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5월 29일,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 박사는 한 권의 오래된 책을 발견한다.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줄여서 직지심체요절 또는 직지로 알려진 책이다. 어두컴컴한 책장에서 빛으로 나온 이 책은 인쇄술의 역사를 한 번에 바꿨다. 박병선 박사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42행성서’보다 78년이 앞선 1377년에 간행된 현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라는 것을 밝혔다. 2022년 5월 29일 직지가 세상에 나온 지 50주년을 맞는다. 직지의 고장 청주에서 한국 인쇄 문화를 살펴보는 여행을 다녀왔다.
1. 청주 고인쇄박물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직지대로 713
서울역에서 KTX로 44분, 오송역에서 무궁화호로 6분, 청주역에서 시내버스로 30분, 다시 도보로 20분 걸려 도착한 곳은 청주 고인쇄박물관이다. 가는 길에는 2016년 직지코리아 국제페스티벌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조형물 ‘직지 파빌리온’이, 박물관 앞 계단에는 화분을 쌓아 만든 ‘직지’라는 글씨가 보인다. 입구에는 문화해설사와 박물관을 단체로 견학하러 온 초등학생 친구들이 우렁찬 목소리를 내며 반겼다.
박물관 입구 안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01호 임인호 금속활자장이 밀랍주조법으로 복원한 직지심체요절 상·하권 조형물이 크게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그 밀랍주조법을 통한 복원 과정이 영상으로 나온다. 우리는 흔히 직지를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직지는 현재 남아있는 금속활자 기록물 중에서 최초다. 벽 옆에는 상정고금예문, 보물 제758호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제1653호 자비도량참법집해 등 여러 고서들이 있다. 이 중 상정고금예문과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각각 1234년, 1239년 금속활자로 만들어져 직지보다 앞선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목판본이다.
고인쇄박물관에는 필사본, 목판본, 밀랍주조법 복원본 등 직지의 여러 판본을 전시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현재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전시된 직지 하권 영인본이 눈에 띈다. 원래 상·하권이 있었으나 현재는 하권만 전해진다. 직지는 백운 경한스님이 부처님과 명망 높은 스님들의 말씀 중에서 선의 요체를 깨닫는데 필요한 내용만을 발췌해 엮은 책이다. 1900년 주한 프랑스공사인 콜랭 드 플랑시가 길거리에서 직지를 수집해 프랑스로 가져갔고 파리 만국박람회 한국관에도 전시됐다. 1911년 앙리 베베르가 드루오 경매에서 180프랑에 직지를 구입했는데 그는 책의 가치를 몰랐다고 한다. 1952년 유언으로 파리 국립도서관에 기증돼 20년을 잠들어 있었다.
고인쇄박물관에는 귀여운 캐릭터들이 금속활자를 주조하는 모습을 담은 모형도 있다. 벽에 그려진 주조 과정도 글이 아니라 그림으로 그려놓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중간으로 넘어가면 직지 홀로그램과 스컬프쳐 아트를 통해 더 친숙하게 직지를 접근할 수 있다. 큰 모니터 안에 있는 E-book은 직지가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던 사람들을 위해 직지의 모든 것을 담았다.
이밖에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기념해 2004년부터 수상한 세계직지상, 직지로 시작된 고려와 조선의 인쇄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2층에는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서양의 인쇄문화를 다룬 전시관이 있어 말로만 듣던 구텐베르크의 42행성서도 직지와 함께 볼 수 있다. 전시 마지막에는 직지에 있는 활자를 조합해 인증샷을 찍을 수 있는 활자 조판 증강현실 체험공간이 있다. 벤치 뒤 하얀 벽에는 직지심체요절에 있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이 전시관에 딱 어울리는 문구를 하나 발견했다. ‘지혜는 바다보다 넓네.’
