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무원 갑질 논란 등 관련 사고가 잇따라 터지고 있다. 지난 5년간 전체 퇴직 공무원 중 신규임용 공무원 퇴직 비율은 2019년 17.1%에서 2023년 23.7%로 지속해서 증가했다.
임용 기간이 5년이 채 되지 않은 퇴직자 수는 2019년 대비 두 배 넘게 늘었다. 공직사회 중추인 공무원이 받는 압박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말이다.
최근 한 공무원과 업무 관련 대화를 나누던 중 경기도 공무원들 사이에서 머리 식히기 좋은 휴식처로 소문난 곳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일보다 사람이 우선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경기도 공무원들의 숨은 휴식처 화성 ‘융건릉’과 ‘용주사’의 매력을 여행플러스가 다녀와 소개한다.
01 “무덤이 휴식처라고?” 경기도 공무원들도 머리 식히러 찾는 융릉과 건릉 |
경기도 공무원들이 머리를 식히러 간다는 첫 번째 장소는 다름 아닌 무덤이다. 오싹하고 기괴하기만 한 헛소리같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정말이다. 그 목적지는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화성 융건릉’.
세계문화유산인 융건릉은 연간 35만 명에 이르는 방문객이 찾아온다. 융건릉에서는 어느 쪽으로 발걸음을 향하든 쭉 뻗은 소나무와 참나무를 빼곡히 조경한 산책길을 걸을 수 있다. 융건릉뿐만 아니라 조선왕릉 어디서든 울창한 나무와 마주할 수 있다.
한마디로 문득 피톤치드를 만끽할 수 있는 삼림욕이 그립다면 가까운 조선왕릉을 찾아가면 된다는 말이다. 왕의 무덤은 국가 유산으로 겨울에는 장대로 나무 위에 쌓인 눈을 일일이 털어낼 정도로 철저히 관리한다.
융건릉은 장조(사도세자)와 왕비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무덤인 융릉(隆陵)과 근처에 붙어있는 장조의 아들이자 조선 제22대 왕 정조와 부인 효의왕후 김씨 무덤인 건릉(健陵)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융릉과 건릉 모두 두 능 전부 두 사람 이상을 하나의 봉분에 매장한 합장릉 형식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합장릉은 조선왕릉 전체 42기 중 8기만 있을 정도로 희소하다.
입구를 기준으로 오른쪽이 융릉이고 왼쪽이 건릉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융릉을 먼저 들르는 편이 관람에 용이하다. 탐방 전 융건릉 입구 바로 앞에 있는 역사문화관은 방문은 필수다. 역사문화관에서 무료 역사 해설을 듣고 가면 한층 더 많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역사문화관과 붙어 있는 융릉의 ‘재실’은 대부분의 관광객이 무심코 지나치는 곳인데 이곳에는 보물이 잠들어 있다. 재실에서 볼 수 있는 보물은 높이가 4m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개비자나무로 역사·문화적 가치가 크다고 판단해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융릉을 둘러보기 전 이곳의 간략한 역사를 훑자면 원래 사도세자의 무덤은 화성이 아닌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에 있었다. 이 얘기를 하려면 신분에 따라 무덤을 지칭하는 용어가 능(陵), 원(園), 묘(墓)로 달라진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통상 왕과 왕후 무덤은 능, 왕세자와 왕세자빈은 원, 그 외는 묘라 부른다.
사도세자는 세상을 떠날 당시 왕세자 신분에서 폐위했기에 배봉산에 있던 그의 무덤은 수은묘라 불렸다.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는 즉위 후 아버지의 무덤을 현재 자리로 옮기고 이름을 현륭원으로 바꾼다.
이 과정에서 정조는 능의 하계에 세워 무덤을 보호하는 의미인 돌 조각 석인상을 현륭원 앞에 세운다. 석인상은 통상 국상(國喪) 때 활용하며 특히 무석인은 군대를 다스리는 등 생전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석물이라는 점에서 당시 정조의 시도는 굉장히 파격적이었다. 여기에 규모가 큰 무덤을 만들 때 봉분이 무너지지 않도록 두르는 병풍석까지 세워 효심을 표했다. 당시 현륭원은 원의 이름으로 능의 형태를 한 유일무이한 무덤이었다.
1800년 정조도 세상을 떠나자 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 동쪽 언덕에 그의 능인 ‘건릉’을 조성했다. 이후 1821 정조의 부인 효의황후가 세상을 떠나고 합장을 위해 건릉을 개봉했는데 부장품 상태가 좋지 못했다. 이에 풍수 논란이 일어 건릉을 현재의 자리로 천장해 온 뒤 효의황후를 합장했다.
