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영화 〈탑건: 매버릭〉 개봉 당시 팬들이 특히 열광했던 장면은 매버릭(톰 크루즈)와 아이스맨(발 킬머)의 재회였습니다. 1986년 〈탑건〉 이후 두 사람이 어떤 관계로 지내 왔는지를 짐작케 할 수 있는 대목이었거든요. 공군사관학교 시절 매버릭과 아이스맨은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대는 앙숙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서로를 진정한 동료로 인정하게 됐죠. 그리고 약 40년 만에 아이스맨은 매버릭을 다시 전투기에 태웁니다. 갑자기 불러낸 게 아니예요. 그 동안 아이스맨은 공군 내 탕아였던 매버릭의 든든한 ‘윙맨’이었습니다.

〈탑건: 매버릭〉에 발 킬머가 등장한다는 소식이 비상한 관심을 끈 건, 당시 그가 투병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후두암 탓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지만 극 중 아이스맨은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 만으로 매버릭과 대화했습니다. 이처럼 병마와 싸우면서도 배우로서 꾸준히 활동했던 발 킬머가 끝내 숨을 거뒀습니다. 뉴욕타임즈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발 킬머는 1일(현지시각) 폐렴 악화로 별세했습니다. 고인의 나이 65세였습니다.

발 킬머는 유독 개성 있는 출연작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배우 중 한 명이었습니다. 최근 재개봉한 〈도어즈〉에서 그는 요절한 록 스타, 밴드 도어즈의 프런트맨 짐 모리슨을 연기했는데요. 영화를 연출한 올리버 스톤 감독은 과거 한 인터뷰에서 “주연으로 함께 고려하고 있던 톰 크루즈보다도 발 킬머가 실제 짐 모리슨과 같은 나른함과 내면으로 파고드는 특징이 있다고 생각했다”라는 캐스팅 비화를 전한 적도 있습니다.

또 엘비스 프레슬리의 유령(?)으로 변신했던 〈트루 로맨스〉는 여전히 회자되는 명작입니다. 〈배트맨 3 – 포에버〉를 통해 프랜차이즈 주인공 급으로 발돋움한 그는 같은 해 마이클 만 감독의 레전드 범죄 영화 〈히트〉에도 출연했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함께 한 〈키스 키스 뱅뱅〉에서는 그간 갈고 닦았던 연기력이 돋보였고요. 고인의 유작은 그의 얼굴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탑건: 매버릭〉으로 남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