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진행형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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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커프스 화이트 셔츠는 C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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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는 많이 하셨지만 화보는 낯선 경험이시죠?
그러니까요. 막 스케줄이 여섯 시간씩 잡혀 있더라고요. 그런데 화보 인터뷰가 대체 뭐예요?

보통 매거진 인터뷰에서 자연스러운 모습과 대화를 담는다면, 의상이나 메이크업 같은 스타일을 비중 있게 보여주는 쪽이 화보 인터뷰라고 보시면 돼요.
글쎄, 난 이해도 잘 못하겠더라고요. 이게 뭔지.

패션 매거진에서 젊은 연예인들의 정형화된 아름다움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다양한 연령대, 폭넓은 삶의 역사를 가진 여성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려는 게 긍정적인 시도라고 생각해요. 저 역시 인터뷰어로서 대표님의 이야기를 잘 전달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모셔주어서 영광이죠. 나한테 어떤 옷을 입힐지 그게 제일 궁금한데 이따가 물어봐야지(웃음).

요즘 일상은 어떠신가요? LG아트센터 대표직에서 퇴임한 후에는 주로 리더십 코칭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꽤 바빠요. 이 나이에 이렇게 계속 일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우리 때는 제1 커리어를 끝내면 그 경력을 바탕으로 2~3년 다른 기관에 가서 뭘 좀 하다가 은퇴하는 게 보통이었어요. 나도 그럴까 했는데, 아무래도 일을 더 해야겠더라고요. 다시 공부해서 코칭 자격증을 땄어요.

기업에서도 직원 교육 분야에 오래 계셨죠
LG인화원에서 일하면서 그룹 임원이나 CEO 대상의 교육을 많이 담당했어요. 내가 여자라서 주어진 일이죠. 리더 교육은 다들 싫어하거든요. 임원급 이상의 리더들은 교육받으러 와서도 가르치려고 드니까…. 얼마나 골치 아파요? 스트레스가 많은 자리다 보니 유일한 여성 구성원인 나에게 넘긴 거예요. “그래도 윤 상무님이 얘기하시면 그 어려운 아무개 부회장님도 들어주시잖아요” 이러면서 자기들 하기 싫은 일을 떠안긴 거지(웃음).

띄워주는 듯하면서 실은 기피 업무를 맡긴 셈이네요
그때는 문제 제기 없이 조용히 맡았어요. 시시비비를 가려봤자 더 큰 갈등이 일었을 거예요. 그냥 해보자고 받아들이니까 배짱이 생겼어요. 이유가 어찌 됐든 나한테 오는 일을 잘해내면 위너가 되는 거라고 마음먹었죠. 하다 보니 점점 리더십 개발에 몰입해있더라고요. 리더십의 영향력이라는 게 막강하고 어마어마하다는 걸 깨달았죠.

무 성과에 리더가 미치는 영향 말씀이신가요
그것 이상이에요. 조직이 크건 작건 리더십에 따라 구성원들의 행불행, 인생까지 왔다 갔다 하는 걸 봤어요. 그 점에서 빠져들게 됐어요.

남들이 기피하는 일을 맡았다가 거기서 길을 찾은 셈이네요
처음부터 길이 보이진 않았어요. 교육 프로그램을 짜면서 유명한 석학도 모셔오고, 미국 대학과 협력도 해봤는데 늘 2% 부족하더라고요. 수료생 만족도 조사 평점이 높게 나왔다고 해서 진짜 괜찮은 건 아니잖아요? 내가 충분히 잘하고 있는지, 이 사람들이 정말로 변화하고 있나 내내 고민했어요.

자기가 좋아서 더 잘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질적인 고민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맞아요. 그러다 코칭 리더십이라는 개념을 만나게 됐어요. 구성원의 잠재력을 극대화하고 성장을 돕는 리더의 역할에 대한 훈련이에요. 미국에서도 1990년대에 자리 잡은 교육인데, 이걸 보니까 내가 여태까지 찾아온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리더가 어떻게 해야 조직과 구성원들이 잘되나요
깊이 들어갈수록 원리는 단순해요. 경청하라, 인정하라, 혼자 떠들지 말고 질문하라.

어렵네요
상식적으로 알지만 실행하기가 어렵죠. 위에서 닦달하고 쥐어짠다고 성과가 나오나요? 오히려 부드럽게 이끌어야 된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지만 사람은 진심으로 변해야 하니까 어려운 거예요.

골드 세퀸 장식의 그레이 니트 톱은 Ermanno Firenze. 솔리드 블랙의 박시한 재킷은 Bourie. 벨티드 랩 트라우저는 COS. 블랙 에나멜 슈즈는 Carel Paris.