이후 대한제국 선포 이후인 1899년에 이르러서야 사도세자를 황제로 추존하며 원을 능으로 격상했다. 융릉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묘에서 원을 거쳐 능으로 올라갔다. 능에 이르기까지 걸린 기간만 무려 137년이다.
왕의 능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관문이 있다. 융릉을 향할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곳은 원형연못 ‘곤신지’다. 조선왕릉 못 대부분은 각진 모양인데 이곳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으로 보여 둥글게 조성했다는 후문이다.
곤신지를 지나면 문자 그대로 붉은색을 칠한 ‘홍살문’이 나온다. 홍살문은 출입의 기능보다 상징성을 보여주는 문(門)으로 예부터 이 문 앞에서는 지체 높은 사람도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고 전해진다.
홍살문 뒤로는 조선왕릉 진입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얇은 돌인 박석을 깔아 만든 향어로(香御路)가 펼쳐진다. 향어로는 제향 시 향과 측문을 들고 들어갈 때 쓰는 길 ‘향로’와 임금이 걷는 길 ‘어로’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방문객들은 향로가 아닌 어로로 걸어야 하는데 이때 잠시나마 임금의 무게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향어로가 끝나는 지점에서는 꼿꼿이 서 있는 정자각과 마주할 수 있다. 봉분 바로 아래에 있는 조선 왕릉 정자각은 능에서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중심 건물로 그 모양이 고무래 정(丁)자와 비슷해 정자각(丁字閣)이라고 부른다.
정자각에 다가가면 비로소 융릉의 특이점을 눈치챌 수 있다. 대개 조선왕릉은 능, 정자각, 홍살문을 일직선상에 배치한다.
이와 달리 융릉은 정자각과 능이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비껴 있다. 이와 관련한 정확한 연유가 밝혀진 바는 없으나 ‘뒤주 속에 갇혀 죽은 비운의 사도세자인데 그의 무덤 문까지 막지 말라’는 정조의 어명이 있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또 왕의 무덤 앞에서는 예를 갖춰야 하기에 정자각에서 일어선 채는 능을 볼 수 없다. 허리를 숙여 낮은 자세로 올려다봐야지만 비로소 능을 온전히 눈에 담을 수 있는 점도 재밌다.
융릉에서 반대편으로 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숲길을 따라가면 건릉에 다다른다. 건릉 역시 수복방, 정자각, 비각, 홍살문 등 능의 기본 구성은 같다. 다만 능 조성 시기와 배경이 다른 만큼 무석인이나 문석인 등 석물의 개수와 형태가 확연히 다르다.
현재는 보호를 위해 능을 오를 수 없어 사실상 일반 관람객은 석물을 가까이서 볼 수 없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홈페이지에서 각 능의 석물 외관을 확인할 수 있다.
융건릉 관계자는 “가끔 능에 오르려는 분들이 있는데 보호받는 국가 유산으로 함부로 올라갈 수 없는 곳이다”며 “또 이곳에서 요즘 유행하는 건강 운동인 맨발 걷기를 하시는 방문객도 있는데 국가 유산을 아끼는 마음으로 지양해 주시길 바란다”고 밝혔다.
융건릉 운영시간은 2~5월과 9~10월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6~8월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 30분, 11~1월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로 월별로 달라진다.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에는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융건릉을 전부 돌아보려면 1시간 30분가량이 걸린다.
화성 융건릉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02 “박지성도 다녀갔다” 온전히 나에 집중할 수 있는 사찰, 용주사 |
융건릉에서 ‘쉼’을 느꼈다면 근처에 있는 사찰 용주사까지 들러 보길 권한다. 용주사는 융건릉에서 대중교통으로 10분 거리에 있다. 불교 신자인 축구계의 전설 박지성 선수가 즐겨 찾은 절로도 유명하다.
용주사는 융릉과 건릉의 원찰(願刹)로 고려시대에 소실한 신라시대 갈양사라는 절터에 지어진 절이다. 사도세자의 현륭원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질 때 정조의 명에 의해 함께 창건했으며 당대 최고 승려 장인이 건축에 참여했다. 원찰은 창건주의 소원을 빌거나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이다.
