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당 스파이크 3주 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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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엄마의 잔소리.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밥은 꼭 먹고 다녀야 한다”는 것. 학교에 지각할 것 같을 땐 어떻게 했냐고? 질문 자체가 틀렸다. 적든 많든 아침밥을 먹어야 엄마의 ‘등짝 스매시’를 피해 현관 문턱을 넘을 수 있기 때문에 아침밥 먹는 시간까지 고려해 좀 더 일찍 눈을 떠야 했다. 졸린 눈 비비면서 밥상머리에 앉아 깔깔한 입을 침으로 달래며 밥 한 술 넘기기가 어찌나 귀찮던지! 어린 마음에 ‘난 아침밥 안 먹는다’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의 철석같은 원칙에 감사할 따름이다. ‘미식(美食)하되 소식(小食)할 것’ 그리고 ‘아침은 왕처럼, 저녁은 거지처럼’이라는 문구는 내 식습관을 관통하는 잠언 중 일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구체적인 실천법을 나열하자면 세상에 맛있는 건 너무나 많고, 맛있는 걸 먹을 때 느끼는 행복감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크니 웬만해서는 메뉴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단, 가공식품보다 제철 재료로 만든 음식을 포만감이 7할 정도 채워질 때까지만 절제해서 먹고, 도저히 ‘이 음식이 먹고 싶어 못 견디겠다’ 싶을 땐 가급적 저녁보다 아침에 먹곤 했다. 하지만 엄정화 유튜브에서 ‘혈당 스파이크’에 대해 알게 된 이후 오랫동안 고수해 온 내 식습관에 강한 의구심이 생겼다. 공복 상태에서 특정 음식을 섭취할 때 혈당이 급격하게 올라갔다 내려가는 현상을 혈당 스파이크라고 하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정제 곡물과 단순 당이 주를 이루는 빵보다 단백질인 오믈렛, 주스보다 커피를 먼저 섭취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조언. 문제는 가끔 ‘폭주’하는 내 아침 식습관에 있었다. 김과 달걀프라이, 마른반찬을 곁들여 밥을 반 공기 정도 먹거나, 베이글이나 발효 빵처럼 ‘식사 빵’을 먹고 출근하는 게 보통의 날들. 하지만 가끔 프렌치토스트나 파운드케이크, 크림 필링이 잔뜩 들어간 마들렌이나 시나몬 롤, 떡 등 먹고 싶어 ‘죽겠는데’ 저녁에 먹기엔 죄책감이 드는 메뉴가 오전 7시 30분 아침 식탁 위에 오르던 것이다. 배가 부를 때까지 먹는 것도 아니고, 간절히 먹고 싶었던 욕구가 해소될 뿐 아니라 출근해서 일하는 동안 칼로리가 소모될 거라고 안심했건만 그사이 내 혈당지수는 오르락내리락했을 게 분명하다.

혈당 스파이크에 대해 경계심을 갖게 된 계기는 또 있다. 음식으로 치료한다는 ‘식치’를 강조하는 정세연 한의사의 유튜브에서 혈당 스파이크를 유발하는 최악의 아침 식사 메뉴 다섯 가지를 꼽았는데 누룽지와 선식, 과일이 언급된 것. ‘하루 한 개의 사과는 의사를 멀리하게 한다(An apple a day keeps the doctor away)’는 역시 내 식습관 철칙 중 하나였기에 아침에 일어나 공복에 사과 반쪽을 먹는 루틴을 15년 동안 유지해 왔고, 사과가 없을 땐 제철 과일로 대신했다. 근데 공복에 과일을 먹는 게 혈당을 치솟게 하는 최악의 습관이라니! 식후 급격한 피로감과 참을 수 없는 졸음, 집중력과 판단력 흐려짐, 불안정한 식욕 등이 혈당 스파이크의 증상이라고. 최근 느낀 극심한 피로감과 집중력 저하 증상이 혈당 스파이크 때문은 아니었을까? 혈당 스파이크가 반복되면 인슐린 저항성이 생길 수 있고, 혈관 내피 세포가 손상되거나 산화 스트레스를 증가시켜 염증 반응이 일어나는 데다 동맥경화나 심근경색의 원인이라니 당뇨는 내 일이 아니라고 여겼던 나도 신경이 쓰였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을 느끼며 이참에 혈당 스파이크를 방지하는 식습관으로 바꿔보기로 결심했다.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음식을 먹는 순서’에 있다. 식이섬유(채소), 단백질, 탄수화물 순으로 식사해야 포도당이 혈류로 들어가는 속도를 늦춰주기 때문. 