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건축가는 석고보드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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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손으로 치면 퉁퉁거리는 소리가 났다. 비단 벽뿐 아니라 어느 곳이라도 손으로 치면 ‘퉁퉁’ 소리가 났다. 문에서도, 문을 단단하게 잡고 있어야 하는 문틀에서도, 벽과 바닥 사이를 뒤덮은 두꺼운 걸레받이에서도, 벽에 쏙 들어가 있는 붙박이장 속에서도 ‘통통’ 소리가 났다. 무언가 아쉬운 것처럼 벽을 지나칠 때마다 습관적으로 두드리고 다녔다. 어느 곳에서나 통통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이 건물이 단단한 콘크리트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잊기는 어려웠다.

어떤 상처들 어느 날 혼자서 키 큰 책장을 옮기다 벽에 ‘콩’ 하고 부딪혔다. 겨우 ‘콩!’ 하고 부딪혔으니 퉁퉁거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대신 석고보드 벽은 평소와 다르게 푸석거리는 약한 소리를 냈고, 눈에 잘 띄는 벽 한가운데에 가구의 모서리 자국이 남았다. 날카로운 세모 자국이 마치 계급장처럼 벽에 또렷하게 새겨졌다. 그것 좀 부딪혔다고 이렇게까지 티가 날 줄이야. 이건 내가 저지른 일에 비해 너무 큰 대가였다. 만약 이 벽이 콘크리트나 나무였다면 실수의 크기에 상응하는 작은 상처만 남았을 것이고, 이 정도 충격엔 아무런 자국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 집을 감싸고 있는 석고보드 벽이 대수롭지 않은 사고에도 드러눕는 운전자처럼 얄미웠다. “아이고! 이놈의 가구가 집을 다 때려 부수는구나!” 그 후로도 벽에는 몇 개의 보기 싫은 상처가 더 생겼다. 가구를 옮기다 남긴 상처가 가장 눈에 띄었고, 그 밖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부분에 동그란 나사 자국이 몇 개 추가됐다. 전동 드릴만 있으면, 아니 전동 드릴이 없어도 석고보드 벽에 나사 하나 박아 넣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치 수수깡에 옷핀을 찔러 놓는 것처럼, 지우개에 샤프심을 찔러 넣는 것처럼, 필요한 곳에(집주인의 눈에 띄지 않을 만한 위치에) 나사를 박아 넣었다. 석고보드는 힘이 없어서 무거운 물건을 달 수 없다. 현관 벽면에 가벼운 모자 몇 개 걸어 놓으려고 고리 하나를 달았다. 얼마나 튼튼한지 확인하려고 살짝 고리를 당겼더니 곧바로 빠져버리는 게 아닌가. 역시나 석고보드 따위는 믿는 게 아니었다고 분개하며 다시 나사를 풀었다. 하얀 벽에 구멍이 났고, 나사를 박았던 곳 아래엔 하얀 석고가루가 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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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는 마음 대신 나는 석고보드 벽이 싫다. 정말 재수 없다. 자꾸 통통거리며 아쉬운 마음이 들게 하고, 다른 엄살이 심해 물건을 ‘콩’ 찍는 작은 실수 하나도 감싸주지 않는다. 제 몸에 작은 물건 하나도 달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냥 집에 붙어 있었으니 이것이 집인 줄 알고 사는 것뿐이지 석고보드는 사실 집도 아니고 벽도 아니다. 그냥 아쉬움 덩어리일 뿐이다. 건물을 지을 때 현장에 가보면 집은 석고보드에 가려지기 전까지는 아름답다. 석고보드가 붙지 않은 집은 단단하고 묵직하다. 마치 책처럼 묵직하고, 돌처럼 오래된 것 같다. 집주인 몰래 벽에 상처 내던 것을 그만두고, 매일 미워하는 마음을 담아 벽을 ‘통통’ 치던 일을 그만두고, 차라리 부술 수 있는 벽을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월셋집을 떠나 집을 구입해 나가기로 결심한 건 순전히 그런 아쉬움 때문이었다. 석고보드로 감싸 있는, 그 아쉬움의 정체를 열어보기 위해서였다. 새 집은 호텔로 쓰이던 오피스텔로 꽤 잘 지은 건물이었다. 거실과 주방이 답답하지 않게 트여 있었고, 방은 잘 숨겨져 있었다. 현관과 화장실, 창고, 보일러실 등 삶에서 중요하지만 대충 만들기 쉬운 공간이 너무 넓지도, 너무 좁지도 않게 구성돼 있었다. 그럼에도 외관은 네모반듯함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렇듯 안팎에서 무리수를 둔 흔적을 찾을 수 없다면 꽤 꼼꼼하게 설계한 건물이라고 믿어도 좋다.

아쉬움 너머에 하지만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벽을 손으로 치면 퉁퉁거리는 소리가 났다. 벽뿐 아니라 어느 곳이라도 손으로 치면 ‘퉁퉁’ 소리가 났다. 예전처럼 벽을 손바닥으로 ‘퉁퉁’ 쳐보고, 잠시 서서 생각하다가 조금 더 세게 쳐보고, 날카로운 공구를 가져와 아예 구멍을 뚫어버렸다. 그 다음엔 마치 거대한 갑각류를 해체하는 것처럼 커다란 망치와 커터 칼을 들고 조금씩 벽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칼 한 자루를 손에 들고 비처럼 쏟아지는 석고보드 먼지를 참고 참으며 계속 자르다 보니 석고보드 속에 가둬져 있던 한기 서린 공기가 밖으로 새어 나왔다. 석고가루가 온 집 안을 뒤덮었고, 얼굴은 미끈거렸다. 아무래도 이 가루가 아쉬움의 실체인 것 같았다. 석고보드를 싫어할 만한 이유는 무궁무진하다고 느끼며, 그 후론 먼지가 흩날리지 않게 조심하며 칼로 잘라냈다. 꽉 막혀 있던 석고보드 벽에 작은 창이 생겼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고, 멈출 수 없었다. 벽을 뜯으니 벽에 연결된 몰딩과 걸레받이를 뜯어내야 했다. 그 다음엔 몰딩에 가려져 있던 바닥과 천장도 뜯어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집은 연쇄적으로 뜯겨져 나갔다. 아니, 집을 감싸고 있는 껍데기가 연쇄적으로 뜯겨져 나갔다. 껍데기가 뜯겨져 나가고 그제야 집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석고보드가 사라진 벽에는 앙상한 금속 구조물이 모습을 드러냈고, 붙박이장을 뜯어낸 공간에는 아쉬움이 한가득 숨어 있는 넓은 공간을 발견했다. 어떤 벽에선 뽀얀 콘크리트 벽이 나타나고 집을 지은 사람들이 콘크리트 벽에 그린 귀여운 낙서가 나타나기도 했다.

한승재

건축가. 푸하하하 프렌즈에서 동료들과 함께 건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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