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노란 산수화를 기다리며, 겨울 구례에 가다
투어코리아 조회수

[투어코리아=이민성 기자] 봄이면 구례는 노랗게 물든다. 하지만 그 노란 산수유꽃을 기다리는 시간, 구례의 겨울은 고요하다. 지리산 자락은 소리를 낮추고, 섬진강은 속도를 늦춘다. 꽃이 피기 전의 마을에는 기대가 머물고, 풍경은 군더더기를 덜어낸 채 본래의 얼굴을 드러낸다. 봄의 노란 산수유꽃을 기다리는 지금, 구례는 화려함 대신 고요라는 울림으로 여행자를 맞는다.
천년 고찰과 전통 고택, 바위에 기대 선 암자와 넓게 열린 산 능선까지. 겨울의 구례는 ‘보는 여행’이 아니라 머무르며 느끼는 여행이다. 꽃이 피기 전의 시간 속에서, 구례는 가장 구례다운 계절을 건넨다.
물이 숨었다는 전설의 절, 천은사
구례군 광의면에 자리한 천은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에 창건되어 화엄사와 함께 지리산 3대 사찰로 손꼽힌다. 임진왜란 이후 여러 차례 중건의 역사를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다.

본래는 이슬처럼 맑은 샘물이 있어 감로사라 불렸으나, 샘물을 지키던 구렁이를 죽인 후 샘이 솟아나지 않자 샘이 숨었다는 의미로 천은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잦은 화재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조선 4대 명필 중 한 명인 원교 이광사의 글씨가 걸린 후 재화가 끊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새벽녘 고요함 속에서는 일주문 현판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신비로운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겨울 구례의 문을 여는 장소 다.
국보가 머무는 산사, 화엄사
마산면에 위치한 화엄사는 544년(신라 진흥왕 5)에 연기대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의상대사가 중수하며 화엄경 전래의 모태를 이루었고, 임진왜란으로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으나 벽암대사와 계파의 노력으로 다시 웅장한 모습을 갖추었다.

대개의 사찰과 달리 각황전이 중심을 이루는 이곳에는 국보 제12호인 석등, 국보 제35호 사사자삼층석탑, 국보 제67호 각황전 등 다수의 국보와 보물이 산사의 깊이를 더한다. 겨울에는 눈 덮인 전각과 석탑들이 고즈넉한 풍경을 선사한다. 사진보다 현장이 훨씬 강한 곳.
구름 속에 숨은 집, 운조루
운조루 고택은 조선시대 상류층 주택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한 국가유산이다.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라는 의미를 가진 사랑채의 이름에서 고택의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묻어난다. 류이주가 7년여에 걸쳐 건축한 이곳은 ㅡ자형 행랑채, ㄷ자형 안채, ㅜ자형 사랑채 등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공간의 위계에 따라 단 차이를 둔 배치가 돋보인다. 특히 다른 고택에서는 보기 드문 경사로를 두어 가마가 큰 사랑채까지 들어설 수 있도록 한 점이 건축학적 흥미를 더한다. 천천히 둘러볼수록 더 좋다.

바위에 박힌 듯한 암자, 사성암
구례군 문척면 오산 꼭대기, 오산 꼭대기, 바위 사이에 얹힌 약사전 ‘사성암’. 아래로는 섬진강과 구례읍, 멀리 지리산 능선이 펼쳐진다. 사성암은 원래 오산암이라 불렸으며, 연기조사가 처음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원효대사, 도선국사, 진각국사, 의상대사 네 명의 고승이 수도했다고 하여 사성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높이 20m에 이르는 바위 사이에 박힌 듯한 약사전과 바위와 계단으로 이어진 건물들이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사전 암벽에 새겨진 마애여래입상은 원효대사가 손톱으로 새겼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사성암까지는 마을버스를 이용하여 오를 수 있으며, 겨울의 맑은 공기 속에서 경치를 감상하기 좋다.

지리산의 부드러운 얼굴, 노고단
지리산국립공원의 한 봉우리인 노고단은 광대하게 펼쳐진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 중 하나이다. 부드러운 산의 실루엣은 포근함을 자아내며, 아름다운 계곡과 섬진강의 풍광이 어우러져 지리산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이곳은 반달가슴곰을 비롯한 다양한 생명들을 품어 키워내는 생명의 산이기도 하다. 노고단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 자체로 독특한 경관을 이룬다. 겨울철에는 많은 눈이 내리거나 급작스러운 일기 변화로 탐방이 제한될 수 있으니 사전 확인 필수. 방문 전 국립공원공단 홈페이지를 통해 탐방 계획을 확인하는 것이 현명하다. 날씨가 허락된 날의 노고단은, 한 장면으로 오래 남는다.

우리밀의 온기, 목월빵집
구례읍에 자리한 목월빵집은 전량 우리밀을 사용하여 빵을 굽는 로컬 베이커리이다. 구례에서 주로 생산되는 금강밀을 비롯해 백강밀, 앉은키밀, 구례호밀 등 다양한 우리밀 품종을 활용한다. 특히 아버지가 직접 농사 지은 밀과 팥을 사용하고, 구례 할머님들이 직접 팥빵을 만드는 등 지역 상생의 가치를 실천한다. 모든 빵에는 계란과 우유가 들어가지 않으며, 설탕과 버터는 소량만 사용하여 건강한 한 끼를 제공한다. 천연효모로 자연 발효한 식사빵 전문점으로, 고소한 빵 냄새가 매장 가득 퍼져 겨울날 따뜻한 위안을 전한다.
지역의 온기가 모이는 구례 5일시장
겨울 국밥, 제철 나물, 손맛 반찬. 관광지보다 생활이 가까운 곳에서 여행은 오래 남는다. 잠시 들러도 체류시간이 늘어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