급선무로 아침 공복 상태에 먹던 과일을 채소로 대체했다. 양상추에 새싹 채소를 곁들인 샐러드를 가장 먼저 먹기로 결심한 첫날, 샐러드용 채소를 다듬고 씻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첫 번째 위기에 봉착. 씻은 채소를 채반에 밭쳐둔 사이 과일을 깎고 평소처럼 남은 씨 부분을 이로 알뜰히 갉아먹기 위해 무의식중에 과일 꼬다리를 입으로 가져가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며 두 번째 위기에 봉착! 수차례 시행착오를 겪은 뒤 찾은 해법은 전날 밤에 오이나 파프리카, 당근 등을 길쭉하게 잘라 통에 넣어두는 것이다. 다음날 일어나 드레싱 없이 당근의 달착지근함과 오이의 시원함으로 혀의 감각을 깨운 다음, 평소대로 사과 반쪽을 먹고 나면 본격적인 아침 2차가 시작되는 것. 올리브오일에 가볍게 익힌 스크램블드에그와 동네 독일 빵 전문점에서 호밀이 73%나 든 펌퍼니켈(Pumpernickel) 두 조각에 에쉬레 가염 버터 살짝, 갓 내린 디카페인 커피 한 잔까지. 달걀 요리가 지겨울 땐 그릭 요거트에 제철 과일을 곁들여 먹기도 하고, 빵과 버터 대신 전날 먹고 남은 반찬을 데워 평소처럼 밥 반 공기와 함께 먹기도 했다. 예전처럼 달달한 빵이나 구움 과자류가 당기기도 했는데 억지로 참지 않았고, 전날 준비해 둔 채소 스틱을 ‘먼저’ 먹는다는 원칙에 집중했다. 외부 미팅이 잦은 점심시간, 평소 함께 밥 먹는 이에게 메뉴 선택권을 넘기곤 했다면 혈당 스파이크를 막는 식습관에 관심이 생긴 뒤로는 샤부샤부나 월남쌈 등을 먹자고 내가 먼저 제안했다. 파스타나 브런치 메뉴가 당길 땐 샐러드를 꼭 시켜 애피타이저 삼아 먼저 먹거나, 우동이나 냉면 같은 탄수화물 음식을 먹을 땐 가능하면 오래 씹어 천천히 먹기 위해 애썼다. 세 번째 위기에 봉착했던 타이밍은 퇴근 후 저녁. 평소 같으면 손을 씻자마자 허겁지겁 아침에 먹다 남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거나 바나나를 입 안 가득 욱여넣어 허기를 달랬다면, 이제는 채소 스틱이나 아몬드를 천천히, 오랫동안 잘근잘근 씹으며 식사를 준비한다. 채소나 견과류가 없을 땐 평소 디저트로 먹던 콩테나 브리 치즈를 조금 잘라먹는다. 조리시간도 짧고 제철 원물 그대로 먹을 수 있는 삶은 달걀이나 닭 가슴살, 찐 고구마나 찐 단호박 등으로 저녁 메뉴를 구성했는데 그동안 ‘저녁은 거지처럼’ 먹어온 탓인지 딱히 헛헛하지 않다. 12첩까지는 아니더라도 5첩 정도는 차려놓고 먹는 한식 메뉴가 당길 때도 있는데, 체중 감량이 목적이 아닌 만큼 아침·점심과 마찬가지로 메인 식사 전에 꼭 채소를 먹는 ‘순서’에 신경 썼다.

이렇게 채소부터 먼저 먹는 ‘삼시세끼’ 식습관을 유지한 지 3주째. 직접 혈당을 측정할 수는 없어서 그래프가 급격히 치솟았다 떨어지는 추이를 보여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직접 몸으로 느낀 변화는 다음과 같다. 똑같은 양이라도 아침 빈속에 과일을 먹는 것보다 채소를 먹을 때 더 오래 씹게 돼 그사이 공복감이 수그러드는 걸 느꼈다. 허기가 다소 가신 채 단백질과 탄수화물을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하니 포만감이 빨리 찾아왔고, 아침 식사량이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허기를 느끼며 곧바로 메인 메뉴에 달려들던 ‘15분 컷’ 식사가 식재료의 맛을 좀 더 음미할 수 있는 이상적인 ‘30분 컷’ 식사로 바뀌었다. 예전에는 애호박이나 가지, 도라지, 콩나물, 버섯 같은 밑반찬용 채소로 장바구니를 채웠다면 이젠 알배추나 파프리카, 오이, 당근, 셀러리처럼 씻어서 손질하면 바로 먹을 수 있는 애피타이저용 채소가 냉장고를 가득 채운 것도 혈당 스파이크에 대해 신경 쓰기 시작한 이후 찾아온 변화다. 지난 20여 년 동안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했던 식습관을 반추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침은 왕처럼’에 담긴 진짜 의미를 이제야 깨달았다. 왕처럼 많이, 푸짐하게 먹으라는 게 아니라 왕처럼 ‘통찰력을 가지고’ ‘여유 있게 음미하며’ 먹으라는 의미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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