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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화사한 가을이 꼬리를 보인다. 고즈넉한 옛집에 들어 계절을 떠나 보내자. 옛 이야기 흔적 좇으며 사색을 즐기기에, 만추의 서정 가득 품고 하룻밤 묵기에 어울리는 고택들이 많다. 앞마당을 휘적휘적 걸어도 좋다. 일상의 복잡함을 잊어버리기에 이만한 곳도 없어 보인다. 한국관광공사가 ‘이야기가 있는 고택’을 늦가을에 가보라고 추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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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남양주 여유당
여유당은 조선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이 나고 자란 곳이다. 원래의 생가는 1925년 대홍수로 떠내려갔다. 지금의 가람은 1986년 다시 세워졌다. 사랑채와 안채로 이뤄진 소박한 모양새가 다산의 성품을 닮았다.
다산은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고향으로 내려와 사랑채에 여유당(與猶堂)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여유는 ‘조심하고 경계하며 살라’는 뜻이다. 조심히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이듬해인 1801년부터 18년 동안 전남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된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곳에 머물며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의 저서를 정리했다. 뒤편 언덕에 ‘정약용선생묘’가 있고 언덕 아래에는 그가 쓴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 있다.
여유당이 있는 정약용유적지 건너편에는 실학박물관이 있다. 다산은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 기념 인물이자 조선을 대표하는 실학자다. 5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으며 정치와 과학, 경제, 의학, 회화 등 다양한 분야에 업적을 남겼다. 정조가 수원 화성을 축성할 때는 거중기와 녹로 등 창의적인 기구를 설계해 공사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고 백성의 수고를 덜었다. 이곳과 인접한 다산생태공원은 팔당호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반려동물과 산책도 가능하다. 레트로 감성이 물씬 풍기는 능내역도 지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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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논산 명재고택
명재고택은 평생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와 후대 교육에 전념한 조선 대학자 명재 윤증(1629~1714)의 집이다. 먼발치에서 얼핏 보아도 선비의 기품이 느껴진다.
명재고택은 안채, 광채(곳간채), 사랑채, 사당으로 이뤄졌다. 보존 상태가 양호한 조선 양반 주택의 가치에 실용성과 과학적 원리가 돋보이는 한옥으로 꼽힌다. 찬찬히 살피는 재미가 있다. 미닫이와 여닫이 기능을 합친 안고지기를 활용한 사랑채, 일조량과 바람의 이동을 고려한 안채와 광채 배치 등 곳곳에서 선조의 지혜가 돋보인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 뒤에 내외 벽을 설치하고 벽 아래 틈을 둬 안채 대청에서 방문객의 신발을 보고 안주인이 대비할 수 있도록 한 점도 눈에 띈다.
특히 창호가 많은 사랑채가 백미다. ‘경치를 빌린다’는 차경(借景)의 매력을 엿볼 수 있다. 곳곳에 있는 창이 액자가 되어 시간과 계절에 따라 다른 풍경화를 담아낸다. 소유하는 그림 대신 자연의 경치를 잠시 빌려 즐기는 한옥의 미학을 새삼 실감한다. 누마루 역시 창호 개폐에 따라 분위기가 크게 달라진다. 문이 닫힌 누마루는 아늑한 방이지만, 문을 여는 순간 정자처럼 변신한다. 여기에 인공 연못, 장독대, 고목 등이 운치를 더한다.
명재고택은 후손이 거주하고 있어 지정된 장소 외 출입을 금한다. 사랑채와 안채 등에서 한옥 스테이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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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민애(愛)집
인천시민애(愛)집은 인천항 인근 자유공원 남쪽에 있는 복합 문화 공간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사업가가 살던 저택이다. 인천시가 이를 매입해 한옥 형태 건축물을 올리고 시장 관사로 활용했다. 이후 인천시청이 이전해 인천역사자료관으로 사용됐다. 2021년 7월 재정비를 마치고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개방됐다.
인천시민애집은 크게 세 공간으로 나뉜다. ‘1883모던하우스’는 과거 시장 관사를 개조한 근대식 한옥이다. 일본식 저택이 있었을 때 모습을 간직한 ‘제물포정원’이 그 주변을 감싼다. 경비동은 인천항과 개항로 주변을 조망하는 ‘역사전망대’로 이용하고, 내부는 전시관 역할을 한다.
인천시민애집 주변으로 개항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 많다. 개항기 서양인이 사교 모임을 하던 옛 제물포구락부(인천유형문화재) 건물이 대표적이다. 대불호텔전시관에는 한국 최초 서양식 호텔에 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전국 각지에서 활동한 작가들의 근대문학 작품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한국근대문학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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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함양 일두고택
일두고택은 조선 전기 성리학의 대가 일두 정여창(1450~1504)의 가옥이다. 정여창은 동방오현에 오른 유학자로 평가받는다. 지금 남은 고택은 정여창이 세상을 뜨고 약 1세기가 지나 건축했다.
입구 솟을대문에 정여창 가문이 나라에서 받은 정려 5개가 있다. 사랑채에는 정여창의 후손이 사는 집이란 사실을 말해주는 문헌세가(文獻世家) 편액이 걸렸고, 그 뒤 방문 위에는 충효절의(忠孝節義)라고 커다랗게 쓴 종이가 붙었다. 누마루에서는 마당에 조성한 석가산(石假山) 풍경이 보인다. 이곳 천장 모서리에도 탁청재(濯淸齋) 편액이 걸렸다. ‘탁한 마음을 깨끗이 씻는 집’이란 뜻이다. 사랑채 옆으로 난 일각문을 지나면 여성의 공간인 안채로 연결되고, 곡간과 정여창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차례로 나온다.
일두고택에서 함양 남계서원이 가깝다. 정여창이 세상을 떠나고 그를 기리는 지역 선비들이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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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구례 운조루
운조루(雲鳥樓)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란 의미다. 1776년 류이주가 낙안군수를 지낼 때 지었는데 이름처럼 너그럽고 포근한 고택이다. 250년 가까이 잘 보존된 외관은 물론, 고택에 스민 정신이 면면히 전해진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류씨 집안은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새긴 뒤주에 쌀을 채워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이 가져갈 수 있게 했다. 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당, 연지로 구성된 고택은 규모가 제법 크다 .그러나 화려한 장식 없이 소박하다.
부드러운 산세가 한눈에 들어오는 사랑채 누마루는 운조루의 백미로 문인들이 풍류를 즐긴 곳이다. 수분실(隨分室)이라는 현판을 걸어 절제 있는 삶을 지향하고 굴뚝은 낮게 만들어 이웃을 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