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윤 한미사이언스 사장이 한미약품과 OCI그룹 통합에 반발하면서 경영권 분쟁을 공식화했다. 그는 한미그룹 이사회에서 결의한 제3자배정 유상증자안 등의 위법성을 따지고 아울러 우호세력과 경영권을 확보해 통합 결정을 원점으로 되돌린다는 계획이다. 이르면 이번 주 가처분 신청을 시작으로 행동에 나설 전망이다.
한미약품 장남, 후계구도 밀려나
임종윤 한미사이언스 사장은 지난 12일 한미그룹이 OCI그룹과 통합안을 발표하자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그는 개인회사 코리그룹의 소셜미디어계정을 통해 한미약품과 가족들로부터 이 사실을 사전에 고지받지 못했다며 불편한 기색을 나타냈다.
임 사장은 고(姑) 임성기 한미약품 창업주와 송영숙 한미사이언스 회장 사이 3남매(임종윤·주현·종훈) 중 장남으로 현재 한미사이언스 지분 12.12%를 보유한 2대 주주다. 현재 한미사이언스에 미등기 임원, 한미약품에는 등기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약업계에서는 이번 결정에서 임 사장이 배제된 것을 두고 예견된 수순이라고 보고 있다. 한미사이언스에서 임 사장의 입지가 흔들린 건 2022년 3월 그가 이사회에서 물러난 때로 거슬러 간다. 그는 2000년 한미약품에 입사해 2010년 임성기 창업주와 함께 지주사 공동 대표이사직을 맡으며 후계자 자리를 확실히 꿰찬 듯 보였다.
그러나 임 창업주가 2020년 타계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임 사장의 모친인 송영숙 회장이 최대지분을 상속하면서 실세로 떠올랐고, 2년 뒤 열린 정기주주총회에서 임 사장의 사내이사 재선임 안건이 올라오지 않으면서 그는 이사회에서 떠밀리듯 내려왔다. 한미그룹의 후계자 구도가 원점으로 돌아간 순간이었다.
임 사장은 이후 자신이 2007년 차린 코리그룹, 2021년 대주주로 오른 디엑스앤브이엑스(DxVx) 경영에 매진했다. 이 과정에서 임 사장은 코스닥 상장폐기 위기에 몰린 DxVx를 살리는 데 주력하느라 한미약품 경영을 소홀히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실제 지난 2021년 86%에 달하던 임 사장의 한미약품 이사회 출석률은 이듬해 50%, 2023년 상반기 20%로 뚝 떨어졌다.
그동안 장녀인 임주현 사장은 한미사이언스에서 글로벌사업본부, R&D(연구개발)센터 등을 총괄했고 지난해 그룹의 미래 성장동력을 구상하는 핵심 직책인 전략기획실장으로 취임했다. 오빠인 임 사장이 그동안 한미사이언스에서 달고 있던 ‘미래전략 담당’이라는 직함이 사실상 빛이 바랜 것이다.
어머니인 송 회장은 곁에서 더 가까운 신뢰를 쌓은 임주현 사장을 후계자로 택했다. 임 사장은 향후 한미그룹과 OCI그룹이 통합할 시 이우현 OCI그룹 회장과 함께 통합법인의 공동 대표이사로 경영 일선에 설 예정이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임 사장은 한미약품과 글로벌 사업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해 코리그룹과 DxVx에 그동안 전념해 왔다”며 “그러면서 한미약품 경영에 불가피하게 소홀해진 게 송 회장의 신뢰를 잃어버린 계기를 만든 것 같다”고 했다.
이번주 가처분 신청…승소 가능성은 ‘불확실’
임종윤 사장은 이르면 이번 주 안에 법원에 한미사이언스 이사회 결의안에 대한 가처분 신청을 제기할 예정이다. 임 사장이 대내외적으로 경영권 분쟁의 첫 신호탄을 쏘는 셈이다. 그러나 가처분 신청이 인용될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한미사이언스와 OCI홀딩스 모두 이사회의 만장일치 결의를 통해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경영권 분쟁 중일 경우 제3자 배정 신주발행이 무효라는 판례가 있으나 결과를 장담하기는 어렵다는 분위기다.
이상근 서강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절차적으로나 내용상 불법적인 부분이 없다면 이사회에서 한 번 결의된 사안을 되돌리긴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과거 이사회 결의에 대한 가처분 신청이 인용된 사례는 모두 위법성이 명백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임 사장도 가처분 신청이 인용되지 않을 것을 대비해 경영권 확보라는 두 번째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기관투자자나 한미그룹 대주주와 연합해 한미사이언스의 이사회를 장악, OCI그룹과의 통합 계획을 원점으로 되돌린다는 구상이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의 동생(임종훈)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으며 비오너일가 중 최대지분(12.15%)을 쥔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과 면밀히 소통하고 있다고 밝혔다.
만약 임 사장이 주주총회 표대결까지 가는 데 성공해도 소액주주 등 비오너일가 지분 약 60%를 설득하려면 한미그룹과 OCI그룹이 내놓은 비전보다 매력적인 발전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그가 현재까지 내세운 비전은 한미약품이 코리그룹, DxVx와 힘을 합쳐 한국판 종합 헬스케어 기업인 ‘애보트’가 되겠다는 것인데 시장의 반응은 미적지근한 편이다.
DxVx는 규모 자체가 시가총액 2000억원 규모의 회사인 데다 코리그룹은 기업가치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외국계 회사여서다.
임 사장은 현재 사모펀드 운용사 등과 접촉하면서 한미사이언스의 지분을 다량 보유한 기관투자자 지분을 ‘블록딜(시간 외 대량매매)’ 방식으로 매수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하지만 사모펀드의 참여 여부를 당장 확인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사모펀드가 분쟁에 뛰어들 명분이 아직은 부족한데다 한미사이언스의 기업가치 또한 저평가됐다고 규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OCI그룹과 통합 발표가 나기 전 한미사이언스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은 3.32로 코스피 의약품 지수 종목의 평균인 3.96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임 사장 측은 가처분 신청, 표대결 외에도 한미그룹의 통합안에 대적할 무기가 많다는 입장이다. 그가 북경한미약품 대표일 적부터 가까이 지내던 한 최측근은 “올해 한미사이언스 정기주주총회까지 사태는 잠잠해지지 않을 것”이라며 “현재 공개한 것보다 알려지지 않은 대응방안이 더욱 많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