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 채소 한식 레스토랑 ‘비움’. 고즈넉한 분위기의 정원과 기와를 연상케 하는 돌 슬레이트 지붕이 자리한 레스토랑 입구.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카운터.

홍살문 구조를 재해석한 대문을 설치한 건물 출입구.
“형체가 없으나 그로부터 형체가 생겨나고, 음이 없으나 다섯 가지 소리가 울려 퍼지고, 맛이 없으나 다섯 가지 맛이 드러나며, 색이 없으나 다섯 가지 색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유(有)는 무(無)에서 생겨나고, 실체는 허(虛)에서 나온다.” 기원전 2세기, 중국 유안(劉安)은 저서 〈회남자 淮南子〉를 통해 말했다. 진정한 유는 무의 상태에서 나오는 법이라고. 지난해 말 청담동에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 ‘비움(Bium)’과 마주한 순간, 21세기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은 이 레스토랑이 1000년 전의 도가 사상과 맞닿은 지점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곳의 음식과 공간은 비움으로써 완결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육류와 해산물, 유제품에 오신채도 없지만 그 외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곳. 이에 조응하는 지속 가능한 건축 재료를 이용해 안팎으로 한국적 요소를 겸비한 공간. 무엇보다 〈미슐랭 가이드〉 1 스타인 김대천 셰프의 새로운 레스토랑으로 일찍이 소문이 자자했던 곳. 디너 준비로 분주한 주방을 잠시 뒤로하고 나온 김대천 셰프는 비움의 시작을 묻는 말에 “해볼 만큼 해봤다”는 말부터 꺼냈다.

볼에 담긴 유자화채와 사각 플레이트에 산청 딸기·모약과·도라지정과 등의 다식을 담은 반과상.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손님에게 드리는 찬합.

지수화풍 중 ‘지’에 해당하는 한 상.

짧게는 6개월, 길게는 5년 넘게 숙성한 발효 식품들을 보관하는 장독대.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5년여 전 코로나19 팬데믹 직전이었다. “요리를 한 지 20년 정도 됐어요. 솔직히 해볼 만큼 해봤고, 먹을 만큼 먹어봤죠. 전 세계 〈미슐랭 가이드〉 레스토랑만 150군데 정도 다녀왔으니까요. 그러다 코로나19가 터진 거예요. 일에 여러 가지 제동이 걸리면서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어요. 생각할 시간이 많아진 거죠. 제가 하는 일이 어떻게 보면 소비적이잖아요. 그 속에서 어떤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진관사에서 식사를 하게 됐는데, 거기서 깨달음을 얻었어요.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보통 채소 요리로 낼 수 있는 퍼포먼스는 굉장히 미미해요. 하지만 충분히 그 이상의 맛을 낼 수 있어요. 정말 오랜만에 음식을 먹으며 보상받은 느낌, 말 그대로 감동을 받았어요. 그때의 경험이 비움의 토대가 됐습니다.” 비움은 사찰 음식을 베이스로 한 전통 채소 한식 레스토랑이다. 1000년에 걸쳐 계승된 사찰 음식은 한식의 중요한 뿌리다. 전통 발효 식품, 나물 요리, 채식 문화, 제철 식재료 활용법 등을 보존하고 전수하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사찰 음식의 깊은 원리에 일찍이 레스토랑 ‘세븐스도어’에서 선보였던 김대천 셰프의 발효 숙성 노하우가 더해졌다. 직접 담근 장과 발효 식품은 물론이고, 지리산과 울릉도 등 전국 각지에서 엄선한 제철 유기농 식재료를 쓰다 보니 본격적인 시작에만 적잖은 시간이 소요됐다. “길게 잡아 3년은 준비한 것 같아요. 이를테면 제주도에서 4월이면 생고사리가 나오는데, 한 번 데친 다음 급랭해서 보관하는 절차가 수도 없이 많아요. 이러니 1~2년 만에는 어렵죠.” 비움은 애피타이저인 ‘초조반’을 시작으로 네 가지 메인 메뉴인 ‘지수화풍’을 거쳐 차와 다과로 마무리하는 여섯 가지 코스의 식사를 선보인다. 이 중 지수화풍은 동명의 불교 개념을 따른 것. 땅을 상징하는 나물과 해조류, 물의 성질을 띠는 음식, 불을 활용한 요리, 이 외의 제철 식재료로 만든 요리를 한 상으로 구성한 메뉴다. 가죽나물부각, 메주콩을 발효시킨 쥐눈이콩, 띄운 콩, 연잎밥, 말린 호박나물, 제주 생고사리로 이뤄진 ‘지’. 톳두부무침, 파래초무침, 파래볶음, 고추 장아찌, 홍갓을 넣은 동치미 등으로 구성된 ‘수’. 각종 채소로 속을 채운 비건 군만두, 3시간 동안 간장에 졸여 비장탄에 구워낸 표고버섯, 직접 만든 고추장으로 양념한 더덕, 울릉도 엉겅퀴 장아찌, 현미밥으로 구성된 ‘수’. 배를 갈아 올린 깻잎, 두릅 장아찌, 울릉도 눈개승마나물, 오신채를 뺀 김장김치, 잡곡밥, 아욱된장국 등으로 이뤄진 ‘풍’. 이 모든 음식은 불림과 말림, 데침, 구움 등의 지난한 프로세스를 거치고 직접 발효한 장으로 담백하게 간이 돼 식탁에 놓인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벅찬 가짓수와 복잡한 조리법보다 더 놀라운 것은 재료 본연이 지닌 풍미의 폭발적 발현이다.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비로소 마주한 우리 땅의 맛이 작고 소담한 반찬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다. 이 경험을 담을 공간의 적임자로 착착건축사무소의 김대균 소장이 낙점됐다.

