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 유럽의 기묘한 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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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m.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73893859
선사시대 우크라이나에는 쿠쿠테니-트리폴리예(Cucuteni–Trypillia) 문화권이 존재했다.
이들의 조상은 불가리아 지방의 빈카 문화권으로부터 구리 제련술과 농사 짓는 방법을 배워서 동쪽 평야로 진출했다.
트리폴리예 문화권은 크게 번성했고 기원전 3800-3700년 우크라이나 중부 마이드네스케에선 2만 9천명이 거주할 수 있는 거대한 마을이 세워졌다.
트리폴리예 문화권의 몇몇 마을들은 동시대 수메르와 이집트의 도시보다 컸고, 기원전 제4천년기 내내 세계에서 가장 큰 거주지로 기능했다.
마을 중앙에는 광장이 있었으며 마을 전체를 감쌀수 있도록 2층 집을 붙여 만든 일종의 방벽이 지어졌다.
사람들은 구리로 쟁기와 같은 농기구를 만들었지만 무기는 거의 만들지 않았다.
거주지의 크기에도 불구하고 농경 목적 이외의 집단노동, 주거 용도 이외의 건축물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도시국가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청동기 사회의 특징인 분업화가 거의 없었고, 정치지도자, 화폐, 노예, 전사계급도 없었다고 추정된다.
구리는 장신구, 바늘, 농기구 등 제한된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도구를 뼈와 돌로 만들었기 때문에 장인 계급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트리폴리예 문화권은 주로 진흙벽으로 집을 지었고 진흙으로 만든 가마를 사용했다.
지붕은 마른 잔디나 빽빽하게 엮은 짚으로 만들었다.
목제 가구들을 많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후탓에 남아있는 것은 없다.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도자기를 만들었으나 기계적인 돌림판은 사용하지 않았다.
이들은 땅의 여신과 비슷한 존재를 숭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고학자들은 마을 중앙에 위치한 성소에서 점토상이 들어있는 도자기, 스와스티카, 소뿔, 십자가와 같은 상징이 그려진 유물들을 발견했다.
또한 많은 유적지에서 여신상과 여성이 그려진 도자기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이 때문에 1960년대 베트남 전쟁 전후, 반전주의 운동이 퍼질 때 페미니스트들은 트리폴리예 문화권을 평화로운 모계사회로 이상화하곤 했다.
페미니스트들은 트리폴리예 문화권이 인도-유럽어족을 쓰는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에게 멸망했다는 가설을 제기했고, 트리폴리예 문화권은 평화주의적, 자연주의적 사회가 가능하다는 실례로 여겨지곤 했다.
만일 선사시대가 평등하고 비폭력적인 사회라는 주장을 듣은적이 있다면 여기서 나온 이야기일 것이다.
트리폴리예 문화권이 대규모의 여성중심의 사회를 이뤘단 것은 사실이지만 멸망한 과정에 대해선 단순한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
문자 기록이 없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고고학적인 증거들로 사회상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묘지를 따로 만들지 않았다.
시체는 악취가 나고 전염병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마을은 공동묘지를 마련한다.
그런데 트리폴리예 문화권의 경우 집와 같은 장소에서 어린아이와 여성의 유골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시체를 집 아래에 묻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집에서는 최소한 33구의 사람에서 나온 100여개의 뼈조각이 발견되었고 치아로 만든 목걸이도 있었다고 한다.
다른 부위보다 두개골이 많이 발견되는데다 뼈들이 서로 분리된채 발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시체의 부분을 제물이나 부적으로 사용했단 가설이 있다.
공동묘지의 부재를 설명하기 위해 시신을 묻지 않고 들판에 유기했다 등의 가설이 제기되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식인 행위가 있었다는 가설도 있지만 신빙성은 낮다.
남성의 유골은 거의 나오지 않는데 이유는 알 수 없다.
일부 시신을 마을 안에 보관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조상과 함께 살아간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조상들을 상징하는 점토상들을 보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마을에서 인간 형태를 한 30~50cm 높이의 점토상들이 발견되었고, 한 집에서만 40개의 점토상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었다.
점토상이 색칠된 흔적도 있었고 각 점토상에 맞게 디자인된 안락의자도 발견되었다.
