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그럴 수가”
모두가 놀란 그녀의 선택
무대 위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던 디바의 삶은 어느 순간 잿빛으로 변했다. 가수 장미화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 선택은 그녀를 20년 넘는 빚더미 위로 내몰았고, 상처투성이 삶을 남겼다. 하지만 그녀는 그 길 끝에서도 여전히 노래하며 살아가고 있다.
장미화는 젊은 시절 한국 최초 걸밴드의 보컬로 미국 무대에 진출하며 승승장구했다. 1973년 솔로로 데뷔한 뒤에는 ‘봄이 오면’, ‘서풍이 부는 날’ 등 수많은 히트곡을 쏟아내며 정점을 찍었다.
당시 야간업소에서만 한 달에 집 한 채를 살 정도로 돈을 벌었고, 누구도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결혼과 함께 그녀의 화려한 무대는 갑작스럽게 멈췄다.
결혼 생활은 길지 않았다. 전 남편은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빚더미에 올랐고, 결국 두 사람은 이혼을 선택했다. 장미화는 “나는 현모양처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의 존중이 없었다. 이혼 후 깨달은 건 여자가 아무리 헌신해도 소용없다는 사실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아들과 100억을 맞바꿨다
아들 양육권을 지키기 위해 장미화는 전 남편의 빚을 떠안기로 결심했다. 당시 금액은 100억 원, 무려 20년간 빚을 갚아야 했다.
아들을 되찾은 기쁨도 잠시, 홀로 아들과 어머니를 부양하며 하루에 열두 곳의 무대에 오르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녀는 “목에 쇠를 달고 병원에 누워 있을 때도 돈을 달라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때 너무 서러웠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연예인의 이혼은 큰 낙인이던 시절, 장미화는 손가락질을 견디며 노래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전 남편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그녀의 삶을 또 한 번 흔들었다. 장미화는 “아들이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영안실 사진 앞에서 울고 있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뭘 잘못했기에 우리 아이가 이렇게 아파야 하나’ 하는 자책감에 눈물이 났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그녀는 절망 속에서도 자신을 일으켰다. 장미화는 어려운 시기에 나눔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찾았다. 그는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도울 방법을 찾았다. 팔다리 멀쩡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금도 장미화는 꾸준히 나눔을 실천하며 새로운 삶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장미화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누리꾼들은 “엄마로서의 희생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됐다”, “모진 세월을 꿋꿋이 견뎌낸 모습이 존경스럽다”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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