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산을 오르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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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영

트레일 러너이자 작가. 〈아무튼, 산〉을 썼다.

첫 직장을 그만두고 받은 퇴직금으로 네팔 카트만두행 비행기표를 끊었던 2011년 4월 7일. 어쩌면 그날이 모험가로서 내가 태어난 날이 아닌가 생각한다. 모험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위험을 무릅쓰고 어떠한 일을 함 또는 그 일.” 어떠한 일을 하는 데 있어 위험을 무릅쓴다는 것, 즉 안전한 상태를 스스로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이 모험의 전제라면 퇴사한 지 일주일도 안 돼 무작정 히말라야로 직행했던 그해의 도전은 충분히 모험이라 할 만하다.
20대 후반, 살아야 할 날이 한참 많은 청춘이어도 그때까지 단 한 순간도 소속 없이 살아온 적이 없었다. 초·중·고로 이어지는 학창시절, 한 학기 조기 졸업한 대학시절, 졸업과 동시에 진학한 대학원에 이어 졸업과 동시에 취직하며 숨 가쁘게 살아왔다. 연착 없이 정시에 도착하는 다음 열차의 탑승권을 손에 넣으며 안도했고, 삶은 그렇게 스스로 달려갔다.

나에게 히말라야 여행은 달리는 열차에서 밖으로 뛰어내리는 행위였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 어디가 어디인지 알지 못하는 곳,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곳,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가늠할 수 없는 곳,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곳(당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도 속의 광활한 산맥을 바라볼 때마다 설렘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내가 가도 될까? 갈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모든 걸 취소할까? 갈팡질팡하는 마음은 네팔에 도착하고 트레킹에 나서는 전날까지 계속됐다.
한 달을 생각하고 떠난 히말라야 여행은 6개월까지 이어졌다. 길은 길을 낳았고, 산은 끝이 없었다. 산을 따라 걸으며 매일 배낭을 싸고 푸는 여정 속에서 배운 것은 배낭의 무게와 행복의 무게는 반비례한다는 것, 가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산이 곧 삶인 인생이 막을 열었다. 중견 등산 잡지사로 이직해 산에 대한 글을 쓰며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산에 갔다. 평일의 산이 생계를 위한 산이었다면 주말의 산은 나를 위한 산이었다.

아홉 수였던 그즈음 산을 달리는 트레일 러닝을 시작하면서 산의 세계는 더 넓어졌다. 산을 걷지 않고 달리면 같은 시간 동안 더 많은 풍경을 볼 수 있다. 당연히 더 멀리 갈 수 있었고, 심장과 다리는 더 강해졌다. 내 안의 가능성을 보고 싶어 트레일 러닝 대회에도 출전했다. 국경을 넘어 일본으로, 중국으로, 동남아의 여러 나라로. 일상과 모험은 매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했다. 다섯 평 남짓한 자취방 한구석에는 풀지 않은 배낭이 놓여 있었고, 현관에는 흙투성이 등산화가 뒤엉켜 있었다.
나는 늘 떠날 준비가 돼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어디로도 떠날 수 없었다. 연차를 붙여가며 길어야 3박 4일의 모험을 떠나는 것이 최선이었고, 그때마다 눈앞의 산길을 정처 없이 걸었던 히말라야가 생각났다.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한 삶, 그렇다고 원 없이 유랑할 수도 없는 삶. 내 삶은 그 중간 어딘가에서 비척대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기착지로서의 삶이 있었다.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닌, 여기이면서 저기인 이상하고 신비로운 삶이 있었다.

이곳과 저곳의 경계에 솟아 있는 산, 그런 산을 오르는 내가 경계인인 것은 너무 당연했다.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자 삶은 다시 단순해졌다. 다행일까, 불행일까.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삶에 대한 호기심, 배낭의 무게와 반비례하는 행복을 내 DNA는 기억하고 있었다. 정착에 대한 욕망은 일순간 모든 것을 무겁게 했다. 좋은 집과 비싼 차 등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하고 더 많은 것을 비축해야 한다는 마음은 지금을 온전히 살지 못하게 했다. 시선은 자꾸 미래로 향했고, 그 안에 내가 갈 곳은 없었다. 하지만 목적지를 산에 두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고, 그렇게 하려면 가벼워야 했다. 가진 게 적은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나만큼 산을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해 강원도 원주에 머문 지도 3년째. 동서남북 어느 산을 가도 좋은 베이스캠프 원주. 글을 쓰며 일하다가 다녀오는 잠깐의 산은 하루의 전부라 해도 좋다. 그렇게 산에 갈 준비를 하는 시간과 이윽고 산에 오르는 시간으로 이뤄진 하루를 보내며 일상 속 모험은 순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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