 심미적 만족감을 주는 아름다운 모습, 탄생 배경을 비롯한 매력적인 스토리,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는 희소성 같은 요소를 두루 갖춘 차들이 그렇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당대 일반 스포츠카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차들은 늘 있었다.

슈퍼카라는 표현은 이미 1920년대부터 쓰였고, 현대적 슈퍼카의 기준점이 된 람보르기니 미우라가 1966년에 나온 이후로 지금까지 슈퍼카라 불리는 차들은 사라진 적이 없다. 다만 시간의 흐름, 기술의 발전과 함께 그 기준이 점점 더 높아졌을 뿐이다. 즉 슈퍼카는 스포츠카 생태계의 상위 포식자 자리에 있는 소수의 차로 환경이 바뀌는 가운데에도 경쟁을 거치며 권위와 능력을 인정받아 그 자리를 차지하는 차들인 셈이다.

출시 당시 양산되고 있던 308과 비슷하지만 설계는 크게 달랐다.출시 당시 양산되고 있던 308과 비슷하지만 설계는 크게 달랐다.

스포츠카 전문 브랜드인 페라리가 만든 차들도 그렇다. 페라리는 설립 이후로 경주차와 스포츠카만 만들었고, 대부분 일반 승용차를 뛰어넘는 성능과 매력이 있었다. 페라리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슈퍼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페라리 스스로 슈퍼카로 분류하는 차들은 75년 넘는 역사를 통틀어 단 여섯 모델뿐이다. 그 차들은 모두 철저하게 한정된 수량만 만들고, 특별한 설계와 기술을 바탕으로 압도적 성능을 내고, 그러면서도 번호판을 달고 일반 도로를 달릴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그 여섯 모델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이 올해로 데뷔 40년을 맞는다. 바로 페라리 GTO다.

GTO는 1984년 3월에 열린 제네바 모터쇼에서 처음 공개됐다. 페라리가 발표한 공식 모델 이름은 GTO고, 실제로 차체 뒤에 붙은 모델 이름 엠블럼도 간단히 GTO라는 글자로만 이뤄져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이 차를 288 GTO라고 부르는데 이는 페라리가 1962년에 내놓은 250 GTO와 구분하기 위해 자동차 애호가들이 썼던 표현이 그대로 굳어진 것이다. 페라리가 차 이름에 GTO라는 표현을 쓴 것은 2010년에 나온 599 GTO를 포함해 모두 세 모델뿐이다.

288이라는 숫자는 엔진 배기량인 2.8L에서 가져온 28과 엔진 기통 수를 뜻하는 8을 붙여 쓴 것으로 당시 보편적인 페라리의 모델 이름 명명법을 따른 것이기도 하다.

경주차를 목표로 개발된 만큼 실내는 간결했지만 고급 소재로 꾸몄다.경주차를 목표로 개발된 만큼 실내는 간결했지만 고급 소재로 꾸몄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차라는 사실은 이름 그 자체가 증명한다. GTO는 이탈리아어 ‘그란 투리스모 오몰로가토’의 머리글자다. 이는 국제 공인 자동차 경주의 스포츠카 부문 인증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뜻으로 페라리가 GTO의 개발 목표를 그룹 B 랠리 경주에 출전할 경주차로 삼았음을 나타낸다. 그룹 B 경주에 출전할 수 있는 경주차로 인증받을 수 있는 기준은 2인승 일반 도로용 스포츠카로 최소 200대 이상 생산돼야 했고, 엔진 배기량에 따라 차의 최소 무게를 규정했을 뿐 성능에는 제한을 두지 않았다. 말 그대로 ‘일반 도로를 달릴 수 있는 경주차’의 개념을 실현한 차인 셈이다.

