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를 탄생시키는 건 작가지만, 캐릭터를 완성하는 건 배우의 몫입니다. 즉, 작가의 시나리오에 배우들의 해석과 아이디어를 더해 드라마와 배우의 몸에 딱 맞는 캐릭터로 재탄생시킨 것입니다.
사랑스러운 반찬가게 사장(전도연), 천재적인 음악가 출신 변호사(조승우), 잔잔한 카리스마를 폭발시키는 카지노 왕(최민식) 등 최근 각기 다른 드라마에서 인기를 끈 세 캐릭터 역시 배우들이 직접 제안한 설정으로 완성됐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에서 한 배우가 이렇게 캐릭터를 완성해나가는 과정에서 작가와의 작은 마찰이 있다고 밝혀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일타스캔들’ 전도연, 희석된 성격으로 완벽 변신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일타스캔들’의 주인공 남행선도 전도연의 해석을 거쳐 처음 시놉시스와는 다르게 표현됐습니다.
가족을 위해 국가대표 선수 생활을 접고 반찬가게를 운영하는 씩씩하고 따뜻한 성격의 남행선은 사랑이 넘치고, 오지랖도 넓입니다. “심장이 덜렁거린다”, “경찰은 민중의 몽둥이”, “아연질색’ 등 말실수를 지적하면 “애니웨이”(anyway·아무튼)라고 얼렁뚱땅 넘기고, 앞뒤 생각 안 하고 무턱대고 나서서 상황을 악화시키는데도 미워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그려집니다.
전도연은 “남행선은 원래 훨씬 억척스러운 캐릭터였는데 저로 인해 희석된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작가님이) 원래 훨씬 텐션(긴장감)이 높게 표현해주기를 바라셨는데 그게 부담스러웠고, 저와 완전히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며 “첫 대본 리딩 때 (작가님께) 못 하겠다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바꿔주셨으면 좋겠다고 강력하게 요청했다”고 떠올렸다.
‘일타스캔들’ 양희승 작가는 전도연이 연기한 남행선 캐릭터의 탄생에 대해서 “내면적으로 가진 것이 많고 따뜻해서 주변 인물들이 스며들고 영향받는 이야기를 하기위해 남행선을 그렸다”고 전했습니다. 덧붙여 전도연이 배역 제안을 거절하려 했지만 작가와의 미팅 후 마음을 바꾸게 된 계기와 배우 특유의 사랑스러움을 살리기 위해 캐릭터를 수정하게 된 후일담을 밝히기도 하며 작가와 배우가 함께 성공적으로 캐릭터를 만들어 나갔다는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캐릭터를 더 괴짜스럽게…’신성한 이혼’ 조승우
2023년 3월 26일 방송가에 따르면 현재 방영 중인 JTBC 드라마 ‘신성한 이혼’의 주인공 신성한도 조승우를 만나 원작과 전혀 다른 캐릭터로 재탄생했습니다. 조승우는 대사를 변형하거나 자신만의 설정을 입혀서 캐릭터 표현의 디테일을 살리는 것으로 잘 알려진 배우입니다.
조승우가 연기하는 신성한은 아티스트 출신 이혼 전문 변호사입니다. 그는 말투와 표정, 행동, 스타일링 등 보이는 모든 것들이 범상치 않은 인물입니다. 드라마 ‘비밀의 숲’ ‘라이프’, 영화 ‘말아톤’ ‘타짜’ ‘내부자들’ 등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했던 조승우가 보여줄 새로운 모습에 기대가 모입니다.
다만, 원작인 동명의 웹툰에서 신성한은 늘 정갈한 수트 차림에 미간은 찌푸리고, 농담 한마디도 던지지 못할 것 같은 냉철한 이미지를 풍깁니다. 반면 조승우가 연기한 신성한은 훨씬 자유분방하고 괴짜스럽습니다. 특히 드라마는 원작과 달리 신성한이 독일에서 음악 교수로 지내다가 변호사로 전향했다는 설정을 추가했습니다.
