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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랜드의 30년 ‘수집 뚝심’…세계 최고 박물관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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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비즈워치

서울 강서구 마곡동의 이랜드글로벌R&D센터 지하에는 일반에 공개된 적 없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이랜드그룹이 30년간 모아온 소장품을 보관한 ‘수장고’다. 이곳에 들어서면 한 세기 전의 시간이 펼쳐진다. 넓은 전시 공간 한가운데에는 1931년식 포드 ‘로드스터’가 여행용 트렁크를 싣고 서 있다. 그 주변으로는 누군가의 여정을 함께했을 여행가방들이 선반마다 천장 높이까지 빼곡히 쌓여 있다.

옆 전시관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오래된 타자기용 책상이 길게 늘어서 있다. 저마다의 시대를 거친 타자기들이 선반에 빈틈없이 들어차 있다.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즐겨 쓰던 타자기 모델도 그중 하나다. 다른 전시관에는 종교 속 인물과 역사적 영웅, 유명 건축물을 본뜬 수천 점의 북엔드들이 당시의 시대상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근현대 생활사를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한 풍경이다.

이랜드그룹은 1995년부터 다양한 수집품을 모아 왔다. 30년 넘게 한 점씩 모아온 소장품만 100만점에 이른다. 이랜드그룹은 이 컬렉션을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박물관을 만든다는 목표다.

100만점에 담긴 ‘시대’

이랜드그룹은 28일 이랜드글로벌R&D센터에서 기네스 세계 기록 인증식을 열고 지하 수장고를 언론에 처음 공개했다. 이랜드뮤지엄은 그동안 모은 수집품을 이 수장고로 순차 이관하고 있다.

이랜드그룹이 1995년부터 모아온 수집품은 총 100만점이 넘는다. 패션과 엔터테인먼트, 스포츠, 예술 등 수집 분야도 다양하다. 그래미 어워즈 트로피와 무대 의상, 영화 소품 같은 대중문화 자산부터 여행가방과 타자기, 재봉틀 등 근현대 생활사 소품까지 아우른다.

이랜드그룹이 이처럼 다양한 수집품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한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문화예술 수요도 커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랜드그룹은 1990년대부터 국제 경매시장을 중심으로 여러 수집품을 사들였다. 박성수 이랜드그룹 회장이 내세운 ‘문화보국’ 비전도 원동력이 됐다.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국내에서도 누구나 누릴 수 있게 하겠다는 뜻이다.

서울 강서구 마곡동 이랜드글로벌R&D센터 내 수장고에 전시된 이랜드그룹 수집품들. 1931년식 포드 로드스터에 여행가방이 실려있다. / 사진=정혜인 기자 hij@

한우석 이랜드뮤지엄 대표는 “1990년대에 수집을 시작할 당시 선진국 사례를 보면서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문화예술 소비가 늘어난다는 점에 주목했다”며 “30년 뒤 한국이 선진국으로 성장했을 때 고객들의 문화예술 수요가 클 것으로  내다봤다”고 말했다.

이랜드뮤지엄의 수집품 일부는 세계 무대에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랜드그룹이 여행가방 7816점과 북엔드 4674점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 ‘세계 최대 규모 컬렉션’ 2개 부문 인증을 받으면서다. 여행가방과 북엔드 같은 생활 소품까지 모은 것은 시대상이 담긴 사물에서 새로운 디자인의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여행가방에는 이동 수단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 여행 문화가, 북엔드에는 책과 지식을 대하는 생활양식이 담겨 있다는 게 이랜드그룹의 설명이다.디자이너의 도서관

수장고가 들어선 이랜드글로벌R&D센터가 ‘도서관’을 콘셉트로 지어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R&D센터는 외관부터 책이 꽂힌 서가처럼 설계됐는데, 지식과 기록을 그룹의 핵심 자산으로 삼겠다는 의도가 담겼다.

이랜드그룹에게 수장고는 수집품을 보관하는 창고를 넘어 패션 사업의 디자인 경쟁력을 키우는 연구 공간이기도 하다. 지하 2층에 자리한 패션 아카이브가 대표적이다. 약 4000평 규모의 이 공간에는 의류 샘플 약 30만점과 디자인 전문 서적 1만7000여 권이 품목별로 정리돼 있다. 디자이너들은 도서관에서 책을 찾듯 상품 기획에 필요한 샘플을 직접 꺼내 보며 디자인을 연구할 수 있다.