골드 세퀸 장식의 그레이 니트 톱은 Ermanno Firenze. 솔리드 블랙의 박시한 재킷은 Bourie. 벨티드 랩 트라우저는 COS. 블랙 에나멜 슈즈는 Carel Paris.

아까 이 나이까지 일할 줄 몰랐다고 하셨는데 어떤 맥락인가요
리더십 코칭을 초창기에 도입해 소개하다가 LG아트센터 대표로 자리를 옮기게 됐어요. 그사이에 코칭이라는 개념이 조금씩 기업에 받아들여지면서 확장되더군요. 퇴임하고 1년쯤 놀다가 일해야겠다 싶어서 코칭을 다시 붙들었죠. 꽤 ‘빡세게’ 공부하고 자격증도 땄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가 나이를 이렇게 먹었는데 이걸 언제 배워서 써먹어? 똑같이 공부해도 젊은 사람에게 일이 가지 않을까?’ 하지만 공부해서 나중에 써먹지 못하고 끝나더라도 이걸 하고 싶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 그리고 보람 있는 일.

지금 잘 써먹고 계시는군요
살면서 나도 모르게 자주 하는 얘기가 이거예요. ‘We never know.’ 무슨 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요. 미국에서 유학할 때도 똑같은 걱정이 있었어요. 여자 나이 마흔이 넘어 박사 학위를 따면 취직이 더 안 된다, 아무도 채용 안 한다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서 LG의 제안을 받고 자리를 잡게 됐죠. 정말 ‘위 네버 노’예요. 세상이 변하는 걸 예측할 수 없더라고요. 다만 좋아하는 것, 보람 있는 것을 열심히 따라가다 보면 다 끝인가 싶다가도 어떤 기회가 나타나는 거죠. 그러니까 자기가 하고 싶으면 그냥 하세요. 이걸 누가 찾아줄까 신경 쓰지 말고.

20~30대의 고정관념과 마주할 때가 많아요. 마흔이 넘으면 커리어가 안정될 거라고, 혹은 안정돼야 한다고 생각하더라고요. 40대에도 똑같이 흔들리고 끝없이 변화에 적응하면서 살고 있다는 걸 짐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그렇게 쉽게 안정이 오겠어요? 친구 중에 그런 이가 있어요. 남편이랑 결혼하면서 둘이서 그랬대요. ‘만약 마흔이 됐는데 우리가 세상에 이름이 안 나 있으면 같이 죽자’ 그러고 결혼했다는 거야(웃음).

돌아가셨나요? 두 분
멀쩡히 밥 잘 먹고 잘 살고 있어요. 어떻게 이름이 그렇게 쉽게 나겠어요? 마흔은 또 얼마나 빨리 오는데.

나이에 대한 인식이 빠르게 바뀌고 있는 게 느껴져요. 서른이 뭔가 성인으로서 기반을 이뤄야 하는 나이 같았다면 이제는 출발하는 나이에 가깝죠. 마흔도 훨씬 가벼워지는 느낌이고, 이제는 5060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질 것 같아요
내가 이 나이에 이렇게 일하리라는 걸 몰랐잖아요. 우리 언니(배우 윤여정)도 70대에 계속 일하고 있고.

CEO나 임원뿐 아니라 대학생 대상 1:1 코칭도 하셨죠
4년 정도 재능 기부 삼아 했어요. 난 젊은 사람이 좋아요. 지금도 어느 모임에 여러 세대가 함께 있으면 난 꼭 젊은 사람 곁으로 가서 얘기 나눠요. 기업에서 초청하는 강의는 거절할 때도 있지만, 대학교 강의는 아무리 멀어도 가려고 해요.

젊은 사람을 가까이하면서 배우는 게 있나요?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해가 잘 안 가거나 참 다르다 싶은 점은 뭔가요
그게 배움이에요. ‘너무 다르구나’를 느끼는 것. 그들에게 특별히 배울 내용이 있고, 그들만이 아는 지식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다르다는 것 자체가 배움이죠. 요즘 친구들은 이렇구나, 있는 그대로 우리 세대가 받아들여야 해요.