2. 흥덕사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직지대로 713
청주 고인쇄박물관을 나오면 바로 왼쪽에 산책로와 함께 법당이 하나 보인다. 바로 이곳이 직지심체요절을 간행한 곳으로 알려진 사적 제315호 흥덕사지다. 9세기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흥덕사의 옛터다. 1372년 백운 경한스님이 이곳에서 직지 발간을 시작해 1377년 편찬을 완료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여러 건물이 있는 절과 달리 금당과 탑만 있고 주변에는 나무 그늘로 덮인 산책로가 있다. 과연 이것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흥덕사지는 직지심체요절의 가치를 세계에 드높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2년 박병선 박사가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직지를 발견해 알렸지만 서양 학계는 여전히 근거 미비를 들어 무시했다. 박병선 박사는 타지에서 홀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임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1985년 청주 운천동 866번지에서 택지개발사업을 진행하던 도중 발굴조사에서 새로운 절터를 발견했다.
절터에서는 초석과 와편 등이 출토됐는데, ‘갑인오월일서원부흥덕사금구일좌’라는 문구가 새겨진 청동금구와 청동불기를 발견하면서 이곳이 직지를 편찬한 흥덕사지임을 입증하게 됐다. 1986년 흥덕사지는 사적 제315호로 지정됐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금당과 3층 석탑을 복원했고 회랑지와 강당지는 주춧돌을 살려 잔디를 심어 정비했다. 간행처가 확실히 입증되면서 직지도 자연스럽게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받게 됐다. 이 흥덕사지 옆에 1992년 고인쇄박물관을 건립하면서 이곳은 한국 인쇄문화의 메카로 떠올랐다.
3. 근현대인쇄전시관
충북 청주시 흥덕구 흥덕로 104
고인쇄박물관, 근현대인쇄전시관, 금속활자전수교육관이 모여 있는 흥덕로 옆 보도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보도 밑에 나무, 식물 그리고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데 그 안에 화살표와 함께 1,372, 1,377, 1,440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골똘히 생각하다가 고인쇄박물관을 갔다 오고 나서 비밀을 알게 됐다. 1372는 직지 편찬을 시작한 연도, 1377는 직지가 간행된 연도를 의미한다. 1440는 구텐베르그의 42행성서가 간행된 연도다. 동그라미는 그에 맞게 지름이 1372mm, 1377mm, 1440mm다. 직지에 대한 청주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2014년 개관한 근현대인쇄전시관은 고인쇄박물관에서 불과 120m, 도보 1분 거리에 있다. 고인쇄박물관이 고대부터 근세까지 이어지는 한국 인쇄 문화를 다뤘다면 근현대인쇄전시관은 말 그대로 근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인쇄 문화를 다룬 곳이다. 두 박물관이 코스처럼 이어진다. 고인쇄박물관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내용이 가득하다. 현대를 넘어 첨단 산업과 결합한 인쇄기술의 미래를 보여주는 곳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바벨탑 1446’이라는 거대한 조형물이 있다. 컴퓨터에 밀려 버려지는 활자를 모아 하늘로 솟구치는 탑을 세웠다. 세계의 속담과 고대에서 현대까지의 인류의 문자들을 활자로 형상화해 조립한 것이다. 1층 전시실 맨 앞에는 모형으로 보는 근대 이후 인쇄사 연표가 나오는데 조사시찰단, 박문국 등 국사나 근현대사 시간에 들어봤을 이름이 보인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황성신문과 주시경 선생이 편찬한 조선어 문법도 전시하고 있다.
근현대 납활자 인쇄 전시관에서는 조상들이 많은 시간과 정성을 기울여 만들었던 금속활자를 기계로 제작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자모조각기, 활자주조기, 활판교정기, 활판인쇄기 등을 통해 부모님 세대가 사용하던 교과서가 탄생했다. 타자기로 대표되던 인쇄 과정은 점차 간편화되면서 드디어 우리가 쓰는 프린터까지 등장한다. 인쇄 혁명이라는 혁신으로 3D 프린터가 나왔고 이제는 종이가 필요 없는 플렉서블 디스플레이나 AR까지 발전했다. 짧은 시간에 급속도로 발전한 근현대 인쇄 과정을 알 수 있다.
글= 서주훈 여행+ 인턴 기자
감수= 홍지연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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