페라리는 이에 맞춰 GTO를 최소 기준인 200대만 생산할 계획이었다. 원래 목표는 그랬지만 개발 과정에서 페라리는 GTO의 성격을 바꿔 그룹 B 경주에는 출전하지 않고 일반 도로용 스포츠카로 한정 생산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1982년에 시작된 그룹 B 랠리 경주가 지나친 성능 경쟁으로 치명적 사고가 잇따른 탓에 불과 4년 만에 폐지됐으니 페라리의 빠른 노선 전환은 결과적으로 GTO를 더 특별한 차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더 많은 차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GTO의 디자인은 당시 판매되고 있던 페라리의 V8 엔진 모델인 308과 비슷하면서도 훨씬 더 우람하고 강력한 분위기였다. 몇몇 부품을 308과 공유하기는 했지만 차의 구조는 대부분 GTO 전용으로 설계됐고, 엔진도 탑승 공간 뒤쪽에 가로로 배치된 308과 달리 세로 방향으로 배치됐다. 근육질 느낌이 물씬한 바퀴 주변과 더불어 날카롭게 솟구친 차체 일체형 스포일러와 뒷바퀴 뒤쪽 공기 배출구는 20여 년 전에 처음으로 GTO라는 이름이 쓰인 250 GTO를 연상케 했다.

페라리가 처음으로 두 개의 터보 차저를 단 엔진은 400마력의 최고 출력을 냈다. RM Sotheby’s 제공페라리가 처음으로 두 개의 터보 차저를 단 엔진은 400마력의 최고 출력을 냈다. RM Sotheby’s 제공
시속 305㎞에 이르는 최고 속도를 표시할 수 있도록 시속 320㎞까지 표시된 계기판.시속 305㎞에 이르는 최고 속도를 표시할 수 있도록 시속 320㎞까지 표시된 계기판.

GTO는 당시 페라리 엠블럼을 달고 일반 도로를 달릴 수 있는 스포츠카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빠른 차였다. 페라리 승용차용 엔진 가운데 처음으로 두 개의 터보차저를 달아 최고 출력이 400마력에 이르렀고,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가속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4.9초였다. 지금은 그보다 더 높은 출력을 내고 훨씬 더 빨리 가속할 수 있는 차들도 많지만 1980년대 중반에 그 정도 성능을 낼 수 있는 승용차는 거의 없었다. 계기판 바늘이 시속 305㎞를 가리킬 때까지 가속을 이어 나갈 수 있는 차도 마찬가지였다. 차체 곳곳에는 유리섬유, 케블라, 탄소섬유 등 가벼운 첨단 소재가 쓰여 차의 성능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줬다.

수요는 예상을 훨씬 웃돌아 1984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공개되기 전에 이미 주문 대수가 계획했던 생산량을 넘어섰다. 넘치는 수요에 1986년에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마라넬로 공장을 떠난 GTO는 모두 272대에 이르렀다. 차체 색은 페라리 모터스포츠를 상징하는 빨간색 중 하나인 로소 코르사뿐이었다. 출시 당시 기본값은 8만3400달러였다. 당시 환율로 약 6720만 원인데 지금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약 2억6000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그러나 지난해 미국에서 열린 한 경매에서 우리 돈으로 53억 원이 넘는 396만5000달러에 낙찰되는 등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GTO에서 시작한 페라리 슈퍼카 계보는 이후 F40, F50, 엔초 페라리, 라페라리로 이어졌다. 모두 한정 생산됐지만 그 가운데 생산량이 가장 적은 모델이 GTO였다. 나아가 GTO는 1980년대 중반부터 치열해진 슈퍼카 경쟁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GTO의 뒤를 이어 나온 엔초 페라리의 유작 F40, 16년간 이어진 람보르기니 쿤타치 발전의 정점인 LP5000S 콰트로발볼레, GTO처럼 그룹 B 경주차로 기획됐다가 일반 도로용 승용차가 된 포르셰 959 등이 대표적이다.

이후 성능과 스타일 면에서 자동차 업체들의 경쟁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와 더불어 슈퍼카의 기준점도 점점 더 높아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40년 전에 등장한 페라리 GTO는 슈퍼카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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