‘나 때는, 우리 때는’ 이런 얘기가 튀어나올 때는 없으세요
그걸 참아야 돼요. 아이들이 걸음마 연습하듯 어른들은 자기 말 참는 법을 배우고 익혀야 해요. 그래야 젊은이들이 끼워주고 자신의 얘기도 꺼내놓지. 어른이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면 어린 사람들은 바로 입 다물어요. 임원 코칭을 하면서도 MZ세대 직원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이 주요 주제로 다뤄져요. 그 어른들은 조인트 까면 까이고 야근하라면 밤도 새우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젊은 세대에게 그런 가치관이 통하겠어요? 저는 이렇게 얘기해요. “설교나 강의는 절대 하지 말고 그냥 들으세요. 듣고 참 잘한다고 인정해 주세요. 그때부터 대화가 되는 거예요.”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만 쏟아내면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게 되죠.

맞아요. 낀 세대인 제가 볼 때는 젊은 세대도 성실하게 사는걸요. 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다르고 표현방식이 다를 뿐이죠
에고가 강한 분들은 팀원이랑 대화하고 와서는 여전히 흉을 보세요. 그런데 코칭을 잘 듣고 노력해서 경청을 연습한 리더들은 돌아와서 꼭 이런 반응을 보여요. “애들이 다 생각이 있더라고요. 제가 모르는 게 많았어요.” 그럴 때 뿌듯하죠. 내 코칭이 성공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진정으로 변했기 때문에. 젊은 세대에 대해서는 무조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돼요. 함무라비 법전에도 ‘요즘 애들 버릇없어’가 적혀 있었다잖아요. 인류 역사는 그런 식으로 발전해 왔어요. 무조건 순응해서 꼰대 눈에 예쁜 애들만 가득하다면 무슨 발전이 있겠어요?

회사에서 일하면서 상사랑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해하는 젊은이도 많을 거예요. 그들에게는 어떤 말씀을 해주시나요
“여러분, 부장님이나 상무님을 보면 거리감 느껴지고 부담스러우시죠? 제가 알기로는 그분들이 여러분을 굉장히 두려워하고 어려워해요. 그러니 조금 마음의 문을 열고, 약간 꼰대스러운 부분이 있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서로 가까워지려는 마음으로 얘기 나눠 보면 해볼 만합니다(웃음).”

플라워 프린트의 블랙 셔츠는 Bour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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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장 큰 환경 변화 중 하나는 스마트폰과 SNS 같아요. 남들의 화려한 삶이 너무 크게 눈에 들어오고, 그러면서 내가 못 가진 것을 의식하기가 쉬워졌어요
내가 아무리 잘나도 남과의 비교는 즐거움을 가져다주지 못해요.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해내는 건 비교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오히려 자신의 세계에만 몰두해서 미친 듯이 뭔가 해본 사람들이죠.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만족이 없어요. 그 비교에서 조금 잘난 걸 확인하고 또 한없이 비교할 대상을 찾아서 전쟁하듯 살다 끝나는 거지. 비교란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독 중 하나예요.

어떻게 하면 자신이 이미 가진 좋은 것들, 자신의 강점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남들이 아니라 자기를 봐야죠. 스스로 들여다본다는 것도 조용한 묵상보다 잠재력을 실험하는 행동을 통해 가능해요. 각자가 가진 것도 끊임없이 변하니까요. 난 뭘 잘하나, 뭐 할 때 행복할까, 어떤 사람과 있을 때 호흡이 잘 맞나…. 이런 걸 하나씩 확장하면서 인식할 수 있는 게 바로 메타 인지죠. 자기 연구는 MBTI 테스트 한 번 하듯이 편하게 이뤄지지 않아요. 요즘은 사람을 너무 MBTI 성격 유형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는데, 자신도 타인도 그렇게 몇 가지 유형으로 딱 맞게 나눠 받아들일 수는 없어요. 복잡하고 어려운 나를 살펴보고 부딪히면서 용감하게 탐험해 봤으면 좋겠어요.

지금의 나를 만든 인생의 중요한 선택은 무엇이었나요
포기하지 않고 박사 학위를 딴 것. 저는 여유가 있어서 야망을 품고 유학을 떠난 게 아니었거든요. 남편 따라 미국에 갔는데, 남편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살길이 막막해 공부를 한 거예요. 절박한 심정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나에게 중요한 과정이었죠. 마흔 살이 넘어 학위를 따면 대학에도 회사에도 자리 잡기 어렵다는 만류를 많이 들었는데, 그때 굴하지 않고 논문 쓰기를 잘했어요. 또 하나 잘한 건 기업에서 일한 거예요. 현실 세상에서 쓰임새가 있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이 재밌고,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인간적으로 성장하는 게 좋았어요.

대기업은 너무 큰 조직들의 집합이라 움직임이 느린 면도 있지 않나요
맞아요. 그러니까 그 속에서 변화를 만들어내려면 멀리 보고 가야 돼요. 우리 큰언니도 그런 스타일인데, 자매들 DNA에 그런 게 있나 봐요. 하던 대로 답습하는 일은 갑갑해요. 그런데 뭔가 바꿔보려고 할 때 제일 어려운 게 뭔지 아세요? 외부 환경이 아니라 내부의 적이에요.