한국적 면모를 강조하는 주춧돌과 나무 기둥.

한지로 마감한 클로짓.

스탠다드에이와 협업해 한옥에 어울리도록 디자인한 가구.

전통 결구 구조와 한지 마감이 적용된 모서리.
서울 도심 한복판의 한옥부터 해남 땅끝 유선관까지, 전통 건축 본연의 모습에 현대적 미감까지 갖춘 이름난 한옥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인테리어부터 시공까지 약 4개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김대균 소장이 집중한 것은 당연함에서 오는 아름다움이다. “절이나 궁궐 등 전통 공간을 떠올려보면 그리 특별할 게 없는데 아름다워요. 왜 감동으로 다가올까? 당연한 것에 담긴 아름다움의 근원을 따라가보기로 했어요.” 전통 공간의 마당에 깔린 박석의 형태만 봐도 알 수 있듯 ‘한국미’란 의도된 불완전함과 불균형, 이를 위해 마다하지 않는 정성과 수고, 이로써 만들어지는 고유한 미감으로 대변될 수 있다. 방법은 명쾌했다. 새로운 무언가 혹은 무늬만 그럴싸한 전통이 아닌, 재료와 구법을 제대로 인용하는 것. 김대균 소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켜켜이 쌓인 역사에서 오는 아름다움이 머무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 세대에 걸쳐 공법을 이어온 대목장, 흙 미장 장인, 한지 마감 장인과의 협업 역시 필수적이었다. 30mm 두께의 판재를 일일이 켜 부재를 맞물린 결구 구조를 적용했고, 흙벽 조성을 위해 충남 보령에서 공수한 흙을 매일 10cm씩 다지는 과정을 며칠씩 반복하며 초벌, 재벌, 정벌에 걸친 작업을 이어갔다. “옛것이 지닌 아름다움에 담긴 미적 태도를 알아차리는 게 건축가의 몫인 것 같아요. 다른 말로 정성이 보였으면 했어요. 음식이든 인테리어든 정성을 들이면 누군가 알아주게 돼 있고, 그것이 만드는 사람의 자긍심이기도 하죠. 정성을 받는 사람의 기분은 말할 것도 없고요.” 흙과 돌, 나무와 종이로 쌓아 올린 이곳은 언제든 자연으로 돌아갈 준비가 돼 있다. 이곳의 음식들이 그러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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