서울 강서구 마곡동 이랜드글로벌R&D센터 내 수장고에 전시된 타자기 수집품들./ 사진=정혜인 기자 hij@

이랜드그룹이 의류 샘플 30만점을 모아 둔 것은 디자이너들이 옛 디자인을 직접 보고 만지며 새 상품에 응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새로운 패션 디자인은 과거의 디자인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샤넬이나 디올 같은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들도 수십 년치 컬렉션을 아카이브로 보관하고 있다.

한 대표는 “패션이 주력 사업이다 보니 디자인의 영감이나 뿌리가 되는 원천이 필요하다”며 “그동안 모은 소장품들이 디자이너와 직원들에게 창의적인 영감을 주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류뿐 아니라 옷을 만드는 재봉틀과 실로 엮은 직물 예술품도 이랜드그룹의 수집 대상이다. 패션 기업으로 출발한 만큼 옷의 재료인 직물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 있다는 게 이랜드그룹의 설명이다. 지하 1층 수장고에는 재봉틀 21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R&D센터 1층 중앙 계단 위에는 마르크 샤갈의 그림을 실로 짜낸 태피스트리도 걸었다. 유엔 뉴욕 본부에 설치된 샤갈의 스테인드글라스 ‘평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한국판 V&A’로

이랜드그룹은 그룹 컬렉션의 가장 큰 경쟁력을 소장품의 희소성과 규모로 꼽는다. 지하 2층의 특수효과 촬영용 카메라가 대표적이다. 전 세계에 단 2대만 제작된 이 카메라는 1956년 영화 ‘십계’에서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장면을 촬영했다. 1977년 ‘스타워즈 4: 새로운 희망’에서는 ‘데스스타’가 폭발하는 명장면을 찍는 데 쓰이기도 했다.

서영희 이랜드뮤지엄 총괄디렉터는 “이랜드에 와야만 볼 수 있는 소장품이 1만 점 넘게 있다”며 “2위가 따라오지 못할 만큼 압도적으로 많이 모은 품목도 10가지가 넘는다”고 강조했다.

해외 유명 박물관들도 이랜드뮤지엄의 소장품을 전시에 활용해 왔다. 이랜드뮤지엄은 2012년 영국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뮤지엄(V&A)의 ‘할리우드 코스튬’ 전시에 영화 소장품을 대여했다. 미국 LA 아카데미 영화박물관은 영화 ‘대부’ 50주년 기념전을 열면서 전시 하이라이트의 절반을 이랜드뮤지엄 소장품으로 채웠다. 국내에서는 최근 3년간 20여 차례 전시를 열어 누적 관람객 110만명을 모았다.

28일 서울 강서구 이랜드글로벌R&D센터에서 열린 이랜드그룹의 기네스 세계 기록 공식 인증식에서 (왼쪽부터)한우석 이랜드뮤지엄 대표, 손민영 기네스 세계 기록 심사관, 서영희 이랜드뮤지엄 총괄디렉터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사진=이랜드그룹

이랜드그룹은 소장품을 그룹 사업에도 활용하고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들은 켄싱턴호텔 평창에 전시된 동계올림픽 소장품을 보고 이곳을 베이스캠프로 정하기도 했다.

또 이랜드그룹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속 의상과 포스터 등 소장품을 외식 브랜드 ‘애슐리’ 매장에 전시해 브랜드 이야기를 전하는 데 활용 중이다. 애슐리는 영화 속 등장인물 애슐리 윌크스에서 이름을 따온 브랜드다.

서울 강서구 마곡동 이랜드글로벌R&D센터 내 수장고에 전시된 북엔드 수집품들./ 사진=정혜인 기자 hij@

이랜드그룹은 향후 최대 30개 부문에 대해 기네스 세계 기록 도전을 이어가기로 했다. 다음 타자는 1100여 점을 모은 타자기 컬렉션으로 낙점했다.

이와 함께 이랜드그룹은 장기적으로 수장고에 보관 중인 소장품을 일반에 공개할 계획이다. 30년간 모은 수집품으로 세계적인 박물관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패션과 영화, 음악 등 대중문화를 두루 아우르는 컬렉션을 갖춘 만큼 이랜드뮤지엄이 V&A 같은 박물관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한 대표는 “지금까지 모은 소장품으로 국내외 고객들에게 의미 있는 경험을 선사하는 전시를 선보일 것”이라며 “이랜드뮤지엄을 K문화와 K전시를 대표하는 박물관으로 키워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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