늘 해오던 대로만 하려는 관습적인 사람들 말씀이군요
그게 더 큰 걸림돌이죠. 특히 여자가 새로운 걸 시도하면 더 욕을 먹었어요. 예를 들어 그룹사 임원들을 강사로 모셔오는 시도를 처음 했어요. 외부 강사보다 후배들에게 줄 수 있는 게 많다는 확신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왜 교육하는 사람들 일을 우리에게 해달라고 떠넘기냐”는 반응이었죠. 회사 망신이다, 여자가 너무 나댄다, 드세다…. 심지어 직접 섭외 전화를 돌리면 “마담이냐”는 소리까지 들었죠. 같은 임원끼리 왜 아쉬운 소리를 하냐며 볼썽사납다는 거예요.

진짜 답답하네요. 그런 무례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처하셨어요
버텼죠. 이게 옳다는 소신이 있으니까. 모든 사람이 변화를 박수 치면서 환영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렇게 해서 잘되면 작은 성공 사례가 생기잖아요. 작은 파뿌리 캐오듯 열심히 하나씩 모으는 거죠. 나중에는 초빙했던 임원들이 와서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이 강의를 계기로 자신이 한 일을 돌아보게 됐다고, 후배들의 질문을 받으며 배우는 게 많다면서요. 용기를 내 더 밀어붙였죠.

조금씩 성공해 보는 경험으로 남에게 내 역량을 증명하기도 하지만 스스로에게 의미가 큰 것 같아요. 계속해 나갈 수 있는 자기확신이 생기잖아요
그게 성장이에요. ‘할 수 있구나,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를 발견하며 가능성을 점점 여는 것.

신입사원 중에 여성 비중이 높은데, 직급이 올라가고 경력이 쌓일수록 여성이 점점 드뭅니다. 그래서 선배의 존재가 소중하고요. 앞서 일해온 여성으로서 여자 후배들에게 자주 하는 말씀이 있나요
저도 나서고 싶어 하지 않는 편이었어요. 그런 저에게 수십 년 지기인 후배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혼자 겸손한 척하지 말라고. 선배의 지난 경험을 공유해 주면 얼마나 도움이 될 친구가 많은데 어디서 겸손한 척하고 있냐고. 그 말에 충격받은 뒤로 저를 세상에 끄집어내게 됐어요. 책도 쓰고, 〈유 퀴즈 온 더 블럭〉에도 출연하고, 강의도 하면서 내 경험을 나누고 있어요. 일하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이라면 지방까지도 가요. 그런데 아무리 큰 조직, 세련된 외국계 회사라도 강연을 듣다가 한두 명은 반드시 울어요. 여성으로 일하면서 살아남기가 여전히 어렵다는 의미겠죠. 그들에게 힘을 주고 싶어요. 일하는 여성 모두가 자신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믿고 다 꺼내 쓰면 좋겠어요.

샤이니한 소재의 트렌치코트는 Bour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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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겸손하지 않아야겠네요. 내 경험에서 도움받을 후배가 많으니까요. 여자들은 기본적으로 혼자서 잘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애쓰다 보면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것도 같아요. 왜 여성끼리 더 응원하고 격려하면서 뭉쳐야 될까요
여성끼리의 연대가 너무 필요하지만 그렇게 잘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비난할 수 없어요. 여성은 아직도 마이너리티고, 사회에서는 적은 기회를 내주면서 여성끼리 서로 경쟁하게 만들거든요. 그 압박 속에서 시야가 좁아지고 어떻게든 자신의 자리에서 살아남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죠. 그럴수록 멀리 내다보면서 노력해야 해요. 남자들을 보세요. 성장하는 조직에서 서로 끌어주고 밀어줘요. 낮에는 일을 잘 못했다고 막 야단치는 것 같지만 저녁에는 데리고 가서 소주 한잔 사주면서 키워주거든요. 근데 여성들은 숫자도 적고 그렇게 교류하는 기회도 적다 보니 점점 외톨이가 돼서 고군분투해요. 이런 상황을 벗어나려면 과감히 뭉쳐야 해요. 경쟁에서 싸워서 한 명만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그래, 네가 먼저 해 나는 좀 나중에 갈게’ ‘고마워, 다른 기회가 있을 땐 내가 밀어줄게’ 그런 마음으로요. 그래야 목소리를 내서 이 사회를 바꾸고 남자들을 설득할 수 있죠. 이걸 혼자 하기는 어려워요. 내 인생의 목표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후배들에게 만들어줄 세상을 상상해 보세요. 서로 경쟁하기보다 도와주세요. 그것으로 얻는 게 훨씬 크다고 생각합니다.

