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초유의 R&D 예산 14% 삭감…이종호 “어려운 길 선택”(종합)

406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22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 R&D 제도 혁신 방안’과 ‘2024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 결과’ 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3.08.22 [사진=뉴시스]

[아이뉴스24 최상국 기자] 정부가 국가연구개발(R&D)사업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22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의장 대통령)은 21조5000억원 규모의 내년도 ‘주요 R&D’예산안을 심의·의결했다. 올해보다 무려 13.9%(3조4500억원)나 삭감된 예산안이 나왔다.

과기정통부는 “세계최고 수준의 혁신적R&D 집중투자, 대한민국을 이끌 미래세대 육성 강화 등 윤석열 정부의 국정철학에 부합하는 주요 연구개발사업 예산을 반영하고, 기업 보조금 성격의 나눠주기식 사업, 성과부진 사업 등에 대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통해 108개 사업을 통·폐합했다”고 밝혔다.

◇ 사상 초유의 ‘R&D 예산’ 삭감…이종호 “어려운 길 선택한 것”

정부 R&D 예산이 마이너스 편성된 것은 역대 처음이다. 과기정통부는 박근혜 정부 시기인 2016년에도 ‘정부안’은 전년대비 삭감된 적이 있다고 설명했지만, 당시에도 국회 심의를 거친 최종안은 1.1% 증액 편성됐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자료에 따르면 통계가 작성된 1964년 이래 R&D 예산이 줄어든 해는 ‘과학기술관계예산’에서 ‘연구개발관계예산’으로 집계방식이 바뀌면서 수치상으로만 삭감된 1991년이 유일하다.

이처럼 정부 R&D에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추진된 것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월28일 재정전략회의에서 지적한 ‘R&D 나눠먹기 혁파’에 따른 것이다.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지난 정부에서 R&D 예산이 무려 10조 원 이상 늘어난 반면, R&D 시스템과 인력은 그대로였다”고 지적하면서 “예산을 늘리는 것은 쉬운 길이지만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어려운 길이다. 역대 정부가 예산을 늘리는 쉬운길을 걸어왔다면 윤석열 정부는 낡은 R&D 관행과 비효율을 걷어내고 선도형 R&D로 나아가는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장관은 또한 “윤석열 정부 과학기술 철학은 R&D를 R&D답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소부장, 감염병 등 단기현안대응을 이유로 대폭 늘어났다가 줄어들지 않고 있는 사업, 중소기업 뿌려주기식 사업, 관행적 사업은 과감히 구조조정했다”고 밝혔다. 중소기업 지원이나 단기적인 현안에 대응하기 위해 긴급하게 늘린 예산들은 R&D라는 명목을 내세우고 있으나 실제 사업내용은 R&D라고 부를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 장관은 “올해는 그동안 누적된 비효율을 걷어내는 과정에서 R&D 예산이 삭감된 측면이 있으나, 앞으로는 이번에 재편한 세계 최고 수준의 혁신적 R&D와 국가 임무 수행을 위한 필수 R&D를 중심으로 투자를 확대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2024년도 주요R&D 예산배분조정 기본방향 [사진=과기정통부]

◇ 핵심기술 투자 확대, 글로벌 협력 연구 지원 강화

과기정통부는 줄어든 R&D 예산을 첨단바이오, 인공지능, 사이버보안, 양자, 반도체, 이차전지, 우주 등 7대 핵심분야와 혁신적인 R&D 사업에 집중투자할 방침이다.

주영창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은 “글로벌 연대, 미래전략기술 등 세계 최고 수준의 혁신적인 R&D와 국방·공공 등 국가필수임무 수행을 위한 R&D에 예산이 집중 투입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국가전략기술 분야는 올해(4.7조원)보다 6.3% 증가한 5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첨단바이오(16.1%↑), 인공지능(4.5%↑), 사이버보안(14.5%↑), 양자(20.1%↑), 반도체(5.5%↑), 이차전지(19.7%↑), 우주(11.5%↑) 등 7대 핵심분야 예산을 모두 크게 늘렸다.