용주사에는 수많은 국가 보물이 잠들어있다. 1964년 국보로 지정한 용주사 동종을 비롯해 보물로 지정한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 경기도 유형문화재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화, 상량문, 금동향로 등 역사적 가치가 큰 문화재를 이곳에서 감상할 수 있다.
용주사에 들어가려면 비교적 최근인 2000년대에 세워진 천왕문(天王門)을 지나야 한다. 동방을 다스리는 지국천왕 등 우락부락하게 조각한 사천왕상이 방문객을 호쾌하게 맞이한다.
사천왕의 시야에서 벗어나면 융건릉에서 봤던 ‘홍살문’이 또다시 등장한다. 본래 홍살문은 사찰이 아닌 궁전·관아(官衙)·능(陵)·묘(廟)·원(園) 등 앞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문이다. 용주사는 창건 목적 자체가 장조와 헌경황후의 위패를 모시고 제를 지내기 위한 능침 사찰이라 홍살문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홍살문을 지나면 좌측에 ‘불설부모은중경판’ 등 유물을 전시한 효행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뒤로는 용주사의 거대한 대문 삼문(三門)이 있다. 삼문은 보통 대궐이나 관청 앞에 세우는 문이다. 궁궐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건축양식을 사용해 원찰의 격을 높였다.
삼문에는 문자 그대로 드나들 수 있는 세 개 문이 있는데 그중 중앙 문은 과거 임금만이 사용했던 문으로 최근까지 닫혀 있었다. 최근 바뀐 주지 스님의 뜻에 따라 2022년부터 이 문을 개방했고 방문객은 임금의 기분을 느끼며 중앙 문을 드나들 수 있다.
잠시 임금에 빙의해 삼문을 위엄 있게 박차고 나오면 높은 사다리꼴 주춧돌이 매력적인 누각 천보루가 나타난다. 천보루 역시 궁궐이나 관아에서 자주 볼 법한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정면으로는 누각 통행을 금하고 양옆에 출입문을 만든 점은 창경궁 숭문당과 흡사하다.
천보루의 사다리꼴 주춧돌 너머로 보이는 기품 있는 건물이 대웅보전이다. 18세기 불교 건축물의 특징이 뚜렷이 살아있는 대웅보전은 용주사의 핵심 불전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중앙에 떡하니 걸려있는 후불탱화가 방문객을 압도한다. 후불탱화는 석가불, 좌우에 약사불, 아미타불을 배치하고 주변에 여러 보살 등을 그린 불화 형식이다. 이곳에서는 2002년 그려진 감로탱화도 찾아볼 수 있는데 당시 한·일 월드컵을 기념하는 의미로 우측 상단에 축구공을 그려 넣은 점이 재밌다.
대웅보전 바깥에 있는 용주사 동종은 국보 제120호로 자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종 몸체 앞뒤로 삼존상 등을 뛰어난 조각 기법으로 새겨 고려 종 중에서도 걸작으로 손꼽힌다.
용주사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호성전에는 추존 장조와 헌경황후 그리고 정조와 효의황후 네 사람의 위패를 모셔놓았다. 호성전은 2020년 누전으로 인한 화재로 전소했으나 다시 복원했다. 용주사는 신자의 위패를 봉안해 주는데 한 불자는 “역대 조선 왕의 위패가 모셔진 곳에 봉안해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게 참 영광이다”며 그 특별함을 강조했다.
뚜렷한 개성의 불상 30여 개를 볼 수 있는 지장전도 그냥 지나치면 섭섭하다. 마음의 준비 없이 지장전에 들어갔다가는 심장이 쪼그라들 수도 있다. 입구 양쪽에 한 손에는 주먹 쥔 손을 높이 치켜들고 다른 손에는 방망이를 든 채 눈을 부라리고 있는 금강역사상이 있기 때문.
중앙에는 황금빛 옷을 입은 지장전 묵조지장보살좌상이 인자한 얼굴로 앉아 오가는 이를 맞고 있다. 또 양옆으로는 염라대왕·송제대왕·진광대왕 등 시왕상이 늘어서 있는데 그 기세에 걸맞은 힘찬 기운을 얻어가는 신자들이 많다고.
용주사에서는 사찰 체험을 비롯해 명상과 다도 수업도 운영 중이다. 불교에 귀의한 지 올해로 32년째인 담소 스님이 진행하는 다도 체험에서는 차 예절과 더불어 ‘나’ 자신에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다도 수업은 매주 월요일 오후 1시부터 2시 30분까지 진행하며 예약은 필수다.
용주사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187-2
글=김혜성 여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