여성끼리의 연대 외에 유리 천장을 없애기 위해 사회적으로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우리나라 여성들이 일하는 데 제약이 많아요. 우선 육아 시스템의 기반이 확충돼야죠. 그리고 기업 CEO들이 여성을 리더로 많이 채용해야 해요. 그래야 밑에서 보면서 따라갈 수 있죠. ‘여자들이 남자 누르면서 치고 올라옵니다. 요즘 여자들 무섭습니다’ 이런 말을 농담이라고 하는데, 숫자를 보라고요. 한참 부족하죠.

여자가 전체의 20%만 돼도 남자들은 절반 이상인 것처럼 느낀다죠? 여성들 입장에서는 연차가 쌓일수록 점점 동료가 줄어들어요. 임신과 출산, 육아를 거치면서 경력 단절이 일어나고요
그게 바로 사회적 제약이고 좌절이죠. 아직 의사결정권이 남성에게 있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기회 닿는 대로 그들에게 말해요. “인생을 걸고 일하시죠?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으세요? 사회에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세요. 힘이 있을 때 남들이 안 하는 일을 하세요. 여성 리더를 채용하고 은퇴하세요.”

건강은 어떻게 관리하세요
체력 관리를 못해서 문제예요. 일만 하다가 지난해에 무릎 연골이 손상됐어요. 퇴행성 관절염. X레이를 보는데 이게 내 사진이라니, 너무 쇼크였어요. 평생 잘 뛰어다니는 사람이었고, 여든, 아흔까지 살아도 굳건하게 움직일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충격이 커서 한동안 우울감에 시달렸어요. 하지만 지팡이를 짚고, 휠체어를 타고 강연을 했죠. 가만히 누워 있으면 더 절망적이겠더라고요. ‘불편한 건 내 무릎이지 머리와 입은 멀쩡하잖아?’라면서!

지금은 괜찮은가요
이제 정신 차려 재활 PT와 함께 운동을 해요. 육체적 건강은 신경을 안 썼고, 또 내가 잘 버티니까 건강한 줄 알았나 봐요.

그럼 정신적 건강을 여쭤볼게요. 스트레스는 어떻게 관리하시나요
내가 좋아하는 걸 하는 시간을 꼭 가져요.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죄책감이 많아요. 특히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게 사치라고 여기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남편에게, 아이에게, 시어머니에게도 미안해하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건강하게 일하고 쉬고 즐길 줄 알아야 선순환인 거죠. 그리고 스트레스를 관리하기 위해 남들 눈에 그럴듯해 보이는 뭔가를 하려고 하면 더 큰일이 돼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해야 활력을 얻죠. 저한테는 그게 영화 두세 편 몰아서 보기, 갤러리 가서 전시 보며 혼자 즐기기였어요.

앞으로 몇 살까지 일하겠다는 계획이 있나요
죽기 전까지(웃음)? 저도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지 모르겠어요. 어떤 모임에 가면 제가 최연장자라 깜짝 놀라요. 그런데 잘 나이 먹고 싶다면 계속 일해야 할 것 같아요. 사람은 일을 통해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 같아요. 꼭 어떤 전문성의 축적이 아니더라도 취미로 즐기는 것을 넘어 내가 붙잡고 싶은 일 말이죠. 은퇴 뒤에 모임 나가고, 골프하고, 여행하고…. 그렇게 지내도 좋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건 과거의 연장선상이고 이미 익숙한 세계예요. 새로운 만남, 새로운 학습은 일을 통해서 와요.

지금 힘든 과정에 있는 후배들에게는 뭐라고 말씀해 주시겠어요
긴 호흡으로 가라고 말하고 싶어요. 너무 짧게 보지 마세요. 지금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변하나요? 당신이 생각하는 직위나 직급, 직장이 전부가 아니에요. 정말 다른 게 계속 펼쳐질 거예요. 열심히 하다 보면 여러분 안에서 그게 다 연결돼요. 어느 직장에서 잘렸다고 해도 그게 끝은 아니에요. 하고 싶은 일, 추구하는 바가 있다면 닫힌 문이 또 다른 곳에서 열려요. 인생은 참 길거든요.

혼자 변화를 만들어내기는 어려워요. 내 인생의 목표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후배들에게 만들어줄 세상을 상상해보세요. 그리고 서로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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