윤석열 대통령이 강조한 ‘글로벌 R&D’에는 2조8000억 원을 투입한다. 보스턴 바이오협력 프로젝트에 845억원을 투자하는 등 “국내외 우수그룹간 세계최고 연구, 글로벌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와 협력하는 글로벌R&D 지원을 확대”한다.

과기정통부는 또한 젊은 연구자들이 글로벌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해외선도연구 참여를 적극 지원하며, 국내에서도 세계적인 연구가 가능하도록 대학 등 연구시설·장비를 글로벌 수준으로 고도화하겠다고 밝혔다.

이 밖에 차세대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미래전략기술 분야에 2.5조원, 주력산업 분야 초격차 기술확보를 위해 3.1조원, 세계최고 수준의 디지털 역량확보와 디지털 융합에 1.6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반면 기초연구 예산은 올해(2.6조원)보다 6.2% 감소한 2.4조원, 출연연 예산은 올해(2.4조원)보다 10.8% 감소한 2.1조원을 배정했다. 대신 출연연 전체에 대한 별도의 통합재원 1000억원을 조성해 ‘출연연 연구협력단’을 선발, 집중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과기정통부는 “기초연구와 출연연 예산은 연구개발 생태계 전반의 기반 역할을 고려해 감축은 최소화했다”며 “이는 전체 R&D 감소율보다 낮은 수준이며, 연구기관 운영에 필수적인 인건비와 경상비는 전년 수준을 유지(+0.2%)했다”고 부연했다.

◇R&D 사업 평가에 상대평가 전면도입, 하위 20% 구조조정

과기정통부는 이날 내년도 주요R&D 예산과 함께 ‘정부R&D 제도혁신 방안’도 발표했다. △해외 연구기관의 정부R&D 참여 허용 △과제 기획·선정·집행·평가 과정의 전문성·투명성·신뢰성 확보 △순수R&D 사업의 예타요건 완화 △출연연 핵심임무 별 통합 예산 도입 △매년 사업 재정집행 점검 등이 골자다.

우선 해외 우수 연구기관이 우리나라 정부 R&D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국가연구개발혁신법 시행령을 개정하고, 연구성과의 소유와 활용 등 국제공동연구 추진에 필요한 가이드라인도 마련한다.

출연연 연구자가 기관 칸막이를 넘어 국내·외 대학, 연구소, 기업 등과 자유롭게 협력할 수 있도록 ‘글로벌 TOP 전략연구단’을 선발해 지원하며, 도전·혁신적 R&D 사업에 대해서는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를 적극 추진한다.

누수되는 R&D 예산을 철저히 막기 위해 올해 하반기부터 매년 재정집행 점검을 실시하고, R&D 사업평가에 상대평가를 전면 도입해 하위 20% 사업은 구조조정할 계획이다.

◇이종호 장관 “미리 예방하고 대처하지 못해” 사과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올해 R&D 예산편성 과정에서 빚어진 혼선에 대한 사과의 메시지도 전했다.

이 장관은 “그동안 누적된 비효율을 과감히 걷어내어 효율화하고, 예산과 제도를 혁신하여 이권 카르텔이 다시는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겠다”면서 특히 “R&D 비효율을 미리 예방하고 대처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무한한 책임을 느끼며, 과기정통부부터 먼저 혁신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또한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진입하는데 연구개발과 산학연 각계각층의 과학기술인들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며, “R&D 혁신이 힘들고 어려울 수 있으나, 우리나라가 기술패권 경쟁에서 살아남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힘을 합쳐 이루어내어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R&D다운 R&D로의 혁신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50만 과학기술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함께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한편 정부의 총 R&D 예산은 과기자문회의가 심의하는 ‘주요 R&D’와 기획재정부가 편성하는 ‘일반R&D’ 로 구성된다. 올해 ‘일반 R&D’ 예산은 5조8000억원으로, ‘주요 R&D’와 비슷한 추세로 삭감된다면 내년도 총 R&D 예산은 26조5000억원 수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1
0
+1
0
+1
0
+1
0
+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