점토상들은 거래나 다른 마을의 중요한 행사를 감독하는 관전자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점토상은 물론 장식용도로 사용됐을 것이라 추정되는 화려한 도자기들도 출토되었다.
어떤 곳에서는 도자기들이 대칭 구조의 배열로 묻혀있었다고 한다.
트리폴리예 문화권은 ‘집태우기’ 의식으로도 유명하다.
이들은 기원전 4800년에서부터 3,200년의 기간 동안 마을 전체를 75~80년 주기로 불태웠다.
유적이 처음 발견된 1940년대에는 전쟁 또는 사고로 인해 불이 났을 것이란 가설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실험 결과 유적에서처럼 진흙이 세라믹화 되려면 자연적인 연소만으로는 온도가 부족했고 벽을 지푸라기로 둘러싸야 했다.
그리고 마을 전체가 완전히 태워진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의도적으로 불을 키웠다는게 정설이다.
벼룩과 곰팡이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집의 벽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등 집태우기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들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집태우기 중 점토벽이 허물어진 흔적이 있었고, 재산들도 같이 불태운 흔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집을 태운 후에 정확히 그 자리에 똑같은 집을 짓곤 했었는데 방역을 목적으로 벽까지 전소시킬 이유는 없다.
루마니아에서는 한 마을이 13번이나 불태워지고 재건되었다.
‘집태우기’ 의식은 인접한 여러 문화권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확인된 것 중 가장 오래된 사례는 기원전 제5천년기 헝가리의 쾨뢰스 문화권이다.
이들은 집을 각종 부장물로 채운 뒤에 시체와 함께 태우며 장례식을 치뤘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5900년에서 320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동유럽의 여러 신석기 문명들은 집태우기를 했다.
따라서 대규모 거주지가 발견되기 전인 19세기에 이미 고대인들이 주술적인 목적으로 집을 불태웠다는 추측이 제기되었다.
특히 트리폴리예 문화권은 거의 모든 마을에서 주기적으로 집태우기를 했던 흔적이 발견된다.
많은 유적에서 불탄 진흙벽의 잔해와 함께 탄 식량, 동물의 뼈, 도자기,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한 점토상이 발견되었다.
집을 태우며 누군가에게 제물을 바친 흔적으로 추정된다.
다뉴브강 유역은 끝없는 평야가 펼쳐지는 곳이다.
평야에서 마을은 마치 거대한 바위나 언덕처럼 눈에 잘 띄었을 것이고, 조상대부터 내려오던 집은 자연물처럼 신성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트리폴리예 문화권의 오래 지속된 마을에서는 70세대 이상이 한 자리에서 살았다.
집들은 용도에 관계없이 똑같은 사각형 모양을 띄었다.
집들은 지어진 것이 아니라 나무나 동물들처럼 인간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이 때문에 집태우기는 공동체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수많은 사람이 모여사는 도시에서 사회가 통합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선 공통의 목적이 필요하다.
트리폴리예 문화권은 극도로 정주적인 사회였으며 정치 체제가 없었다.
때문에 주기적으로 집을 태우는 것이 동질 의식을 유지하게 하는데 도움이 됐을 수도 있다.
물론 왜 집을 태웠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집을 태우는 사람들 또한 이유를 알고 태운건 아니였을 것이다.
미신적인 행동에 있어서 이유가 행동에 선행하는 경우는 드물다.
먼저 행동을 하고 그 뒤에 설명이 덧붙는다.
20세기까지만해도 동유럽의 시골 마을들은 모계주의적인 사회를 유지했고 점토벽과 흙가마가 있는 초가집이 일반적이였다.
불가리아 시골에는 아직도 천천히 원무를 추며 트랜스 상태에 빠지는 의식이 남아있다.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선 겨울이 끝나는 시기에 여신 모라나의 허수아비를 만들어서 불사지르곤 한다.
모라나는 죽음, 역병, 부활의 여신으로 북유럽에선 사후세계와 연관 지어진다.
이 사람들에게 의식의 목적과 의미를 물어봐도 명확한 답변을 받을수는 없을 것이다.
수백년, 수천년간 계속된 의식이면 더욱이 그렇다.
무슨 생각으로 마을을 불태웠는지는 몰라도 사회에 큰 손해를 끼치지는 않았고, 심리적인 의미가 있었기에 집을 태웠을거라 생각한다.
정말로 태우지 않으면 안됐던 뭔가가 있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