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혼잡함을 벗어나” 프랑스 릴의 건축 유산과 역사적 랜드마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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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는 세계 3위 방문객 도시다. 관광객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 7월 프랑스 정책 홍보부 웹사이트에 따르면, 전 세계 관광객 95%가 세계 국토 5% 미만에 집중된다. 관광객 활동 80%가 국토 20%에 몰린다.

한국인 많은 파리에 지쳤다면, 북부로 눈을 돌려보자. 릴은 북부 프랑스의 ‘파리’다. 벨기에와 인접해 벨기에와 프랑스가 섞인 오묘한 분위기가 있다.

TGV로 파리에서 단 50분. 릴의 존재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프랑스 호텔 체인 아코르가 첫 발을 내딛은 곳이자, 2024년 파리 올림픽 핸드볼 경기의 무대였다. 파리, 마르세유, 리옹에 이어 프랑스 제4의 도시로, 34.8㎢(10,527평)의 면적을 자랑한다.

프랑스관광청도 릴에 주목하고 있다. 색다른 여행지로 적극 추천 중이다. 여행자들의 반응도 뜨겁다. 파리에서 당일치기로 가능한 거리, TGV의 뛰어난 접근성 덕에 릴을 찾는 발걸음이 늘고 있다.

북부 프랑스를 대표하는 말이 있다. ‘북쪽 사람들은 밖에 없는 태양을 마음속에 가졌다(Les gens du Nord ont dans le cœur le soleil qu’ils n’ont pas dehors)’ 북부 사람들 마음은 따뜻하고 밝다는 뜻이다. 영화 ‘알로, 슈티(Bienvenue chez les Ch’tis)’에서도 언급돼 유명해졌다. 오버투어리즘(과잉 관광)에 시달리는 곳을 벗어나 진정한 프랑스를 만날 기회다.

릴의 역사는 이름만큼이나 독특하다. ‘릴(Lille)’이란 이름은 ‘섬’을 말한다. 11세기경 이 지역 지형을 그대로 반영한다. 당시 릴은 거의 섬과 다름없는 형태였고, 물이 사방으로 흘렀다. 늪지대와 같은 약한 지반은 도시 발전을 더디게 만들었다. 역설적으로 지형적 특성이 릴 역사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8-9세기 바이킹 침략 시기, 릴은 천혜의 방어 지역으로 활용됐다.

도시 성벽은 기원후 1000년경에야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릴이 도시로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시기와 맞물린다. 11세기부터 릴은 플랑드르 백작령 일부로 편입됐고 백작들의 적극 개발 정책에 힘입어 빠르게 성장했다.

태양왕 루이 14세의 17세기 정복으로 프랑스 영토가 된 릴. 릴은 프랑스와 벨기에 문화의 독특한 융합을 보여준다. 특징은 건축에서도 뚜렷하다. 붉은 벽돌 건물과 계단형 지붕 등 플랑드르 특유의 건축 양식이 눈에 띈다.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탄생한 릴의 주요 건축 유산과 랜드마크 4곳을 소개한다.

팔레 리우르 (Palais Rihour)

팔레 리우르는 중세의 영광을 간직한 고딕 건축 걸작이다. 15세기 중반, 부르고뉴 공작 필립 르 봉의 야심 찬 프로젝트로 시작된 이 궁전은 20년에 걸친 공사 끝에 완성했다. 팔레 리우르 역사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습지대 위에 지어진 탓에 건물의 안정성이 위협받았고, 여러 차례의 화재와 재건을 거쳤다.

1664년, 릴 시가 이 건물을 매입하면서 팔레 리우르는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시청으로 변신한 궁전은 18세기에 루이 15세를 맞이했다. 하지만 왕은 불편함을 느꼈다고 하니, 당시 궁전 편의시설이 그리 훌륭하지 않았나 보다. 19세기 중반, 팔레 리우르는 대대적인 변신을 꾀했다. 대부분이 철거되고 네오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탄생했지만, 15세기의 예배당만큼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현재 팔레 리우르는 릴의 관광 중심지다. 1층에 위치한 도시 관광 안내소는 여행자들 필수 코스다. 특히 옛 예배당은 임시 전시회 장소로 변신했다. 팔레 리우르를 찾는다면, 건물 외관 고딕 양식 요소들을 놓치지 말자. 뾰족한 아치와 화려한 석조 장식은 중세 장인들의 뛰어난 기술을 증명한다. 매일 개방돼 있어 언제든 방문할 수 있다.