신성한은 ‘노동요’로 5천만원짜리 최고급 스피커로 트로트를 들으며 나훈아의 ‘테스형’을 맛깔나게 꺾어 부르고, 의뢰인의 사건에 대해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 같다”고 표현합니다.
조승우는 최근 제작발표회에서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설정은 제가 직접 작가님께 부탁을 드렸다”며 “신성한이 의뢰인의 사건을 들여다볼 때 전직 피아니스트답게 곡을 연주하듯이, 악보를 해석하듯이 바라보는 것처럼 표현되길 바랐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조승우는 최근 작가에게 문자를 보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작품은 어떤 작품일까요?’라고 물어봤다. ‘보통은 결혼이라는 단어 앞에 신성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나. 우리 작품 제목을 보면 이혼이라는 단어 앞에 신성한이 붙는다. 성한이는 인간의 존엄성, 존중, 배려와 관련해 누군가가 덜 상처받게 하는데 집중하면서 그 과정을 풀어나가는, 사람 냄새 나는 캐릭터인 것 같다’고 해주셨다”고 밝혔습니다. 작가의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는 그는 신성한의 인간미에 집중해 주길 당부했습니다.
시청자들의 반응은 긍정적인 편입니다. 신성한의 능청스럽고 유쾌한 매력이 무거운 사건을 다루는 법정극의 분위기를 살리고, 음악에 비유해 의뢰인 사건의 핵심을 짚어내는 모습도 신선하게 와닿는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카지노’ 최민식, 감정절제에서 나오는 카리스마
‘카지노’의 주인공 차무식도 배우의 아이디어가 적극적으로 반영된 캐릭터입니다. 디즈니+의 오리지널 시리즈 ‘카지노’는 돈도 빽도 없이 필리핀에서 카지노의 전설이 된 남자 차무식이 살인사건에 휘말리면서 인생의 벼랑 끝 목숨 건 최후의 베팅을 시작하게 되는 강렬한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액션과 탄탄한 스토리를 가진 카지노지만 그중에서도 구독자들의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것은 단연 극을 관통하는 최민식의 압도적인 연기입니다.
최민식은 차무식의 젊은 시절부터 현재까지 시대를 아우르는 디테일한 연기를 선보이며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특히 그의 열연은 3화 말미, 카지노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 민사장의 못 받은 돈을 수금하러 간 순간 거친 액션과 함께 폭발하며 몰입감을 더했습니다. 3000만 원을 받으러 왔다는 말에 반발하는 박이성 무리에게 거침없이 송곳을 내리꽂는 장면은 단숨에 구독자들의 시선을 빼앗으며 그의 존재감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습니다.
최민식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카지노’는 연출자와 배우들이 시험공부 하듯 현장에서 머리를 맞대고 함께 만들어낸 작품이어서 애착이 크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차무식은 자기 나름대로 본인이 비즈니스맨이라고 생각하니까 거래할 때 감정을 최대한 절제할 것이라는 설정을 입혀봤다”고 설명했습니다.
두둑한 배짱 하나로 필리핀 카지노 업계를 접수하는 차무식은 고함을 치거나 화려한 액션을 내세우지 않지만, 잔잔하게 카리스마를 폭발시키는 캐릭터입니다. 상대방을 협박할 때 그는 늘 깍듯하고 나긋나긋한 말투입니다. 그러나 내뱉는 말들은 순간 사람을 얼어붙게 할 만큼 살벌합니다.
“내가 너한테 허락받아야 해요?”, “그럼 싸가지 있게 부탁을 하셔야지” 등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 쓰는 ‘반존대’와 공손한 막말을 툭툭 내뱉으며 상대방의 기를 확 죽이는 화법은 차무식이라는 캐릭터를 더욱 돋보이게 만듭니다.
한 방송 관계자는 “캐릭터를 만드는 것은 작가지만, 캐릭터를 완성하는 건 결국 배우”라며 “내로라하는 연기파 배우들의 내공 있는 캐릭터 해석과 연기력으로 시너지를 낸 사례”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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