그랑 팔라스 (Grand Palace)

‘작은 마을’이 부각되는 시대다. 대형 쇼핑몰 전성기는 저물어간다. 실내 몰링의 지루함과 온라인 쇼핑의 부상으로 소비 중심 쇼핑몰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국제쇼핑센터협의회(ICSC)에 따르면, 2022년 미국 내 쇼핑몰 공실률은 10.3%로 2010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쇼핑몰은 변화를 모색 중이다. 소비 공간에서 벗어나 갤러리, 정원, 팝업 등을 도입해 작은 마을을 연상케 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광장의 매력은 여전하다. 해외를 가게 되면 광장을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많은 이들이 광장에 앉아 도시의 풍경과 행인들을 감상하며 여유를 만끽한다.

그랑 팔라스는 릴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광장이다. 광장 중앙에 우뚝 선 ‘여신의 기둥’은 릴의 자부심과 역사를 대변한다. 1845년에 세워진 이 기둥은 1792년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맞서 싸운 릴 시민들의 용기를 기린다. 여신상 표정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무섭게 생긴 얼굴이 당시 시장 부인의 모습을 본떴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여신상이 들고 있는 막대기는 사실 대포에 불을 지피는 용도의 횃불이다. 10일간 오스트리아 점령 당시 릴 시민의 저항을 상징한다. 프랑스 혁명 시기의 이 사건은 릴 사람들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줬다. 50년 후 이 기념비를 세우는 계기가 된다. 그랑 팔라스 주변은 릴의 건축 양식 변천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건축물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특히 구 증권거래소는 17세기 플랑드르 르네상스 양식의 걸작이다.

구 증권거래소 (La Vielle Bourse)

릴의 구 증권거래소는 도시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풍요를 동시에 보여준다. 1652년부터 1653년 사이에 지어진 이 건물은 줄리앙 데스트레의 설계로 지어졌다. 외관은 플랑드르 르네상스 양식이다. 구 증권거래소 구조는 하나의 작은 마을을 연상케 한다. 24개 동일한 건물이 사각형 모양으로 배치됐다. 24채 연립 주택은 임대를 통해 시청의 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했다. 1층은 상가, 2층과 3층은 주거 공간으로 활용한 구조는 당시 흔한 수익 모델이었다.

중앙 안뜰은 과거 상인들의 거래 장소였다. 지금은 다양한 문화 활동이 펼쳐진다. 여전히 활기차다. 안뜰에서는 책시장, 꽃시장, 체스 게임을 하는 사람 등 다양한 모습이 보였다.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개방한다. 건물 외관 화려한 장식은 시선을 사로잡는다. 건물 상단에 자리 잡은 상업의 신은 역사적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노트르담 드 라 트레이 대성당 (Cathédrale Notre-Dame de la Treille)

노트르담 드 라 트레이 대성당은 145년 역사를 간직한 독특한 건축물이다. 1854년 착공해 1999년에야 완공된 이 성당은 고딕과 현대가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역사적 배경 때문에 노트르담 드 라 트레이 대성당은 다른 고딕 성당과는 다른 독특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초기의 화려한 고딕 양식부터 현대적이고 간결한 디자인까지, 시대 변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대성당 외관은 언뜻 보기에 단순하다. 가까이 다가가면 그 속에 숨겨진 놀라운 디테일이 드러난다. 폴란드 출신의 프랑스 귀화 예술가 라디슬라스 키즈노가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는 빛과 색의 향연을 선사한다. 파사드는 110개 포르투갈산 대리석 석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석판 두께가 고작 28mm에 불과하다. 이 얇은 대리석을 통과하는 빛은 성당 내부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실, 대성당이 처음 개관했을 때 릴 시민들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대성당의 현대적인 디자인과 기존 도시 경관과 부조화를 지적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곳은 점차 릴의 상징적인 랜드마크로 자리잡게 됐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정교한 조각이 가득한 구역부터, 자재 부족으로 미완성된 채 남겨진 부분까지, 각 시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노트르담 드 라 트레이 대성당의 역사는 순탄치 않았다. 1905년 프랑스 정교분리법 제정으로 국가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됐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공사가 지연됐지만 끈질긴 의지와 열정으로 145년 만에 완공을 이뤘다.

릴(프랑스)=권효정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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